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이 서있는 마을 초입에서야 사냥꾼과 항현 일행이 같이 말머리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쇠산골입니다. 마을 뒤에 서있는 회색 돌산이 무쇠같이 보인다고 지어진 이름이지요. 마을의 중앙에 있는 관아에 시신을 보관중입니다. 벌써 사흘이 넘었으니 악취를 풍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서 가보시죠.”
“마을 이름은 알았으니 그대 이름도 좀 알려주시구려! 함자가 어찌 되시우!”
출발할 때부터 말을 트려던 혁춘이 겨우 사냥꾼에게 말을 붙였다. 사냥꾼이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랐지만 이내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흐릿하게 말을 던졌다.
“난 이 마을 사람도 아니우, 범을 쫓아 산을 탔는데 호환으로 죽은 시체만 찾아서 관아에 고하였을 뿐이오. 뭔가 동네 분위기도 묘하여 아예 도호부에 직접 얘기한 것뿐이오. 다시 헤어질 사람인데 이름을 알아 뭐하우? 아예 모르는 채 헤어집시다.”
스스로를 드러내고 싶어 하질 않는 것이 관원인 항현때문인 것 같았다.
“언행의 머리와 꼬리가 서로 통하질 않으니 하는 말이외다. 호환을 당했다면 시신만 맡기고 범을 계속 쫓으면 될 일이지 무엇 때문에 도호부에까지 고변하여 도성에 건이 올라오게 했냐는 말이오. 이 일이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안목이 있다는 얘기....즉, 묘술, 묘법에 능한 사람이 아니냐는 게지. 내 말은......”
“!”
입을 다문 사냥꾼의 눈동자가 눈꺼풀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 다녔다. 항현과 수빈도 놀란 눈으로 혁춘을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들은 아예 눈치를 못챘는가? 이 사람이 우리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항현이 입은 관복을 경계하는 것을?”
“아니 그게 아니라.......”
사냥꾼이 뭐라 덧말을 바르려는 것을 이번엔 혁춘이 끊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여기 이 관원도 자기 재주를 숨기고 벼슬하는 교활한 자이지, 결코 유가의 질서를 목숨걸고 지키는 군자는 아니네. 안심해도 된다는 얘기지!”
사냥꾼이 항현으로 시선을 던져 쳐다보았고 항현은 눈썹을 찌그리고선 혁춘에게 시선을 던져 쏘아보았다. 혁춘은 항연의 눈빛에 아랑곳없이 사냥꾼에게 이어 말했다.
“그러니 자네가 보신 걸 우리에게 말해 주시게. 그리고 도망가지 말고 우리를 도와주시게. 이 관원친구를 너무 경계치 말구......그리고, 이름도 좀 말해 주시겠나?”
혜수빈은 입가에 재미진 미소를 잔뜩 머금고는 셋에게 시선을 고루 분산시켰고, 항현은 혁춘의 얼굴에 구멍이 나도록 째려 보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냥꾼으로 옮겨갔으며, 혁춘은 시선이 사냥꾼에게서 꼼짝도 않고 그 입만 쳐다보았다.
“제 이름은 은검지라 합니다. 산에 살다보니 무당이나 스님들에게 기문둔갑의 묘술을 어깨너머로 본적이 있어 그 시신이 범상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대충은 알지만 정확히 꿰는 것이 없어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일단 도호부에 알린 것입니다.”
검지의 대답에 혁춘이 대꾸하기 전, 항현이 먼저 검지에게 부탁했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유학의 나라에서 이런 일에 정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니 저희를 좀 도와주십시오. 나라에서 괴력난신을 엄히 다루는 것은 사실이나 내 반드시 지켜드리고 사례도 받도록 해보겠습니다. 부디 내치지 마시구려.”
항현이 정중히 부탁하자 검지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건부로 승낙했다.
“내 보기에도 수고롭긴 할 것 같은 일이니 한 손 보태겠소. 허나 돌아가는 상황을 봐가며 영, 내 얻는 것이 맞아들질 않는다고 셈이 서면 그냥 떠나겠소. 갑자기 없어진다고 책망은 마시오. 관원인 그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만은 없으니........”
항현이 쓴 웃음으로 대꾸를 대신하자 검지는 확실히 말로 금을 그었다.
“낌새가 이상하다하고 생각되면 사라질 겁니다. 그리 아시오.”
딱 잘라 말하고는 앞장서 관아로 말을 몰아갔다. 세 사람도 그에 따라 말을 몰았다.
