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이 진서의 몸에서 빠져나왔을 때, 진서는 행복감을 느끼며 불청객을 쫓아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손 등의 문양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후로 진서는 여러 시도를 했다. 다시 몸 속으로 돌아오게 하고, 꺼냈을 때와 안 꺼냈을 때의 마력의 차이. 꺼내는 방법과 꺼낸 후의 마력 응용방법. 판을 영영 떼어 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지 확인했다.
그 때 판을 본 므레이가 헐레벌떡 나간 후 엉클을 데려왔다. 엉클은 오자마자 판과 진서가 마력을 연구 하는 모습을 보고, 다시 한 번 무릎을 꿇었다.
"두 쌍의 뿔, 검은색이 섞인 진한 푸른색의 비늘, 매끈한 팔과 다리. 그리고 용의 기운…… 용님을 뵙습니다."
"뺙?"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 판에게 무릎을 꿇으니, 판은 고개를 갸우뚱 하며 진서를 쳐다 봤다. 진서는 판이 귀엽긴 해도, 이렇게 모실 정도인가 싶었다. 자신도 용사님이라 추앙하면서 슬쩍슬쩍 실망한 기색을 보이던데, 판에겐 므레이조차 무릎을 꿇었다.
어쨌든 진서는 판을 상대로 연구를 계속했다. 엉클과 므레이는 무릎을 꿇은 채로 그 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진서는 그런 모습이 부담스러워 연구에 집중할 수 없다고 일으키려 했지만, '용님 앞에서 추태를 부릴 수 없습니다.' 라며 계속 무릎을 꿇었다.
"판, 이 사람들 일으켜도 돼?"
"뺙뺙!"
진서가 판을 보며 물어 보니, 판은 생각도 할 것 없이 진서에게 대답했다. 알아 들을 순 없지만, 상관없었다.
"봐, 일어나도 된다잖아. 일어나."
"제가 어찌…"
"판이 일어나라 했는데도?"
"그… 그럼, 용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엉클은 자세 하나 하나가 고급스러웠다. 이런 허접해 보이는 마을에서 볼 수 있는 자세가 아니었다. 진서는 말을 잘 듣는 므레이와 엉클을 보며,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곧바로 진서는 판에게 말을 걸었다.
"판, 나의 말은 곧 너의 말이지?"
"뺙?"
판이 진서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고개를 갸우뚱 했다. 그러나 진서가 손을 뻗어 판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뺙!"
판은 그저 진서의 손길을 느끼며, 조금이라도 더 맛보려고 열심히 비비적댔다. 진서는 쉽게 올라가지 않았던 입꼬리가 스멀스멀 올라가며 엉클을 돌아봤다.
"이제 격식없이 지낸다. 실시!"
엉클과 므레이가 진서의 외침에 흠칫 놀랐다. 용님을 모시는 일족의 대표로써, 용님과 격식없이 지내라는 것은 무례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용을 품고 있는 진서의 말이다. 심지어 방금 용의 의사결정권을 진서와 공유했다. 엉클이 보는 앞에서.
"저희가 그럴 자격은 없…"
"그럼 나한테만이라도 해."
"그건 당연하…, 아니, 허락해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드리겠습니다."
진서가 엉클을 째릿 하고 쳐다 봤다. 당황한듯 표정을 짓고 있지만, 엉클은 엄연히 진서와 용을 분리해서 생각했다. 확실히 태도가 다르다는 것은 진서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런 오글거리는 연극에 태클을 걸만큼 참여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얼른 강해져서 여길 탈출 하고 싶었다.
어쨌든 엉클과 므레이를 뒤로 하고 판과 연구를 계속했다. 왜 문양이 사라지지 않은 건지, 판은 어떻게 존재 하는 지, 응용할 방법은 없는 지 등등 여러 실험을 하면서 진서는 좌절했다.
'떼어 낼 수 없다….'
무단침입도 모자라, 아예 터를 잡았다. 문득, 원래 세계로 돌아 가고 싶은 생각이 커졌다. 자신이 있던 세상에서, 이상한세계로 쫓아 보내 힘든일을 겪게 하고, 지쳐 쓰러지게 만들 계획이었나보다. 그러니 이런 이상한 일들이 진서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격렬하게 원래 세계로 돌아 가고 싶어졌다. 이런 곳으로 보내버린 세상에 복수 하기 위해, 기필코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강해져야했다. 무단침입 하고 터를 잡은 판도 자신의 힘으로 만들 것이다. 진서는 새로운 다짐을 하며 눈에 불을 켰다.
