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창귀호전
1. 사인검
햇볕 따스함에 하늘에 올라 짓까불던 공기가 달빛 차가움에 어깨 움츠리고 원래 있던 땅땅이 내려앉았다.
산 사이, 바위 사이, 나무 사이로 바람이 스미듯 흘러드는 을씨년한 가을 날의 밤.
코 끝 시린 찬바람이 잔잔히, 끊이지 않고 부는 중에 사람들이 찾기 힘든, 찾지도 않는 깊은 산 속 단애(절벽)의 끝에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주변에는 초들을 세워 불을 환히 밝히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선과 문자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빽빽이 쓰여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고 눈은 충혈이 되어 흰자가 붉게 핏 빛으로 번쩍였다.
봉두난발의 사내는 쌀쌀한 가을밤에 어울리지 않게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더욱 괴이한 것은 그 몸에 그려진 여러 도형과 문자들이었다.
어지러히 몸에 쓰인 문자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의 이렁거림에 깡마른 사내의 몸 위를 기어다니는 길고 가느다란 실뱀 같았다.
글씨를 막 써 놓아서 괴상한 도형같이 보였지만 찬찬히 살피면 만들어진 지 기십년 정도 밖에 안되는 조선의 글, 전대의 위대한 왕이 만든 소리글, 훈민정음이었다.
훈민정음 문자는 정방형에 기하학 적으로 안정된 예쁜 글자였건만 사내의 몸에 쓰인 글자는 이리저리 균형이 틀어져 괴이한 느낌마저 주었다.
괴이함은 알몸 위에 글씨만이 아니었다.
“내부릴 놈아......., 내놓아라, 내놓아라....... 내부릴 놈아....... 내부릴 놈아........”
사내는 양 손을 모아 입 가까이 대고서 바로 옆에서 사람이 들어도 들리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계속 읊조렸다.
마치 울음소리처럼
“내놓아라, 내놓아라....... 내부릴 놈아....... 내부릴 놈아........ 내놓아라, 내놓아라.......”
갑자기 산봉우리에서 절벽으로 이어지는 수풀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잔잔한 가을바람에 흔들린다고 보기에는 그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다.
“크르르르르........”
수풀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깊은 그르렁거림또한 심상치가 않았다.
아니나다를까...... 범이었다.
“내부릴 놈아..... 내놓아라....... 네 집, 내게 내놓아라...... 내놓아라.........”
수풀 속에서 불 밝힌 등잔 같은 눈 두 개가 스르르 올라왔다. 그리고 이내, 머리 올라온 만큼의 반 정도를 다시 수그렸다.
사람 몸 두 길만한 범 한 마리가 벌거벗은 사내를 내쳐 덮칠 수 있도록 몸을 단단히 모은 것이었다.
사내의 충혈된 눈이 자신을 꿰듯이 응시하는 대호를 물끄러미 맞대 보기만 했다.
“흐흐흐흐흐........”
사내의 힘없이 흘러나온 나지막한 웃음을 얼굴 맞대있던 범도 아마 못 들었을 것이다.
설사 그 작은 소리를 범이 들었더라도 뭐가 다를 것은 없었을 것이다.
“크앙!”
매섭고 우렁찬 포효와 함께 웅크린 범이 날아 가듯, 사내를 덮쳤고 약간의 어수선함 후에 이내 단애는 조용해졌다.비명한번 없이 사내는 쓰러졌다.
쉽게 한 끼를 해결한 운 좋은 큰 범의 기분 좋은 갸릉거림이 간간히 들리긴 했지만 그 뿐이었다.
잔바람 끊이지 않는 가을 밤이 그렇게 깊어져 갔다.
한양.
조선 왕조의 수도.
가을 아침의 포시러운 햇살이 북한산을 면한 궁궐의 대문지방을 비추었다.
때를 맞춰 관원들이 등청하기 시작했다.
젊고 낮은 직급의 관원들이 선배 상관들의 등청 전에 업무 준비를 맞춰 놓기 위해 종종걸음으로 궐 안으로 들어갔다.
해가 궐문 빗장쯤 높이로 올랐을 때 중장년정도의 나이의 관원들이 등청하기 시작했다.
먼저 들어간 젊은 관리들의 선배들로, 준비가 끝난 관청에 실질적인 업무를 보는 나라의 등뼈들이었다.
그렇게 일군의 관리들이 또, 한바탕 몰려 들어간 후, 다시 대문은 조용해졌다.
얼마 후, 정오의 해가 높이 뜰 무렵 한 무관복의 사내가 주저하지 않는 또박또박한 걸음으로 대문으로 다가와 궐문의 위병들에게 방문의 이유를 변했다.
