현영휘가 신료들을 함인정에 비바람을 맞도록 놔두고 뒤에 임금 이유를 만나러 이동했다.
이미 코앞까지 닥친 적을 피하도록 권하고자 함이었다.
현영휘가 피신을 권하기 위해 이유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황창성과 신숙주가 같이 가겠다고 나서서 삼정승이 임금과 회합하는 그림이 되었다.
처음에는 통명전에 있었던 이유(세조)는 무슨 변덕인지 양화당으로 그 거처를 옮겨 거처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다시 발을 옮겨 양화당으로 들어가 보자 이유는 이불 위에 주저앉아 자지도, 그렇다고 깨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우두커니 이불 위를 바라보았다.
“전하, 어인 일로 이리 일어나 계시옵니까?”
“.......”
“전하, 저희가 왔아옵니다!”
황창성이 약간 언성을 키워 이유에게 외치듯 말했지만 이유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멍한 그 모습에 신숙주가 현영휘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 그냥 억지로라도 밖으로 모시는 것이 어떻소?......”
“......그래도 아무리 정신이 혼미하시다고 사람들로 들어내자는 말이오? 이 나라의 임금을?”
“그리라도 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현영휘가 신숙주의 권고를 듣고는 눈을 돌려 다시 한 번 임금 이유를 불러 보았다.
“전하~! 지금 바깥에는 무도하고 흉측한 적들이 몰려와 전하의 옥체를 손상시킬 위험이 있사옵니다. 지금 저희와 함양문으로 나서셔서 도성 밖으로 피신하시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이옵니다.”
“.......”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자 현영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에 있는 내시의 우두머리인 상선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이보오. 상선영감, 지금 전하를 옷을 입혀드리고 밖으로 모실 채비를 하시오.”
“밖의 상황이 그리 안 좋습니까?”
“....... 채비를 빨리 해주시구려......”
상선이 바깥 상황을 묻는 데에는 정확히 대답해 주지 않고 바깥채비만을 재우친(재촉하다) 현영휘는 다른 두 사람을 챙겨 그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그때 이유가 입을 열어 셋을 불러 세웠다.
“...... 피하면 되는 일이던가.....?”
“!” “!” “!”
가장 어린 황창성이 이유 앞에 엎드리며 통곡을 하며 이유를 불렀다.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전하-! 저 창성이옵니다-!”
“전하-! 정신이 드시옵니까?”
“전하-!”
황창성의 뒤로 현영휘와 신숙주가 부복(배를 땅에 대고 엎드림)하며 이유를 불렀다.
이유가 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입가를 살짝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중광이의 아들이 그리 많이 강하더냐?”
“전하, 조선의 힘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도성내의 치안군사의 약 오백과 금군 이백의 일부가 상하긴 하였사오나 가까운 수원과 남한산과 그리고 경기 일대의 군사를 모으면 5만은 넉넉히 되는 바, 곧 역적들은 모두 일소될 것이옵니다!”
현영휘가 임금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단언을 힘주어 했다.
그 단언을 이유는 쓴 웃음으로 조용히 대답해주었다.
“달리 얘기하면 이미 상할 대로 상하여 총원 칠백에서도 이미 많이 비는 군사를 가지고 5만 정도는 있어야 막아낼 수 있는 적과 마주하고 있다는 얘기 아니냐......? 아주 많이 어렵다는 얘기아니냐?”
“......전하.......”
현영휘가 이유의 차분한 지적에 대답을 못하고 있을 때 이유가 자신을 말로 대화를 치고나갔다.
“난 여기 있겠다. 몸을 피하며 원군을 기다리는 것이 달리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만 나는 피하지 않겠다. 여기서 모든 군을 파하고 중광이의 아들이 오면 그를 만나겠다. 칼을 휘두르면 죽고 엎드려 빌라면 빌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몸을 피하려면......”
“전하-!”
현영휘가 언성을 높혔다.
