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합의 유도로 귀갱시들이 소병으로 계속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이 축시(새벽1시~3시)의 중간이니 지금 한양에 나서면 딱 좋을 때입니다.”
“예! 원래 계획대로 가도록 하지요.”
비합이 귀갱시들을 계속해서 세 장의 연폭소병에 밀어 넣었다.
꾸역꾸역 그 많은 귀갱시들이 거의 한 시진에 걸쳐 계속해서 들어갔다.
“제일 밑층의 창귀호들은 포기하고 남아있는 창귀호 서른 아홉 마리를 전부 투입하겠습니다.”
“예! 그것도 계획대로......”
수빈이 비합과 해명의 대화를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며 듣고 있었다.
듣고 있어도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눈물이 났다.
‘이 일을 어쩜 좋아, 저 많은 요괴들이 한양 도성의 안으로 들어간다니......’
그리고 다른 쪽에 막혀있는 계단을 보았다.
‘항현 나으리가 쫓아오실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놔야하는데......’
수빈의 시선이 계단과 귀갱시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을 이미 해명도 비합도 건암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수빈 혼자의 힘은 언제라도 제지가 가능하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기실 수빈도 그런 계산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섣불리 행동을 못하고 있었다.
“해명 도련님......”
귀갱시가 얼추 다 이동한 시점에 다른 사람 하나가 내려와 해명을 불렀다. 종희였다.
종희의 손에는 깨끗한, 하얀 옷 한 벌이 잘 개어져 올려져 있었다.
“도련님, 손님의 옷이 다 말랐습니다. 갈아입으시도록 하시죠.”
“종희 누나, 손님은 저 쪽에 있어요.”
종희가 수빈을 쳐다보자 수빈이 종희와 자기의 옷을 번갈아 봤다.
“여기서 갈아입으시겠어요? 수빈씨?”
“어머머....., 미쳤나봐, 언니~.....”
너무나 인간적인 단답이 나오자 반대쪽 남자들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다.
수빈은 자신의 옷을 안고 얼굴이 빨개진 종희의 손목을 잡아 끌어 위층으로 올라왔다.
수빈이 벗어 던진 치마를 종희는 넓게 펼쳐 들어주어 혹시 생길 수도 있는 불미스런 시선을 막아 주었다.
수빈은 옷을 갈아입으며 종희에게 물어보았다.
“종희 언니, 맞죠?”
수빈이 말을 시작하기 위해 이름을 확인하자 종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지금 해명이 귀갱시, 창귀호, 요괴들을 한양도성으로 투입하고 있어요.”
“......”
종희가 말없이 옷을 갈아입는 수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어요!”
“종희씨......”
저고리에 손을 꿰고 있는 수빈에게 종희가 말했다.
“전 어머니가 아라사(러시아를 일컬음) 여인이었어요.”
“?! 저...... 북방의.......”
“예, 오랑캐의 땅이죠.”
스스로를 비하하는 표현을 일부러 골라하는 종희에게 수빈은 평범하지 않은 기운을 느껴서 말을 듣기만 했다.
“제 어머니는 머리가 노란색이었요. 눈은 파랬고...... 저는 여진족 아버지의 피가 섞여서 약간 중간색이지요. 약간 붉으스름한 색이죠? 눈도 약간 흐리고......”
“......”
수빈이 살짝 슬픈 어조로 얘기하는 종희에게 쉽게 대꾸를 못했다.
“전 제가 머리가 붉으스름해서 남들에게 당한 저급한 모멸이나 희롱, 우리 엄마가 당한 차별......”
종희는 입가에 미소와 일치하지 않는 눈물을 반짝이며 어머니의 말을 이었다.
“제가 살던 산골에서는 사냥이 잘 안된다던가, 추위가 너무 심해진다던가, 호환이 난다던가, 하면 머리 노란 우리 어머니가 마을 사람들에게 끌려 나왔어요.”
“......액받이......”
종희의 말에 짚이는 것이 있는 수빈이 힘없이 단어를 뱉었다.