거의 해시가 다 되어간 때에 네 사람은 지역의 관아에 들어갈 수 있었다.
현령은 이미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당직을 맡은 형방과 병방이 나와 넷을 맞이했다.
형방은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으나 병방은 당직 근무병들을 직접 통솔하고 있었는지 정신 맑게 깨어있었다.
“일단 주무시고 내일 사또어른을 만나신 후 수사를 시작하시지요.”
졸린 형방이 취침을 권했으나 혁춘이 바로 거절했다.
“어차피 현령께선 주무신다니 따로 깨워야 할 이유는 없지만 시신만큼은 빨리 봐야 겠소이다. 빨리 보기위해 한양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니 수고 좀 해주시오.”
형방은 졸린 눈으로 옷차림을 살피더니 가죽옷에 엽구를 줄줄이 달고 있는 혁춘에게서 눈을 거두어 무시하더니 무관복을 입은 항현에게 재차 물었다.
“어찌 하시겠습니까? 하명하시면 침방을 봐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항현은 은근히 높은 어조로 형방을 톡 쏘아 붙였다.
“침방은 준비해 주시고 시신이 있는 방에 초를 준비하시오. 밤을 밝혀 온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우린 우리 일을 해야겠소. 이 일에 가장 해박하신 분은 방금 말씀하신 분이니 일을 물으려거든 저 문을 통하여, 또한 저 분이 하명하신다면 잠자코 따라 주시면 고맙겠소.”
은근히 높은 언성의 힐난조 말에 중앙관리라는 신분이 더해진 항현의 명은 졸던 형방은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아! 예! 지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야심한 때의 관아가 갑작스레 소란해졌다. 이윽고 형방이 나오더니 넷에게 검시의 준비가 되었다고 아뢰었는데 태도가 한층 공손했다.
그 모습에 혁춘이 항현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입 꼬리를 올리자 항현은 겸연쩍게 눈썹을 찡그려 대꾸를 대신했다.
넷은 관아의 후원에 마련된, 널을 이어 붙여 만든 간이 시신 안치장소로 가 보았다.
“뭐~ 따로 보지 않으셔도 사인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호환이죠.”
형방이 눈을 심드렁하니 뜨고는 앞, 뒷말을 상당히 띄어, 한 겹 더 덧붙이듯 이어 붙였다.
말 그대로 시신의 옆구리는 크게 구멍이 나 창자가 텅 빈 몸통으로 등뼈가 뚫어져 보였고 왼팔은 손목과 어깨만 남아 있고 팔 상하박이 없었다. 가슴을 비롯한 온몸에 발톱자국이 어지러히 종횡으로 그어져 있었는데 남아 있는 살갗이 잘 보이질 않았다.
“지금 문제가 된 부분은 바로...... 음!”
형방이 하던 말을 혁춘이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여기 이 남아 있는 살갗에......”
“언문주네요.......”
“......예?......뭐요?”
혁춘의 말에 수빈이 추임을 하였고 항현이 다시 되물었다.
“뭐라고요? 언......”
“전대의 세종대왕때에 정음이 반포된 것 아시죠?”
“아.......? 예 물론이죠.”
혜수빈이 항현에게 조곤조곤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설명에 항현만이 아니라 검지도 귀를 기울렸다.
“당시 백성들에게 배우기 쉽고 읽고 쓰기 쉬운 글이 생겨 좋아하는 사람들로 천하가 흥겨웠데요. 사람들은 집의 세간이나 사용하는 기구들에 부르던 이름을 직접 쓸 수 있게 되어 사람들이 모두 기뻐했답니다.”
“예, 저도 그리 들었지요.”
혁춘은 계속 시신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피고 있었고 항현은 수빈의 말에서 귀를 떼지 않았다.
“그런데 기예, 묘술의 문자는 기본적으로 중원에서 들어온 진서잖아요?”
“예......? 그렇죠. 한자들이죠.”
“그런 묘법들은 왜 뜻글자로만 만들어야 하는가? 소리문자로는 만들지 못하는가하고 의문을 가진 이들이 있었데요. 그들은 언문자로 재해석, 재조립, 재구축하여 다시 재구성하려는 사특한 자들이었답니다. 그러나 초기에 그들이 뭔가를 저지르기 전에 뜻 있는 사람들이 제지했지요.”
“제지.....라....... 그럼 그들을 다 없앴던 겁니까?”
