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상전하듭시오~!”
상선(종2품의 내시부의 우두머리, 임금의 수라를 비롯한 사생활 일체의 책임을 진다.)의 우렁찬 호성에 전각안의 신하들이 일어나 임금 이유를 맞았다.
특히 현영휘는 한발 먼저 일어나 이유를 맞이한 후 상선의 귀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찌 오신 겝니까? 편찮으시다 들었는데......”
상선이 역시 현영휘의 귀에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열이 높으십니다. 밤새 앓으시다가 새벽에 좌부승지의 보고를 받으시더니 가만히 앉아 한참을 계시다가 조당에 나오겠다고 하시더이다.”
현영휘가 임금 이유를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워낙에 부스럼과 종기로 많이 상해 있는 얼굴이라 열에 상기되어 있는 얼굴을 눈치 챌 수가 없었다.
이유는 멍한 눈으로 조당 안의 신료들에게 지난 10여 년간 왕위에 있으며 몸에 밴 기계적 인사를 건넸다.
“새벽부터 노고가 많소이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임금의 의례적 치하에 신하들의 의례적 답례로 조당회의가 시작되었다.
모두 발언을 이유가 잡았다.
“지금 일어나는 이 일은 모두 나의 부덕의 소치라 내가 지난 날 벌이고 묻었다고 생각한 일들이 모두 땅 밑에서 일어나 내게 도로 돌아 왔소이다. 지금 이 나라는 나를 왕으로 모신 벌을 받고 있는 셈이라.......”
“그렇지 않사옵니다. 전하~!”
이유의 말에 신료들이 이구동성으로 반대는 했다.
그 아침에 벌어진 일에 별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임금이 자기를 비하할 이유는 없다고 다들 생각했다.
그 자리의 신하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예상이 안되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이유는 근래에 정신이 늘 몽롱했다.
나병이라는 것이 언제나 관절 부위들을 쉴 새 없이 아프게하고 몸 전체에 힘을 흐트리는 병이다보니 반복된 고통으로 정신력의 상당 부분을 소진 시켰고 더 이상 아픔을 참을 수 없을 때에는 술에 의지하였다.
당연히 날마다 정신은 한층 더 흐려져 갔다.
지금 회의 중인 조당까지 나온 이유의 모습도 뭔가 온전한 느낌이 아니었다.
“이 일은 나와 정난을 같이 세운 사람들이 앞서 나아가 일을 벌인 자들에게 용서를 빌겠네...... 죽인 우리가 용서를 비는 것이 이치에도 합당하고......”
“전하-! 무슨 소리십니까? 이 나라를 강건하게 하시기 위해 피치못할 용단을 내리심을 천하가 아옵니다. 부디 성정을 다시 찾으시오소서~!”
황창성이 펄쩍 뛰며 나왔다.
이미 나모가비로 귀신 요괴가 어떤 건지 겪어본 황창성은 그 앞에 나아간다는 이유의 말이 같이 자살하자는 소리로 밖에 들리 질 않았다.
현영휘도 조금 점잖게 거부의 의사를 밝혔다.
“전하~! 나라의 질서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같은 것이라야 하옵니다. 나라의 질서란 군왕의 의지에 따른 것이며 군왕의 의지가 약해질 때 나라는 누란의 위기에 처하는 것이옵니다. 지금 각 신료들이 그들의 최선을 다하여 이 난국을 해결 중에 있사오니 전하께오선 성심을 굳건히 하시오소서~!”
“영의정~!”
이유가 현영휘를 부르는 말이 묵직하고 둔중했다.
무거운 어투와 심상찮은 이야기의 방향에 조당의 대신들이 전원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이 나라의 속사정을 자네와 내가 가장 잘 알지 않나?”
“전하......”
“그 아이가 중광이의 아들이라면서......?”
“전하-!”
“전하-!”
신료들은 갑작스레 나온 낯선 고유명사에 모두 얼떨떨했다.
여지껏 보고한 상소에는 “지난 정난때 원한이 있는 자” “정권 초기의 난신들에 연관된 자” 등등, 상황의 보고는 상세했지만 상황을 만든 주모자들은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해명같은 연관자의 이름은 입으로만 전하고 문서화는 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임금 이유와 현영휘 황창성등이 과거를 노출시키지 않고 싶은 강력한 바람에 의해서였고 항현도 해명의 이름을 역적으로 남기고 싶지 않은 동정심에 그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
그런 묵계를 임금 이유가 직접 깨뜨렸다.