그 이후로, 판을 소환 하면서 진서의 일상이 조금 변화됐는데, 진서의 일상이 아닌 판과 진서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판은 진서의 몸속으로 돌아 가지 않았고 계속 해서 소환 된 상태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판 덕분에 마력이 폭주 하지 않았다.
흘러 넘치던 마력이 판의 형태를 유지한다고 소모되면서, 적당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로인해 진서도 안정적으로 마력을 다루게 되었고 기존에 있던 헤르파멘의 자연마법이 빛을 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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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 물어 뜯어!"
"뺙!!"
멘티스의 동굴에서 판과 진서가 사냥을 나섰다. 처음엔 꼬물거리는 판이 제대로 도움이나 될 까 싶었으나, 새끼 용이라도 용이었다. 튼튼한 비늘은 멘티스의 앞발로 뚫을 수 없었고 넘치는 진서의 마력이 판을 조금 강화시켰다.
이런저런 작용으로 인해 판은 멘티스를 물어 뜯었는데, 아직은 실전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지 우직하게 돌격했다. 그런 진서와 판의 모습이, 마치 어릴 적 즐겨 보던 만화와 비슷했다. 어쨌든 판이 멘티스를 교란시키면 진서가 돌격했다.
헤르파멘의 마법은 정말 놀라웠다. 마력을 변환시켜 자신의 원하는 자연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새롭게 자연을 생성하거나, 주변 자연을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역시 후자가 좀 더 많은 자연을 움직일 수 있었는데, 진서가 있는 곳은 사방이 벽이고 땅이었다.
"으뢉챠!!"
진서가 이상한 기합을 내며 오른 팔을 뻗으니, 멘티스가 있던 땅이 꿈틀대며 멘티스를 포박했다. 마법사로써 멋은 없었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헤르파멘의 스킬 효과로 땅은 마력이 더해져 더 단단해졌다. 발악하던 멘티스는 마침내 움직임이 멎었다.
"너무 쉽네, 마력은 틈틈히 연습하고 몸을 더 움직여야겠어."
"뺙뺙!!"
진서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니 판이 무언가를 입에 물고선 진서에게 다가왔다.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거리고 신기한 기운을 내뿜는 돌멩이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가물가물하던 기억을 떠올리니, 초록 빛이 연관되어 떠오른 홉고블린이 생각났다. 빨갛게 물든 돌멩이, 홉고블린을 잡아 드랍 된 마나석. 그리고 목걸이도 있었다. 진서가 곰곰히 생각하다, 문득 그 이후로 아이템을 확인 한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템도 확인 못했네. 아이템창!"
진서 앞으로 창 하나가 띄워졌다. 못 보던 아이템들이 많았는데, 헤르파멘의 작업실에서 허겁지겁 아이템들을 집어 넣은 것이 기억났다.
< 엘릭서 >
잘려진 신체도 다시 회복시킬만한 생명의 힘이 듬뿍 담긴 액체이다. 신의 피라 불리우며 생명체의 회복력을 극대화시킨다. 죽기 직전의 상태도 다시 살릴 수 있는 포션.
< 땅의 고렘 소환서 >
즉시 땅의 고렘들을 소환한다. 땅의 고렘 한 마리와 땅의 고렘 주니어 열 마리를 소환한다. 지형지물의 영향을 받으며 땅의 기운이 풍부 한 곳은 더 많은 고렘을 소환할 수 있다.
< 불의 정령석 >
불의 정령왕 아그니의 힘이 봉인 되어 있는 정령석. 발동시키면 일대의 공간에 불의 정령들 중 상위정령들이 찾아와 마음껏 날뛴다. 일정 확률로 아그니가 소환된다.
< 엘 솜의 로브 >
오래 된 엘프 고목에서만 살아가는, 누에 몬스터 엘이 뿜어 내는 실로 만든 로브. 오래된 친우를 위해 실력있는 엘프 제봉사가 직접 만든 로브이다.
1. 내구도가 닳지 않는다.
2. 스텟 [마력내성]이, 스텟 [마력]에 반비례 하여 증가한다.
착용 제한, 마력 [85이상]
< 불라티오의 상자 >
던전의 관리자를 잡았을 때 보상으로 주는 상자. 풍부한 마력을 품고 있다. 일정한 확률로 마법 무구가 소환된다.
"..."
진서가 아이템 창을 껏다 켰다. 그러나 아이템창은 변동이 없이 그대로 아이템을 표시해줬다. 진서는 눈을 비비고 다시 깜빡이며 아이템창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이템들은 어디 가지 않고 진서의 아이템창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대박이다."