심계가 깊어 얼굴에 속이 비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고 좀처럼 고성을 지르는 법이 없는 현영휘가 임금에게 언성을 높이자 옆에 있던 신숙주와 황창성이 놀랐다.
“어째 이러십니까? 전하! 지금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사옵니다. 작은 도덕윤리가 대도를 걷는 지존의 체신에 도리어 해가 되심을 어째 모르십니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시다니오. 어째 지금 작은 양심에 얽매여 계유년의 업적에 스스로 먹칠을 하십니까? 전하-! 다시 성심을 찾으시오소서-! 흔들리지 않는 결기를 가지시오소서-!”
“.......무섭기 때문이다......”
현영휘가 사자후를 토하자 이유가 여래의 미소로 받았다. 사자후를 뿜은 사람이 허탈한 눈을 꼭 감았다.
“이제 계유년 그 날의 큰 뜻은 허무맹랑한 공염불이 되었고 병든 몸은 죽을 날만을 바라보고 있잖으냐....... 사는 동안은 사는 의미를 모르고 오직 죽을 때가 되어야 아는 것이니, 이젠 사는 동안의 업보를 셈하여 받을 생각을 하니 무섭기만 하구나.......”
황창성과 현영휘, 신숙주가 감히 말을 못 섞고 가만히 이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저승에는 이미 동생 용이(안평대군)가 있다하고, 향이 형(문종대왕)과 아버지(세종대왕), 어머니(소헌왕후 심씨)......그뿐이냐? 김종서, 황보윤, 성삼문, 박팽년...... 저승가서 그 들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우냐...... 더구나.......”
이유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호흡에 들먹거리며 흔들렸다. 흔들리는 호흡을 추스르고자 큰 한숨을 내쉬자 눈에 고인 눈물이 무겁게 떨어졌다.
“...... 더구나....... 홍위...... 내가 죽인...... 내 조카.......”
잠시 아무도 말이 없는 무거운 침묵이 양화당의 침전을 가득 채웠다.
“...... 죽으면 그 아이는 나는 어찌 만나야 하는가.....? 난 무섭네...... 무서워.......으으으흨~......”
이유는 곧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삼정승의 누구도 이유를 위로하질 못했다.
모두 이유가 읊조린 사람들을 죽이는 데에 공범들이고 누구 하나 난 놈이 없으니 그저 이유의 흐느낌을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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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현은 아이들을 이끌고 계속해서 걸었다.
하늘은 안개비를 계속해서 뿌리며 멈출 줄을 몰랐다.
구름이 쌓인 밤하늘은 별 하나 빛도 새지 않고 새까만 색, 그대로였다.
주변의 민가를 뒤져 나온 호롱 잔의 기름을 나무에 발라 횃불을 만들어 앞을 비추며 항현 일행은 계속 전진했다. 항현의 검광을 계속 쓰는 것이 앞으로의 싸움에 해가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건암이 뒤에 따라 붙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건암은 항현의 일행을 서른 보 이상 떨어져 걸으며 호드기로 주변의 풀어 놨던 창귀호를 끌어 모았다.
천천히 천천히, 창귀호를 모았기 때문에 항현의 일행 누구도 뒤에 따라 붙은 건암을 눈치채지 못했다.
계속해서 내리는 비와 어둠, 그리고 한양 전체에 퍼져있는 요기가 건암의 추적을 숨겨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항현이 앞을 나섰고 말을 탄 수빈과 아이들, 그리고 준모, 광조, 엄지, 검지, 혁춘의 순서였다.
가장 뒤에 선 것이 영적 감도가 가장 떨어지는 혁춘이었던 것도 건암의 추적을 감지 못하게 되었던 원인의 하나였다.
항현 일행은 창경군의 대문인 홍화문에 도착했다.
“아니, 이럴 수가......”
항현은 홍화문이 박살난 것을 보고 제법 놀랐다.
어느 정도 귀갱시와 요괴들을 관군들이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이렇게 처참하게 시설마저 부서진 꼴은 상상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잠시 멈춰 세우고 항현이 직접 부서진 홍화문을 살피러 나갔다.