종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우리 어머니 살갗도 하옜어요. 웃저고리를 벗기고, 때에 따라서는 온몸을 알몸으로 만들어서 무당이 회초리질을 했죠. 운이 좋은 날은 빨갛게 회초리 자국만 났지만 재수 없는 날은 살이 터져 피가 나도록 맞았죠. 동네 무당에게.......”
“......언니......”
수빈이 옷을 다 입었지만 종희는 가리개로 쓴 치마를 내릴 줄 몰랐다.
“그 무당이 내게도 말했어요..... 이게 너희 팔자라고...... 머리 노랗고 눈 파란 너희 팔자라고...... 어릴 때부터 그 말을 들었고 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
“지금 우리가 귀갱시를 몰고 창귀호를 몰고 한양으로 들어가면,.......? 그래요? 죽는 사람 있겠죠. 그러나 그게 우리라는 운명, 우리라는 팔자를 만난 그들 몫인 거예요. 동정을 가질 이유가 없어요.”
“......언니.......”
해명처럼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지만 여인 특유의 매몰찬, 딱 끊어지는 말투에 수빈은 더 대꾸를 못했다.
수빈이 옷을 다 갈아입은 것이 눈에 들어온 종희가 치마를 재빠르게 개어 접어 작게 만들어 방안 구석에 던져 놨다.
“난 당신이 한양 도성의 이름 없는 개돼지보다 우리를 이해해 주길 원해요. 우리는 그 백성이란 개돼지들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는 지 잘 아는 사람들이에요......”
“........”
“우리랑 함께 해요. 수빈씨.”
함께하자는 말과 함께 싱긋 웃어 보이는 종희에게 수빈은 거꾸로 울 듯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수빈의 손목을 잡아 끌어 종희는 계단 밑 해명에게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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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문, 조선의 도성인 한양, 그 동쪽의 관문으로 인자함이 무궁하게 흥하라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었다.
당시, 정음이라는 독자 문자체계를 반포했음에도 중국 문자인 한문을 쓰던 시대라 현판에 한문으로 쓰인 흥인지문이라는 이름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는 간단히 새녘문, 동대문이라 불리고 있었다.
동대문 뒤, 청계천의 물로 농사지어 먹고 사는 마을, 답십리에 두 서너달 전 괴이한 손님들이 왔었다.
아직 스물도 안된 소년 하나를 중심으로 중이었던 듯한 노인하나, 바윗덩이에 발이 달린 것 같은 두꺼운 가슴팍의 장정이 하나, 키가 보통의 남자보다 하나는 더 큰 전모와 너울을 쓴 검은 옷의 여인 하나, 그리고 그 여인이 안고 있는 검푸른 옷을 입은 작은 여자아이.
이 일행은 연신 약관을 못넘은 소년에게 도련님이라 굽신거리며 동네를 둘러 보고 다녔다.
딱 한 눈에 무슨 관계인지 쉽게 짚이지 않는 일행이 여기저기를 보고 다니더니 빈 초가를 하나 사겠다고 거간을 끼워 집주인에 흥정을 넣었다.
제시가에 얼마를 더 보태어 손쉽게 집을 산 일행은 곧 공부할 사람이 올테니 잡인의 출입이 없도록 해 달라고 당부 하나를 하고는 휭하니 떠나버렸다.
가기 전에 방에 왠 그림 없는 하얀 병풍만 하나 세우고는 방문은 잠그고 바깥에는 부실한 싸리문에 대충 걸쇠만 걸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공부하는 사람이 그림 없는 하얀 병풍세우는 것이 특별한 일도 아니고 해서, 그러려니하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는 몇 달간 공부한다는 사람은 오지도 않은 채 집은 비어 있었다.
답십리사는 동네사람 맹손창이는 이제 곧 날 풀리면 농사지을 논을 살피고는 돼지고기 국밥 냄새에 회가 동하여 동네 주막에 들었다.
없는 주머니를 털어 탁주 일배한 것이 탈이 되어 주막집, 불도 안 넣은 행랑방에 자다가 일어났다.