“중광이와 지솔이 향이 형을 지키자 도저히 방법이 없었잖은가? 열영이와 지란이를 시켜 지솔이에게 누명을 씌우고 모자란 중광이를 이용하여 향이 형을.......”
“전하-!”
좌의정 신숙주가 큰 소리로 이유의 말을 막아 세웠다.
그 자리에 신료들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임금 이유를 쳐다보았다.
향이 형이라니..... 이유의 입에서 나온 많고 많은 고유명사중 익숙한 단 하나의 이름, 전대의 임금인 문종대왕의 이름이었다.
“전하~! 심신이 미령해 보이시니 일단 내전으로 드셔서......”
“창성아-! 너는 어쩔 거야-!”
황창성이 보다 못해 직접 침전으로 들어가 있으라 권하는 데 대고 이유가 난데없이 직문을 던졌다.
“나랑 같이 그 앞에 나서서 죽자!”
“......네?......”
황창성이 얼굴이 하얘졌다.
황창성이 신음처럼 새어 나오는 답 한 마디 겨우 하고는 조용히 이유를 쳐다 만 보았다.
진심인지 장난인지 알 수가 없으니 계속 살펴보는 것이었다.
“영휘형~! 우리 같이 갑시다.”
현영휘가 이유보다 두 살 위이기는 했지만 대군 시절에서도 언제나 깍듯이 왕족 예의를 취했기 때문에 형이라고 불린 적은 처음 면을 튼 2~3일 뿐이었다.
그런 임금 이유가 현영휘를 형이라 부르며 같이 사과하자고, 나가서 같이 죽자고 조르고 있었다.
“전하~......”
임금에게 형이라는 너무 어마어마한 호칭으로 불린 현영휘가 이유의 눈치를 살피다가 일단 쉬기를 권하는 말을 던졌다.
“전하~ 무릇 국가란 정확하고 공정한 행정으로 그 가치를 평가받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모든 백성들은 국가가 자기를 편들어주고 자기를 옳다 말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지금 저 ...... 조정에 불만을 가지고 흉한 잡술로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행위에 [과거]에 [무슨 일]이 있다 하신들 고개를 숙이셔선 아니 되시옵니다.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시옵니다~!”
“허허허허허허허~~~~”
현영휘의 말을 들은 이유가 갑자기 너털웃음을 웃었다.
가쁜 숨결로 제법 오래 웃던 이유의 행태는 영낙없는 광인의 모습이었다.
신하들이 계속 웃고 있는 그들의 임금을 걱정스런 눈으로 쳐다보았다.
웃기만 하던 이유는 흐린 눈을 뜨고는 현영휘를 쳐다보았다
“그래..... 그래....... 죽을 때도 같이 가는 충성이 어디 있겠나.....? 살아서 누리지 못하는 데 무슨 충성이 있겠나......? 흐흐흐흐.......”
“전하-!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 영의정이라~ 그래, 만인지상의 자리에서 백세장수하고 싶은 마음 난들 왜 모르겠나? 영원토록 누리고 싶겠지. 허허허허......”
“전하~!”
현영휘와 황창성은 어쩔 줄을 몰랐다.
갑자기 조당회의에 나타나서 이게 뭐란 말인가?
전대의 문종대왕의 일까지 찔금 흘렸으니 신료들의 가슴마다 공연히 의혹 한 점을 심어 놓은 셈이었다.
“그래-! 죽을 때는 혼자 가야지~, 남 죽일 때는 같이 머리 맞대고 궁리하더라도 자기 죽을 때는 혼자 가야 하는 것이지, 허허허허......”
“이보시게, 상선! 전하를 뫼시게~! 어서~!”
좌의정 신숙주가 이유를 시중들어 왔던 상선에게 다시 모시고 나갈 것을 종용하자 상선이 허겁지겁 이유를 부축했다.
상선이 이끄는 대로 조당의 상석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다가 갑자기 안에 민망한 표정의 현영휘와 황창성에게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영휘형~! 창성아~! 난 혼자 가마~! 난 밤새도록 무릎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프고 팔꿈치가 쪼개지듯 고통스럽지만 너희는 부하고 귀한 영화! 많이 누려라~! 하하하하하~!”
그대로 상선의 부축을 받아 걸어 내전으로 돌아가면서도 계속 이유는 고함을 질렀다.
“나는 혼자 가마~! 얼굴 가득 진물을 질질 흘리며 나는 혼자 가마~! 열 손가락 열 발가락에 손 발톱이 다 빠져나가는 나는 혼자 가마....... 나는 혼자........”
