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명이 내려가 제법 길게 안 올라오자 혁춘이 그 자리에 같이 남겨져 있던 비합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저 아래의 괴물이 대체 무어요?”
혁춘이 지극히 상황에 합당한 질문을 던지자 비합이 싱글거리며 자랑스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징옥이 누군지 아오?”
“......!”
혁춘이 잠깐 생각한 후에 살짝 놀라는 얼굴로 비합을 바라보자 비합은 더욱 야비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세종대왕 때부터 여진족의 침입에서 이 나라의 국경을 지켜낸 용장이시지. 허나 김종서 장군과 막역한 사이셔서 김종서 장군의 머리통을 철퇴로 터뜨리고 용상에 오른 이유(세조의 이름)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인물이었지. 아무리 만백성의 영웅이어도 말이야. 아니! 만백성의 영웅이니 더욱......!”
대답 않는 혁춘과 다른 이들에게 비합이 한 호흡 멈추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영웅이니 더욱 살려둘 수가 없지......!”
“여진족을 규합해 새 나라를 세우고 그 국가의 군대로 조선을 치려고 했다는 얘기가 있었는 데...... 역적이라고......”
혁춘이 자기가 아는 대로 슬쩍 추임을 하나 넣자, 비합은 필필 비웃으며 바로 반박했다.
“그게 말이 되나 여진족들은 자기들끼리도 나라를 못 만들어서 조선에도 깨지고 명국에도 깨지는 게 일인데...... 갑자기 조선의 장군하나만 바라보고 나라를 세워?”
“그럼......?”
수빈이 비합에게 짧게 묻자 비합이 비웃듯 말했다.
“치사했어~! 함경도 절제사인 이징옥 장군의 후임으로 박호문이란 자가 올라 와서는 인수인계하는 현장에서 부하들 2십여 명과 함께 이징옥 장군을 죽이려고 한 게야. 히히히..... 그게 되나? 겨우 2십여 명으로......”
“도망쳤군!”
비합이 눈을 사납게 뜨고는 화난 어조로 대꾸했다.
“도망이라니! 그 자리에서 박호문의 목을 베어 버리고 자신을 노리는 2십여 명을 모두 때려 죽여 버렸지. 그리고는 반란군이 되신 게야.”
비합이 분노와 비웃음이 교차하며 이징옥에 대해 풀어 놓기 시작했다.
“반란군이 서북면의 여러 고을이 호응했는데 이유(세조)는 비열했어. 이징옥 장군의 부하인 회령부사 정종을 돈으로 매수했지, 정종이 약을 탄 술을 이징옥 장군에게 난의 성공을 축원하며 바치자 이징옥 장군은 그것을 마셨지. 곧 몸에 마비가 오고 그 때 자신이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알고는 반격을 했지만.......”
“옆에서 본 사람처럼 얘기하시는 군?”
혁춘의 지적에 비합이 선선히 대답했다.
“당연하지. 옆에서 봤으니까?”
“!”
모두 놀라자 한 층 의기양양해진 비합이 뒷얘기를 해주었다.
“난 언문주 연구에서 나온 다음에 북방의 여진족의 주법들을 연구하기 위해 북으로 올라 갔었지, 그 곳에서 여진족들과 같이 생활하다가 김종서, 이징옥 장군들을 만났다네. 그들은 내 재주를 인정하고 나를 써주었지. 여진인들의 기이묘사에 조선군 대응조로 말이야.”
“군에 있었단 말이오?”
혁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합에게 묻자 비합이 웃으며 대꾸했다.
“의외인가?”
“......”
혁춘이 그 이상 대답없이 쳐다만 보자 비합이 곧 뒤를 더 얘기했다.
“회령부사 정종이 약이 든 술을 먹이고 그 부하들 2백이 덤벼들어 결국 5십여 정도가 남은 시점에서 이징옥도 죽었어. 피바다였지. 나는 그때 회령부의 서헌에 행랑채 창고에 숨어 있어서 화를 면했지......”
“2백여 명이 사람 하나에게 덤벼들어 5십이 남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준모가 혼잣말을 했지만 비합은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회령부사 정종과 호군 이행검이 징옥의 머리를 자르고 오체분시를 시켰을 때 난 그를 살리겠다고 결심했어.....”
“살리다니, 무슨 말이오?”
혁춘이 고함 비슷하게 큰소리를 쳤지만 비합은 아랑곳 않았다.
“말 그대로 살리려고 했다는 말이지. 징옥의 머리와 몸을 거두어 내가 아는 백두산의 한빙계곡(겨울에도 얼음이 어는 계곡, 큰 산의 북사면에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고 함)에 옮겨 놓았지. 썩지 않도록...... 이후 기연으로 해명님을 만나고 영주 피끝 마을에서 연봉우의 시신으로 실험을 해봤다.”