“승정원에 계신 박동파 좌부승지 영감의 부름을 받자와 찾았습니다. 충찬위의 부위 온항현이라 하시면 아실 것이오. 기별을 해주십시오.”
병졸이 수문장을 불러오자 무관은 재차 설명하였고 설명을 들은 수문장은 안으로 기별을 넣었다.
곧 별일을 하는 사인 하나가 달려 나와 사내를 궐 안의 한 전각으로 안내해 갔다.
낡고 비어있는 전각 앞에 한 관복의 사내가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고 있다가 항현이 다가가자 반갑게 맞아들였다.
“어서 오시게. 항현이, 오시는 길은 평안하시었는가?”
“염려하신 덕에 막힘없이 왔나이다. 어찌하여 저 같은 것을 불러 주시었는지 모를 일이오나 부리실 일이 있으시다면 하명만 하시옵소서.”
부름을 넣은 박동파는 연장의 문관답게 안부를 먼저 물었고, 나이어린 무관인 온항현은 바로 부른 용건을 말해 달라고 직접화법으로 물어 들어갔다.
“그래, 아버님께선 아직 정정하신가? 가내에 두루 무탈하고?”
“...... 예, 늘 염려해주시온지라 집은 언제나 평안하옵니다. 영감께서 별래 무양하시옵니까?”
“음...... 나야 한결같이 사는 사람아닌가, 그건 그렇고......”
박동파의 애두른 인사에 온항현은 용무로 부른 것이 아닌 안부 차 부른 것일 것 같아 더는 용무를 묻지 않고 인사만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자 불쑥 용무가 튀어나왔다.
“내, 자네를 부른 것은 자네 집안에 하나 여쭐 일이 있어서 일세.”
“하문하시오소서.”
박동파는 마른 침을 살짝 삼키고는 온항현에게 물어 보았다.
“지난 무인년에 병조참의로 계시던 부친께서 주상전하의 신임으로 사인참사검 한 자루를 하사 받은 것으로 알고 있네. 집안에서 그것을 아직 보존하고 계신가?”
“주상전하에게 직접 하사받은 보물이옵니다. 어찌 상하게 하오리까.”
“불사나 서원에 봉안을 했다거나, 기증을 하지 않고 가지고 있다는 얘기지?”
“물론이옵니다.”
“음...... 그래그래...... 됐어됐어......”
박동파는 다시 물음을 이어 갔다.
“자네는 기이묘술에 조예가 있다고 아네만, 지금도 그 기예를 잃지 않고 계신가?”
“......”
온항현이 함부로 답을 않고 박동파를 은근히 쏘아 보았다.
박동파가 눈빛의 뜻을 읽고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물었다.
“내 자네를 책하는 것도, 트집을 잡으려는 것도 아닐세. 조정의 큰 공무에 쓰고자 함이니 경계치 말고 얘기해 주시게.”
“......조정이 괴력난신을 금하는 지라 저도 바른 성현의 말씀에 따라 바른 무인으로 쓰이고자 심신을 갈고 닦았습니다. 다만......”
“........”
“.......어릴 때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부림, 내림과 다룸, 빌림의 몇몇 방법을 배워 아직 그것을 기억하고는 있사옵니다.”
“음...... 그래그래...... 됐어됐어......”
같은 말을 반복한 박동파가 온항현에게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자네 이 길로 집으로 가 여장을 꾸리고 사인참사검을 소지하고 다시 입궐하시게. 충찬위에는 내가 따로 기별을 해 놓겠네.”
“여장이라시면 멀리 가는 길이옵니까?”
“수원의 도호부로 갈 것이네. 속히 차비하여오시게.”
“수원도호부 ..... 옛! 알겠사옵니다.”
영문도 모른 채 집으로 달려간 온항현은 부리는 하인들에게 여행 짐을 꾸리도록 지시한 후, 아버지에게 사정을 말한 후 사인검을 내주기를 청했다.
아버지인 온철호는 사인검을 내어 주며 아들에게 충고하나를 건넸다.
“나라의 부름에 부족함 없이 쓰여야 하겠으나 이 검을 쓸 때는 부디 한 번 더 생각한 후 사용하거라. 그리고 어지간하면 너무 조정에 이용당하진 말거라......”
온항현은 아버지와 눈을 마주치고는 말의 속뜻을 알아차렸다.
“물론입니다. 남들이 우리 가문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중하겠습니다.”
어머니 강씨에게도 여행 인사를 드린 후에 바로 꾸린 여장과 사인검을 챙겨 궐로 다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