임금 이유의 고함소리가 멀어지다 마침내 안 들리게 되자 좌부승지 박동파는 숨겨왔던 기밀이 너무 쉽게 누출된 것에 놀라 삼정승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아무도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현영휘와 신숙주는 임금에 대한 걱정과 해결 방법이 안 보이는 현재 상황에 잔뜩 찌푸린 얼굴이 되었고 우의정 황창성의 반응만이 조금 의외였는데 그 거친 사람이 안 어울리게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고 만 있었다.
“그 건강하고 당당하시던 분이...... 흐으으으읔~...... 늘 명석하시던 형님이~...... 흨흨흨~......”
임금을 겁도 없이 형이라 불러댔지만 신료들 누구도 우의정을 책망하지 않았다.
원칙주의자 김종순도 그 때 만큼은 황창성의 무례를 잠자코만 있었다.
현영휘가 뭐라 한 마디 하려는 것도 신숙주가 말없이 손을 잡아 말렸다.
신료들도 같은 날 나라를 성취하여 같이 나라를 말아 먹은 동료애를 알고 있다 보니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무덤 같이 침통해진 조당은 쉽게 활기를 회복하지 못했다.
밖에 해결해야 할 외침이 있음에도 말이다.
-------------------------------------
“쾅----!”
해명이 창고 문을 발로 차 열며 밖으로 나왔다.
머리에는 초가집의 짚더미에서 나온 지푸라기가 여기저기 꽂아져 있었고 먼지 투성이의 몸으로 아픔에 얼굴을 있는 데로 구기고 있었다.
“아이고~! 허리야~! 정말 심하시네요~! 수빈님~! 그리 사람을 던져 버리시다니~”
엄살을 부리며 밖으로 나온 해명의 눈에 마당에 정신을 잃고 누워있는 수빈과 그 곁에서 어떻게든 비라도 안 맞도록 안으로 옮기려고 용을 쓰는 아이들이 보였다.
해명이 다가가자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방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해명이 자신의 행색을 살피다 왼손에 아직 핏물이 뚝뚝 흐르는 철극이 쥐어져 있는 것을 알았다.
계집아이 하나가 수빈의 얼굴을 꼭 끌어안고 입술을 꽉 물고 있었다.
그 모습에 해명이 잠시 멈추기는 했지만 곧 다시 걸어 수빈과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가 꼭 다문 입술이 벌어지며 자지러지는 비명같은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아아앙~~~~~~!!!!”
하도 큰 울음소리에 해명이 다가가다 멈칫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앙~~~~!!! 이 언니, 죽일 꺼 예요? 아아아아아앙~~~~!!!”
“흐아아아아아아아앙~~~~~!!!!”
방안의 아이들도 덩달아 같이 울기 시작했다.
해명은 자신이 이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아이들의 곡소리에 해명이 도리어 압도되어 망연하게 수빈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이들에게 너무 무서운 모습만 보여준 것이 후회되었다.
‘뭐..... 어쩔 수 없지......’
후회로 입맛을 다시는 해명에게 아이는 계속 물어봤다.
“죽일 꺼 예요? 엉엉엉~”
“아니~ 저 마루 위로 옮기려고..... 이렇게 계속 비 맞으면 언니한테 안 좋아”
“흐으으으응...... 흐응.....”
아이가 수빈의 얼굴을 꼭 안고 물러나려 하지 않자 해명이 일단 철극을 허리 뒤에 차고 수빈의 등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했다.
“자~ 이 언니 들거야~ 얼굴 좀 놔줄래? 너도 마루로 올라가자. 너무 몸이 너무 젖었다.”
나긋나긋 말하자 아이가 그제야 안고 있던 수빈의 얼굴을 놔주었다.
해명은 남짝, 수빈을 안아 들어 마루 위에 옮겨 눕혔다.
그 모습을 보고 방안의 아이들도 훌쩍거리긴 했지만 크게 울지는 않았다.
“자~! 방 안에 너희들 그 방에 있는 이불, 요, 다 가지고 나와”
아이들이 쭈볏쭈볏 이불, 요 등을 질질 끌고 밖으로 나오자 해명은 얇은 요 하나로 수빈의 몸에서 최대한 물기를 닦아 빼낸 후, 나머지 이불을 수빈 위에 쌓듯이 덮어주었다.
‘젖은 옷을 벗겨야 하나? 그랬다간 깨어나면 정말 날 죽이겠지?’
해명이 아이들을 보자 아이들도 수빈을 옮기려 마당에서 씨름을 한 후라 다들 비에 푹 젖어 있었다.
“너희 다 옷 벗어!”
“네?”
“옷 다 벗으라고!”
“추운데요?”