연봉우의 얘기가 나오자 수빈과 준모, 광조가 눈을 얇게 뜨며 비합을 째려보았다. 셋다 연봉우를 해치우며 고생 좀 한 까닭이다.
“다시 그 썩지 않은 시신을 한빙곡에서 거두어 한 땀, 한 땀, 꿰매어 붙이고 넋을 다시 불어넣어 생을 부여했다. 이 비합님이, 흐흐흐흐흐.......”
수빈은 마지막의 웃음까지 듣고는 참, 꼴 보기 싫게 웃는다고 생각하며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럼, 제어가 안 된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수빈의 질문에 비합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걸 모르겠어...... 뭔가 말도 안 통하고 다른 귀갱시들과는 틀린 점이 있어서......”
“가시죠! 귀갱시들을 물려 놨습니다!”
비합이 중얼거릴 때 해명과 건암이 올라오며 말했다.
그 때 비합도 입을 다물고는 그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혁춘과 수빈은 그런 비합을 못마땅한 눈빛이긴 했지만 증오에 들끓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도 시대의 상처를 간직한 한 인간이라는 점이 감정을 조금 누그러뜨리게 해주었다.
뭔가 무거운 분위기가 된 것에 해명은 의아한 눈빛을 지었지만 비합이 입을 다물고 있자 굳이 까닭을 묻지는 않았다.
사람 일곱이 입을 굳게 다물고 계단을 따라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바로 밑 3층과 4층에 귀갱시가 벽으로 모두 바짝 밀쳐져 있어서 인간으로 된 숲처럼 보였다.
수빈이 딱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무슨 업보로 죽어도 편히 누워 있지를 못하고 죽은 몸으로 저리 서성이게 하는 가? 산 사람의 일에 이미 죽어 안식에 들어야 할 사람들을 저리 이용해도 되는가......?’
“저놈들에게 눈이 있는 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수빈이 상념에 물들 때 해명이 수빈에게 주의를 주며 끼어들었다.
“......자꾸 눈 마주치지 마세요. 혹시라도 저것들이 덤벼들면 다시 진정시키는 게 귀찮거든요.”
“해명, 당신은 죄책감같은 것이 없나요?”
뜬금없는 질문에 해명은 눈이 동그래져서 수빈을 보았다.
“예?”
“저들...... 이미 죽은 저들을 저리 이용하는 것에 죄책감이 없냐고요? 당신의 욕구, 당신의 야망으로 저들은 시신조차 온전히 보존 못하고 저리 죽은 몸으로 사방을 헤집고 움직이고 다녀야 해요. 당신은 전혀 죄스럽지 않나요?”
해명이 멋쩍게 웃으며 선선히 대꾸했다.
“사후에, 저도 지옥에서 죄를 갚겠죠. 이유와 한방을 쓸지도 모르죠.”
“......”
“그러나 그건 죽은 다음 얘기고요. 현세에선 반드시 이유를 타도하고 내 마음대로 왕을 앉힌 후에 지난 시절의 보상이 넉넉히 될 만큼 영화를 누릴 거예요.”
“하아~.......”
수빈의 안타까움과 한심함이 뒤섞인 한숨을 아랑곳 않고 해명은 말을 맺었다.
“....... 그리고 죽은 다음에 죄를 셈하면 됩니다.”
“해명, 당신......”
“자~! 누님!”
해명이 자칫 지루한 논쟁에 빠져들 이야기를 그쯤에서 차단했다.
“저쪽을 자꾸 보시니까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불쌍하다. 가엾다. 쉬지 못하는 모습에 피곤해 보인다?”
“......”
해명이 피실피실 미소지으며 고개를 살짝 가로 젓고는 이야기했다.
“저쪽 보지 마시고 앞만 보고 저희를 따라 오세요.”
“......”
“지금은 항현님 구출을 우선 생각하자고요.”
“......”
수빈이 뭐라고 하려는 찰나, 해명은 더 듣지 않고 항현에 대해 이야기하자 수빈은 더는 딴 말을 하지 못하고 해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벽에 붙어 서서 우는 듯, 아픈 듯 울고 있는 귀갱시들은 공허하게 계단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지하 3층 4층에는 지하 1층, 2층의 귀갱시들이 몰아넣어져 있어서 움직이는 시체들로 붐볐지만 5층, 6층은 공간이 넉넉하고 여유 있었다. 하지만 5층에도 꽤 많은 귀갱시와 창귀호들이 철창에 가두어져 있었고 그들은 살아있는 해명들과 수빈들의 행렬에 강한 적의를 드러내 보였다.
“우워어어어......!”
“어서 가시죠. 마지막 7층까지 단숨에 가도록 하죠.”
해명이 아까같은 수빈이나 여타 항의 제기를 사전에 틀어막기 위해 행렬을 서둘러 인도했다.