시신을 검시하던 혁춘이 수빈과 항현의 대화에 거침없이 끼어들었다.
“다 없애고 끝난 일인 줄 알았지. 근데 요 근자에 다시 스물스물 나타나기 시작한 게야!”
“근자에...... 나타나요?”
“자네도 지금 주상전하가 어떻게 옥좌에 올랐는지 알고는 있지?”
“......저, 잠저 시절, 계유년의 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갑자기 시신을 보관한 임시 검시소안의 공기가 시체만큼이나 차가워졌다. 이어서 낮게 수군대는 소리가 어지러이 나더니 곧 의견이 모아졌다.
“옛! 그럼 살피시오소서...... 저흰 지금는 잠시 용무가 있어서 이만.......”
형방, 병방 그리고 포졸들이 어마 뜨거라하고 죄다 그 자리에서 우루루루, 빠져 나갔다.
“그렇지, 계유년 뿐인가, 병자년에 옥사나, 정축년의 순흥부의 변, 최종적으로는 무인년의 동하군의 죽음까지.....”
“어째 이러십니까? 그 과거지사가 이 기이한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혁춘의 말에 사실의 나열, 그 이상의 한과 격정이 섞여 나오자, 항현이 눈앞의 사건을 언급하며 다른 방향으로 뛰어 가려던 혁춘의 말을 되돌려 세웠다. 그리고 덧 말없이 빤히 쳐다보는 항현의 눈을 보자 혁춘도 자신의 지나침을 이해했다.
“그래 일단 다른 얘기 말고 지금 이 일을 해결해야겠지.......”
무거운 자조적인 웃음이 혁춘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더니 바로 시신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일단 호환이야, 사인에 다른 건 있을 수 가 없네. 문제는 어떻게 죽었냐가 아니라 왜 이런 식으로 죽었냐지.”
“몸의 그 문양들은 무엇입니까? 주의 깊게 살피시던 것 같던데요.”
“그래, 방금 얘기했다시피 언문주야. 다만 무슨 주문인지는 내가 아는 범위에선 없네.”
“자신에게 주술을 걸고 몸을 범의 먹이로 던졌다는 건 창귀호의 술법일 수 있어요.”
수빈의 내민 의견에 혁춘이 선선히 동의했다.
“그래, 언문주라 처음 보는 주문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범의 먹이로 던졌다면 다른 주술은 생각할 수 없지. 허나 중원에서도 실전되어 이미 사라진 주법을 언문으로 해동에 되살렸다는 걸 받아들이기가 힘들군.”
“뭐요? 그 창귀호라는 게?”
멋쩍음에 입을 꼭 다물고 있던 검지가 궁금함에 한마디 끼어 들어갔다.
“저도 창귀가 뭔지는 들은 바가 있습니다. 산짐승들의 화를 당한 사람의 원귀가 산의 어둡고 음습한 데 모여 귀신이 되는 것이죠. 근데, 창귀호의 술이란 것은 처음 듣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검지와 항현의 물음에 수빈이 굳은 표정으로 답을 해줬다.
“예, 말씀하신대로 창귀란 호환으로 죽은 사람의 원귀를 말해요. 산 중에 어둡고 습한 곳에 제법 존재합니다. 그런데 가끔 그 죽은 귀신이 자기를 잡아먹은 범에게 씌어 범을 조종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런 경우들을 모아서 고대의 변태들이 그런 경우를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만들었지.”
혁춘이 한 마디 끼어들자 수빈은 살짝 흘겨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예, 자신의 몸에 주술을 걸고 그대로 범에게 자신의 몸을 먹이로 주지요. 잡아 먹혀 죽지만 대신 자신을 먹은 범의 얼, 넋을 빼고 그 몸을 자신의 몸으로 취하는 것, 그게 창귀의 술이에요. 다만 중원에서도 오래 전에 실전되었고 끊긴 술법이라서 아예 조선 땅에서 언문으로 다시 만든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거죠.”
“언문으로 끊어진 악주(악한 주문)를 다시 만드는 자들이 있다는 겁니까?”
“......”
잠시 얘기가 끊어진 후에 혁춘이 항현에게 대꾸를 해주었다.
“내가 아까 얘기 했잖아? 지금 주상이 어찌 옥좌에 앉았는지 아냐고......한 맺힌 사람들이 하나 둘이겠나?”
“!”
이제야 상황을 대강이나마 이해한 항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한참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못했다.
곧, 검시를 마친 네 사람은 각각 준비된 침방으로 나뉘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