홍화문을 넘어 명정문 앞을 살피자 나모가비와 귀갱시가 바글바글했다.
‘쯧, 아이들을 병사들에게 맡기고 싸울 수 있다면 좋은데..... 이래서야 돌파가 먼저군.’
항현이 생각을 가다듬을 때 항현의 발목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
“사..... 살려 주시게......”
항현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엎어져 있던 사람을 보았다.
갑옷이 중갑주인 것을 보아하니 상당한 품계의 지휘관이었다.
“다치셨습니까? 누구십니까? 여긴 어쩌다 이리 되었습니까?”
“......으으...... 말도 말게. 그런 것들은 보다가 처음일세......”
“어른께서 누구시길래 이 곳에서 이리 상하셨는지요?”
“난 우포도청의 윤금룡이라하네. 자네는 뉘신가?”
오위도총부(조선시대의 군령기관)의 사용(정9품 무관)이었던 항현은 잘은 몰랐지만 한양 우포청이라면 나름 상급기관이고 그 곳의 수장이라면 이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윤금룡은 홍화문 문루에서 뛰어 내려 다리하나가 다친 상황에서 귀갱시와 나모가비, 창귀호가 명정문으로 향하자 바로 밖으로 절뚝거리며 겨우 빠져 나왔다. 그러나 삼삼오오 귀갱시나 창귀호가 자꾸 이 곳으로 모이고 있다보니 어디로 가기도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리의 통증이 계속 되고 하루 내내 쫓기다 보니까 윤금룡은 그만 주저앉아 의식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항현의 기척에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다.
“전 축귀검에서 사용벼슬을 하는 온항현이라 하옵니다.”
“추.....축귀? 축귀검? 그렇다면 지금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신가?”
“예......, 어명을 받아 금강산으로 추적을 나갔다가 그만 한양을 놓쳤습니다.”
“허어~ 임금이 계신 곳을 우선하여야 하거늘....... 실수를 하셨구만......”
“.......일단 저 뒤로 옮기시지요.”
항현이 연장자의 책망에 아무 말 않고 나머지 일행이 있는 곳으로 윤금룡을 부축하여 옮겨다 놨다.
“저 앞에 홍화문은 다 망가지고 명정문 앞에는 귀갱시와 나모가비가 잔뜩 있습니다.”
“그럼 어쩌죠?”
수빈이 하마하여(말에서 내림) 아이들을 양손으로 붙잡고 상황을 물었다.
항현도 난감하여 다음 행동을 제대로 셈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반대편에서 그들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오셨군요. 저희 앞에까지 나타나셨어요.”
가죽쾌자에 긴 사모를 옆에 들고 종희가 서있었다.
그 뒤를 비합이 사자쾌속추를 들고 줄을 느슨히 풀어 말에 걸쳐 놓고 나타났다.
“끝을 봐야지 않겠나? 아무리 우리가 같은 난힘자라도 이젠 계속 방해를 받는 것이 지겨우이......”
“여기라면 묻어버리기 딱 좋은 곳이지~!” “어---흥---!”
뒤에서 건암이 창귀호를 잔뜩 끌고 나타났다.
준모가 나타난 건암과 창귀호의 숫자를 빨리 세고는 항현에게 말했다.
“...... 창귀호가 일곱이나 되요. 형님......”
“아이들이 문제네......”
혁춘이 자신들을 앞뒤에서 막고 있는 적을 보고서 바로 이상한 점을 알아챘다.
“그...... 해명이란 놈이 없네, 아마 안으로 들어간 모양이야......”
“......!?......”
항현이 혁춘의 지적에 당황했다.
안에 임금 이유가 당한다면 만사휴의, 다 끝장이었다.
“이건 저지조군요. 시간을 끄는.......”
항현이 한 마디하자 그 말을 들은 모두 머리를 끄덕이며 상황을 알았다. 상황이 아주 급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