하나 같이 어마어마한 아이템들이 진서의 아이템창에 들어 있었다. 쟁쟁한 아이템들 말고도 여러 기본적인 아이템들도 드문드문 있었는데, 사기적인 성능을 자랑 하는 아이템들 때문에 눈에 들어 오지 않았다.
의심스러운 진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아이템창을 만지작거리며, 허상이 아닌지 확인을 마치고 소리쳤다.
"심봤다!!!"
"뺙!!!"
항상 무표정이었던 진서의, 확실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보고 판도 같이 기뻐했다. 그러나 너무 소리쳐서 그런지, 주변 멘티스들의 이목을 끌었다. 몇 마리의 멘티스들이 다가오는데도 진서는 아랑곳 하지 않고 기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너희들도 축하 해주는구나!"
"뺙뺙!!"
취에엑!!
여러마리의 멘티스들이 앞발을 휘둘러도 진서는 입꼬리가 내려가지 않았다. 난잡한 상황에도 멘티스들의 앞발을 요리조리 피하고, 등에 멘 오쓰를 장비 하여 몰려온 멘티스들을 베어 넘겼다.
마력을 응용하며 얻은 기술이 하나 있다면, 신체를 강화할 수 있는 것이다. 멘티스의 공격을 허둥지둥 막던 진서가, 이 기술로 인해 보다 여유롭게 공격을 읽고 피하며 검을 휘둘렀다.
마력을 다루지 않았을 때도 멘티스와 막상막하였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했다. 어쨌든 멘티스들의 고통 소리와, 판의 기합소리, 진서가 기뻐 외치는 횡설수설 하는 소리가 섞여 동굴은 시끌벅적했다.
요란스러운 소리는 동굴에 울려 퍼졌고, 동굴을 어슬렁 거리던 무언가가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진서 주변으로 여기저기 잘려나간 멘티스들이 가루로 변하고, 판은 무언가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혼자서 맛있는 걸 먹는다면 진서가 두고 볼 수 없었다. 판이 먹고 있는 게 뭔지 슬쩍 확인하니, 멘티스들에게 나온 마나석이었다. 아까 물고 온 에메랄드 빛의 돌멩이도 사라진 걸 보니, 아마 판이 먹은 것 같다.
진서가 판이 먹던걸 빤히 보고 있자, 으적으적씹던 판이 남은 마나석 한 개를 물어 진서에게 건넸다. 진서는 돌멩이라는 걸 알았지만, 너무 맛있게 먹는 판을 보고, 자신도 한 번 깨물어봤다.
까득!
그러나 역시 돌멩이었고 맛도 없었다. 괜히 시도했다. 마나석을 판에게 던지니, 판이 요령좋게 받아 먹었다. 진서는 주변을 둘러 보고 마법을 이용해 의자를 만들어 앉았다. 마법의 편리함을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이세계와 통하는 포탈이 열린다는 리비아 대륙. 그 곳을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거인의 땅. 신의 힘과 맞먹는 거인들이 사는, 거인의 땅을 자신이 통과할 수 있을까? 진서는 끊임없이 강해져야 했다. 거인은 우습게 볼 정도로 강해져야 했다.
너무 터무니 없었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목숨을 뺏기지 않은 전적이 있다. 신도 진서를 죽이지 못해 다른 세계로 쫓아 내지 않았던가!
진서는 강해지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거인은 커녕 신조차 진서의 발밑에 올 것이다. 그런 흐뭇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동굴을 꽉 채우는 포효가 진서의 고막을 때렸다.
취에에에에엑!!!!!
멘티스들은 호전적이라 자신의 힘을 과시 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만나는 멘티스들 마다 싸움을 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패자와 승자가 남기 마련인데, 패자는 죽음을 맞이 하거나 죽음과 다름 없는 앞발이 잘려 낙오된다.
그러나 승자는 또 다른 멘티스와 싸움을 계속한다. 그렇게 오랜 싸움 끝에 살아남은 승자는, 많은 실전으로 쌓은 기술로 무장한 채 멘티스의 정점에 서게 된다.
< 멘티스 킹 >
멘티스가 오랫동안 마나를 머금고 살아오며 진화한 형태, 호전적인 성향이 더 강해졌으며, 예리한 앞발은 더 날카로워졌다.
마물등급 : B+
멘티스 킹이 진서에게 다가 오고 있었다. 흔한 멘티스랑 다르게, 초록색 껍질이 아닌 빨간 껍질이고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크기도 좀 더 큰 것 같은데, 의자에 앉아있던 진서가 멘티스 킹을 지긋이 쳐다봤다.
"알현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