이미 밤이 깊기는 했으나 아예 외박까지 했다가는 마나님의 불벼락을 감당할 길이 없어서 그 밤에 밤바람에 맞서며 집으로 귀가를 서둘렀다.
그리 급하게 귀가하던 길에 이 빈집을 보게 되었다.
덩그러니 비어있어 해 저물면 늘 으스스한 빈 집이 오늘은 어째 소란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가 있나? 공부한다는 사람이 왔나보니?’
“우지짘-!”
속으로 집주인인 왔나하고 생각하며 얕은 싸리담 너머로 집안을 쳐다보는 데 집의 안채에 걸어 잠근 창호살문이 와지끈 부서지며 사람들이 우르르 넘어지고 엎어지며 쏟아져 나왔다.
“어이쿠-! 저런~”
남의 집 담 너머로 안을 보는 실례를 저지르던 중이라 집 안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자 민망한 마음에 얼른 걸음을 재촉하여 갈 길을 잡았다.
갈 길을 가려는 데 뒤에서 사람들이 싸리문과 싸리담을 부수며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으지지직~!”
“으잉~? 자기 집을 저리 부수며 어쩌려고 저러나......?”
“으워어어어.......”
맹손창은 자신을 보고 뭐라 하는 것 같은데 얼핏 들으면 아파서 도와 달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이보오~ 무슨 일이 있소? 도와 드릴까?”
“으워어어어어.........”
튀어나온 사람이 엉금엉금, 비틀비틀 어째 걷는 꼴도 부실하고 말도 잘 못하는 것이 정상이 아닌 듯 보였다. 그러나 분명히 맹손창 자신을 향하여 걸어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여 뭔가 할 말이 있는가 싶어 맹손창도 가까이 다가갔다.
다음 순간!
“크아-!”
짐승이 짖는 소리를 내며 그 사람이 맹손창의 목줄 어름을 노려 달려들었다.
취한 몸이 밤바람에 얼어 있어 한층 더 둔했던 맹손창은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자신의 목줄기를 앞에 덤벼든 사람에게 내어 주었다.
“콰득-!”
“하이고오~! 사람 살려~! 이 사람이 날 물었다~!”
인시(새벽3시~5시), 사람들이 어지간해서는 일어 나지를 않아서 도둑들이 잘 노리는 시간이라는 인시 경의 밤하늘에 맹손창의 비명이 쩌르르 울려 퍼졌다.
“아이고~! 이 피 좀 봐~! 이런 미친 놈이 있는가~! 생 사람을 깨물어 피가 나게 하다니...... 아이고, 아야......”
동네에 하나 둘,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나와 보았다.
맹손창은 자신을 물어 뜯은 사람을 살펴보았다.
얼굴을 봐둬야 관아에 송사를 넣어 합의금이라도 뜯어낼 수 있지 않겠나? 그런데 그 얼굴이 이상했다.
달빛 어름에 대강 살핀 얼굴은 눈이 없이 동굴 같은 구멍만이 있었고 살갗은 시커멓게 변색이 되어 있었다.
“어...... 어...... 뭐야..... 이거......?”
있을 수 없는 그 무엇을 본 맹손창은 피가 흐르는 목덜미를 움켜쥐고 벌떡 일어났다.
어째 꼴이 심상치가 않았다.
일어나 뒤를 보니 빈집의 안방에서 이런 괴상하게 걷는 이상한 인물들이 계속해서 꾸역꾸역 걸어 나오고 있었다.
“어,..... 어....... 이게 다 뭐야.....?”
작은 초가집 안방에서 오륙십명쯤 되는 사람들이 나온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나 아직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동리에 삽시간에 백여 명의 이방인들이 들끓는 상황에 맹손창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런 맹손창에게 다시 방금 그 인물이 달려들었다.
“아앜-! 사람살려-! 아~!”
피가 튀어 오르고 비명이 난무하는 밤은 답십리에 사는 맹손창이란 이름도 남기지 못한 한 사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