마지막까지 수빈의 얼굴을 감싸고 있던 아이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해명이 싱긋 웃으며 아이들에게 높이를 낮추어 설명해주었다.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더 춥다. 너희 옷을 다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들어가면 여기 언니 옷도 다 벗겨 내게 줘......”
“......”
대 여섯 살 쯤 된 아이 하나가 해명의 말을 알아들었다. 작은 아이는 바로 옷을 활활 벗더니 이불 속으로 냉큼 들어갔다.
한 아이가 들어가더니 바로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옷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이불 속에서 부시럭대더니 곧 수빈의 옷이 한 겹씩 밖으로 나왔다.
해명이 졸지에 빨랫감을 왕창 떠안았다.
‘화로 같은 게 없나? 불을 피우면 딱 좋겠는데.......’
“이거 네 물건 아니냐?!”
뒤에서 난 의외의 소리에 해명이 깜짝 놀라 돌아 봤다.
뒤에는 말을 탄 항현이 아까 귀신 개들을 소환하느라 해명이 던졌던 철극을 들고 이미 마당에 들어와 있었다.
훈련 잘된 군마는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집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해명이 빨랫감을 껴안고서 항현을 바라보자 항현은 쥐고 있던 철극을 던져주었다.
“쨍겅-!”
해명이 빨래를 마루 한 켠에 내려놓고 항현을 바라보며 마당으로 내려와 자신의 철극을 주웠다.
항현은 해명이 철극을 줍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사인검을 뽑았다.
“스~렁~!”
해명이 허리 뒤에 철극도 왼손에 쥐며 양손에 철극을 동시에 쥐었다.
마상의 항현이 집 안의 마루에 이불을 잔뜩 덮은 아이들과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수빈을 확인했다.
“니 짓이냐?”
“......”
해명이 고까운 미소를 지으며 항현을 쏘아보았다.
항현이 그 눈빛에 조금도 지지 않고 해명을 마주 쏘아보며 질문을 다시 던졌다.
“니가 들고 있던 빨래더미, 저기 의식을 못 찾고 계신 수빈 아가씨의 옷, 니가 벗기고 니가 의식을 잃게 만든 거냐고?”
“후~ 내가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설명이나 변명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에요. 알아서 생각해 보시죠.”
해명이 입가에 비웃는 듯한 미소를 흘리며 항현을 계속 노려보자 항현이 해명을 잠자코 노려보다 말의 방향을 바꿨다.
“지금 바쁜 거 아닌가? 궐에 계신 주상전하를 노리는 큰 도둑인 줄 알았는데......”
“......?”
“조용히 가라! 지금은 보내주마......”
“수빈님 때문인가요? 걱정돼서요?”
“가기 싫으냐? 그럼 찬 비 오는 데 서로 더운 땀 좀 섞어 볼까?”
항현이 말머리를 돌려 사인검을 쥔 오른손이 해명에게 오도록 방향을 바뀠다.
해명이 뒤에 수빈을 잠깐 쳐다보고는 아깝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일단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습니다. 일단 여기서는 제가 물러나죠. 또 만나겠죠.......”
“물론 또 만나겠지......”
해명이 마당으로 내려와 내리는 빗속을 걸어 그 자리를 떠났다.
항현은 그 사라지는 뒷모습을 쳐다보며 천천히 자신의 사인검을 칼집 속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뛰어 내려와 마루로 뛰어 올라갔다.
-----------------------------------------
준모는 귀갱시들을 베고 또 베면서도 방향은 계속 뒤로 밀리기만 했다.
그만큼 귀갱시의 수가 상상을 초월했다.
준모는 싸우는 중 결국 전술을 수정하게 되었다,
‘일단 피하자! 내가 혼자 다 죽여야 하는 할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켜야 할 내 뒤가 있는 것도 아닌데 뭣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야! 일단 항현 형과 합류하자!’
“피에 젖어 한에 젖어
산마다 골마다 짐승뿐이네
맑은 하늘이 먹장구름불러
자신의 눈을 가리니
구름속 뇌룡의 번갯불이
더러운 악을 태워멸하노라
악멸뇌룡참-!”
불과 번개의 결합물이 골목길에 빽빽이 서 있던 귀갱시무리가 휩쓸고 지나가자 단숨에 잿더미의 길이 났다. 그러나 바로 다시 다음 귀갱시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하는 수 없이 준모는 방향을 바꾸어 어떻게든 항현, 광조와 헤어진 지점으로 돌아가기 위해 한양의 골목길로 뛰어 들어갔다.
