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있던 종희가 일어나며 구석에 있던 아이와 아이를 안은 어미를 노려보았다.
범상찮은 기운에 어미가 아이를 더욱, 꼭, 품 안에 끌어안았다.
해운이 아이의 어미와 아이를 부럽게 쳐다보았다.
어미의 겁에 질린 표정보다 아이가 꼭 안긴 모습만 눈에 들어온 탓이리라.
종희는 이들을 살려 두어야 하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 이미 한양 도성을 이미 장악한 상황에서 굳이 죽여야 할 필요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바깥의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어 있을지 아는 바가 없었다.
살려 주었다가 당나귀 허리를 부러뜨리는 지푸라기 하나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이대로 가봐야 귀갱시는 창귀호가 덮치면 한 방에 죽을 테니 짐승의 이빨보다는 잘 드는 사모로 깔끔히 죽이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종희...... 언니........”
“....!....”
해운이 갑자기 종희의 다리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안아줘,......”
갑자기 안아달라는 얘기를 반복하며 종희의 다리를 잡고 온몸을 비비꼬며 칭얼댔다.
“?”
종희로서는 처음보는 해운의 행동에 약간 당황했다. 서둘러 두 팔을 밑으로 뻗어 해운을 안아 올리자 해운이 입을 실쭉허니 내밀고 눈이 여덟 팔자를 그리고 있었다.
뭔가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있는 해운을 종희는 품안에 넣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오빠 보고 싶어. 비합 할아버지도, 건암 삼촌도.......”
“네, 지금 보러 가시면 되지요.”
“히이잉~~~~”
해운이 마른 눈물로 종희에게 칭얼거리자 뒤에서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아이가 해운을 위로했다.
“울지마~ 오빠랑 할아버지 보러가면 되지......”
종희 품 안에 해운이 고개를 뒤로 돌려 아이를 쳐다보았다.
두 아이가 눈이 마주치더니 갑자기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아무런 논리적 논의없이 감정의 교통만으로 이루어지는 순수한 웃음에 종희도 더 이상의 살의는 품지 못했다.
방 한 켠에 서있는 긴 사모에 손을 뻗자 아이 어미는 긴장했다.
종희는 웃음까지는 아니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아이 어미를 안심시켰다.
“우린 이만 가야할 곳이 있어서...... 비를 피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예........ 꼴이 이래서 손님께 변변히 대접도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어미가 틀에 박힌 인사를 하는 것과는 달리 아이는 해맑게 작별을 고했다.
“잘가~! 오빠랑 할아버지랑 삼촌이랑 만나~”
“응~ 너두 아빠랑 만나~”
해운과 아이가 서로를 보고 고사리같은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해운의 상대 아이가 아빠를 만나기를 기원하는 인사에 종희는 죄책감이 들었다.
“우리가 나가면 문을 잠그세요. 그리고 아무에게도 열어주지 마세요.”
“......”
아이어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희는 해운을 안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이미 사람이 없는 동네에는 어둠이 내려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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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암은 연폭소병들을 배치한 집들의 위치를 바탕으로 해운과 종희가 나온 지점에서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연결로를 여기저기 살피며 다녔다.
애당초 다 같이 나와 모두 같이 행동하면 좋았을 것을 왠일인지 해운이 오빠인 해명과 다른방향에서 가고 싶다고 부득불 우겨서 갈라진 것이었다.
아마도 장마당의 물건 구경이 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오빠와 같이 다니면 너무 빨리 이동을 해서 한양구경을 제대로 못 할까봐 그런 것이다.
덕분에 건암이 다리품을 팔아가며 찾는 수고를 해야 했지만......
곧 건암은 해운을 안은 종희와 만날 수 있었다. 한양 도성에서 거리에서 움직이는 산 사람은 그들 뿐이다보니 쉽게 눈에 띠었기 때문이다.
“여보시게~! 종희!”
건암이 크게 부르는 소리에 종희도 건암을 보았다.
종희의 품속에 해운도 건암을 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건암이 그 모습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해운이 낯을 가리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종희와 해명을 뺀 다른 둘, 즉 자신, 건암과 비합을 그리 살갑게 대하는 아이는 아니었는데 지금 손 흔드는 표정은 뭔가 달랐다.
“종희, 아기씨. 어디 계시다 이제 오십니까?”
“건암님, 공격은 시작 되었나요?”
“이미 한 고비가 넘어 갔네. 궐 대문을 박살내고 안으로 들어갔어.”
“제가 그만...... 그 자들을 만났습니다.”
건암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를 해주었다.
“해명 도련님도 그 사인참사검을 쓰는 항현이란 관리를 만나셨다는 군......”
“해명 도련님은 무사하십니까?”
종희의 눈이 동그래지며 해명의 안부를 급하게 물었다.
건암이 큰 동요없이 해명의 무사함을 말해 주었다.
“충돌은 없으셨다는군. 무사하시다네.”
“.........”
종희가 말없이 숨을 한 번 내쉬는 것으로 안심을 표현하자 해운이 건암에게 말했다.
“건암 아저씨, 오빠 화났어?”
“아니오. 다만 늦으셔서 걱정하십니다.”
“음.......”
뭔가 은은한 미소를 짓는 것이 자신을 걱정하는 오빠라는 말에 묘하게 기뻐하는 모습이 건암은 귀엽게 느껴졌다.
“일단 가시죠. 여기 노상에서 비를 맞으며 계시는 것은 해롭습니다.”
“네~ 헤헤헤......”
건암이 가기를 권하자 해운이 해실거리며 대답했고 종희도 말없이 따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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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빈아가씨 힘들면 바로 말하세요. 가까운 민가에서 조금이라도 쉬어 가면 됩니다.”
“아이~ 참~! 괜찮다니까요. 나으리.”
항현이 수빈에게 탈진의 후유증을 계속 걱정하자 수빈이 웃으며 짜증을 냈다. 그래도 싫지 않은 어투에 항현은 흐뭇하게 말 위의 수빈을 쳐다보았다.
수빈이 앞에 태우고 있던 아이들은 연장자인 남녀의 부드러운 연심의 기운에 킥킥거리며 웃었다.
잠시나마 부드러운 기운에 창경궁으로 향하는 7인은 여유있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비구름에 햇빛이 낮 동안 내내 땅을 비추지 않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름위의 해 마저 서산 너머로 사라지자 별도 달도 구름에 가려져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어둠이 깔렸다.
“동북방 귀문을 지키는 영수여-!
검에 깃들어 맑은 칼날의 예리함을 지키라-!
검을 달구어 뜨거운 칼날의 선명함을 지키라-!
피 주린 검이 울지 않도록 네가 포효하라-
검강합인령-!”
항현의 사인검이 환하게 빛나며 횃불처럼 길을 비추었다. 항현의 검광에 의지하여 창경궁을 향하는 일행을 건암과 종희가 보았다.
“저건......!”
“수빈언니다-!”
종희가 품안에 해운의 입을 손으로 가렸다. 그리고는 건암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어떻하죠?”
“...... 자네와 애기씨가 먼저 가시게. 나는 저들의 발을 묶어보도록 하지.”
“저들의 수가 많습니다. 혼자 가능하시겠습니까?”
건암이 미소를 지으며 호드기를 꺼내 보여주며 대답했다.
“일단 졸개들을 불러들이고 시작하면 되지 않겠나?”
건암은 호드기를 입에 물었다. 어떤 사람도 듣지 못하는 호드기의 소리가 주변의 귀갱시와 창귀호들을 불러 들였다. 어둠의 한가운데에서 항현들에게 위기가 엄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