수빈쪽 사람들은 명령투의 말에 인상을 좀 찡그렸지만 말없이 해명을 따라 내려갔다.
수빈도 얼굴을 무표정하게 굳히고 해명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해명은 아랑곳 않고 사람들을 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인도했다.
묘한 감정선이 교차하는 일행이 6층에서 7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쿵-!”
잠시 잠잠하던 진동이 윗 층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다시 시작되었다.
“나오고 싶어 합니다.”
“예~ 아주 격렬하게 나오고 싶어 하네요.”
건암이 말하자 해명이 대꾸해 주었다. 비합이 그런 둘에게 얘기했다.
“주문을 힘으로 부수려고 합니다. 이 밑의 괴물은...... 그리고 곧 부서질 수도 있겠습니다.”
해명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문을 읊조렸다.
“두텁고 단단한 태산이 걷는도다
귓가에 겁없고 당당한 호통친다
하늘을 보지 않고 땅의 그늘만 찾으니
대지의 어린 꽃을 빈틈없이 지키노라......”
주문을 마쳐 외손목의 사해벽강패에 주력이 모이자 뒤에 따라 온 사람들에게 말했다.
“지금 계단을 막은 문에 걸린 주문을 풀 겁니다. 주문을 풀면 단순한 돌판에 불과한 이 계단문은 단숨에 부서지고 밑층의 괴물이 튀어 나올 거예요.”
말을 듣자마자 혁춘은 화승총의 심지에 불을 붙였고 준모는 사진도를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혁춘이 심지를 화승총에 끼우며 수빈에게 다가가 귀에 대고 넌지시 얘기했다.
“아까 해명이란 놈과 두꺼운 놈 둘이 내려간 다음 꽤 오래 있다 올라왔어.....”
“......!”
수빈이 대꾸없이 혁춘의 눈을 바라보자 혁춘이 조용히 충고해주었다.
“뭔가 꾸미는 게 있어. 조심해......”
“......”
역시 말없이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열겠습니다.”
건암이 주먹에 사미벽천권을 차고서 주먹을 손바닥으로 쓸어보고 있었다. 광조도 발에 찬 사묘파암각의 앞코를 땅바닥에 콩콩 내리 찧으며 긴장을 풀고 있었다.
비합이 주먹을 쥔손을 뻗었다가 손을 쫙 펴며 기합을 질렀다.
“파(破)-------!”
계단을 막은 돌판의 영기가 사라졌다. 그 순간, 바로 커다란 직도가 돌을 가르며 위로 솟아 올랐다.
“콰-앙-----!” “와그르르르르르-------!”
“대해호강기---!”
흙먼지가 자욱하게 올랐다.
먼지 속에서 소주를 뒤집어 쓴 구렁이마냥 직대도가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해명이 주력이 집중된 왼 손목의 주먹 방패으로 계단을 모두 막으며 밑에서 올라오려던 이징옥을 아래로 밀어냈다.
작은 문짝만한 네모각진 직대도가 해명을 동강내기 위해 춤을 췄지만 해명은 사해패의 호강기로 이징옥의 칼을 막아내며 아래로 밀어 붙였다.
“이얍-!”
“크어어어어어어------!!!!!”
“크-깡-!” “챙---!” “크랑-----!”
해명의 기합, 이징옥의 괴성, 직대도가 호강기와 부딪혀서 생기는 파강성이 뒤 섞이며 6층과 7층을 잇는 계단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뒤에 서 있던 준모와 광조, 건암이 바로 해명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반대쪽에서 계단을 계속 칼로 베다 우두커니 서있는 이징옥을 항현이 벽 뒤에 숨어 바라보았다.
‘지친건가?’
가만히 서있는 이징옥의 다음 목표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숨어있는 벽 밖으로 함부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잠시 가만히 서 있는 괴물의 모습에 항현도 안견도 한 숨 놓을 수 있었다.
그러곤 잠시 후 갑자기 다시 계단을 막은 돌 판의 타작이 시작되었다. 항현이 벽 뒤에서 갑작스레 움직임을 개시한 이징옥을 다시 관찰했다.
‘뭘까? 아까와 다르게 무얼 느꼈길래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을까?’
“콰-앙-----!” “와그르르르르르-------!”
마침내 돌판이 부서지며 밑으로 돌 조각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런데 이징옥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되레 밀려 내려왔다.
‘응?’
“대해호강기-!”
항현은 흙먼지 속에 기합소리를 듣고 징옥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 해명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다른 이들, 준모와 광조, 건암이 이징옥을 공격하며 위층에서 계속 뛰어 내리는 것을 보았다. 항현이 눈에 보이는 광경에 당황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크워어어어어어------!”
이징옥을 포위하는 형태로 준모와 건암, 광조와 해명이 싸며 포진했다. 그 뒤에서 아직 상황을 이해 못하는 항현이 넋 놓고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