귀갱시를 보일 때마다 베어 넘기고, 더러는 피하며 골목길을 이리저리로 다니며 길을 뚫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종희 언니, 종희 언니는 왕이 되면 뭐하고 싶어?”
“아기씨는 희한한 걸 물으시네요?”
종희가 뜬금없다는 듯, 안고 있는 해운의 눈을 보며 놀란 얼굴을 지어보였다.
해운이 바라보며 종희에게 계속 물어보았다
“종희! 아니, 아니, 종희언니! 종희언니는 왕이 되면 뭐 먹고 싶어?”
“종희언니! 종희언니는 왕이 되면 비단옷 입을 꺼야?”
“종희언니! 언니는 왕이 되면 어떤 남자하고 혼인할 거야?”
종희는 해운을 안고 이리저리 걷는 것은 전혀 무겁지도 힘들지도 않았다. 그러나 계속해서 끊임없이 던지는 해운의 질문은 정말 정신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었다.
해운의 질문을 그저 웃으며 몰라요 몰라요하고 얼버무리며 호드기를 이용하여 귀갱시들을 몰고 창경궁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쪽의 귀갱시들이 베어져 박살이 나더니 그 길에서 큰 대도를 든 남자가 뛰어 나왔다.
사진멸악도를 든 준모였다.
“정말~! 끝도 없구만...... 근데 여긴 대체 어디야? 내가 맞게 가고 있는 건가?”
“아기씨, 잠깐 내리세요!”
종희가 다급히 해운을 땅에 내려놨다.
해운이 비가 치지 않는 처마 밑으로 얼른 뛰어가 섰고 그 앞을 종희가 막아섰다.
준모가 황급히 이동하려다가 귀갱시들과 구별되는 깔끔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을 보았다.
비오는 아침에 베일이 내리진 전모를 입은 검은 옷의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해 보일 수가 없었다.
‘가만..... 귀갱시가 사방에 깔려있고 이렇게 큰 비까지 내리고 있는데 저 여자는 뭐지?’
준모가 가던 발길을 멈추고 베일을 쓴 여자에게 다가갔다.
멀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가보니 남자 축에도 작지 않은 자기 키에 맞먹는 큰 아가씨였다.
준모는 바로 알아챘다.
“그 덩치를 보니 알겠수. 해명과 같이 있던 그 아가씨군......”
“그 짐승 같은 임금지키러 궁궐에 가는 거면 빨리 가시죠. 저희에겐 상관 말고......”
준모가 종희에게 다가가며 그냥 가라는 충고에 응수했다.
“갈 때는 가는 거지만 우리는 수빈 누나를 잡혔으니 우리도 맞바꿀 그쪽 사람이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준모가 다가가자 종희가 갑자기 옷고름을 풀렀다.
준모는 갑작스레 들어난 종희의 하얀 앙가슴(두 젖 사이의 가슴)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뭐.... 뭐야..... 이런 식으로 빠져 나갈 셈인가? 우습지도 않군!”
종희는 치마 허리띠를 끌러 치마를 준모에게 넓게 펼쳐 던졌다.
준모가 자신의 시야를 치마 폭이 가린 순간 뒤에서 어떤 살기가 찌르며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치마를 손으로 쳐 걷어 내자 공중에서 뱀이 날아오는 것이 바로 보였다.
“잌-!”
“캉-! 캉-! 캉-! 캉-!”
준모가 사진도를 넓게 들어 가까스로 뿜어져 나오는 종희의 공격을 막았다.
뒤로 물러선 준모의 눈에 가죽으로 된 진홍 쾌자에 철장식의 허리띠를 맨 종희가 긴 창을 한 자루 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종희는 뒤에 있는 어린 아이의 머리에 쓰고 있던 베일 달린 뱀 무늬의 검은 전모를 씌워주며 아이를 달랬다.
“이걸 쓰고 계시면 비를 안 맞으실 거예요.”
자기 키 만한 전모를 쓴 아이가 위를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그런 해운에게 맞미소를 보내준 종희는 뒤로 돌아 준모와 맞서며 창을 날쌔게 수평으로 들며 준모의 명치를 향했다.
“이게 제 사각신령구예요. 사사비영모(四蛇秘影矛)라고 하지요.”
종희가 든 창은 한길(1길= 1.83m)도 넘어 보이는 창대에 창날은 꼬불꼬불한 뱀의 형상을 띤 사모(蛇矛)였다.
준모는 사진도를 허리 께로 낮춰 잡고 자신에게 향해진 창 끝을 주의 깊게 보았다.
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에서 마주 보고 있는 종희가 만만찮은 적인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