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을 따라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체력을 회복 하고 싶었지만, 몸은 강제로 움직였다. 강해지고 싶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조금 기다리고 있자, 엉클이 므레이를 데려왔다.
여전히 붉은 머리카락의 짧은 단발. 머리카락과 색이 똑같은 눈동자는 붉게 물들어 진서를 경계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인영이 생각났다. 어두운 밤에 매혹적인 루비 같은 눈. 인영은 지금 살아있을까. 빨리 강해져서 여길 탈출 하고 인영의 소식을 들어야했다.
엉클이 므레이를 진서 앞에 앉히고 말을 꺼냈다.
"헐헐헐, 지금부턴 므레이와 수련을 하시면 됩니다."
"이런 쪼그만 애랑?"
"헐헐헐, 용사님은 상대의 강함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엉클은 웃으며 자리를 떠났다. 망할 할아범, 강해지고 나면 제일 먼저 쓰러뜨려줄테다. 그런데, 므레이는 가만히 앉아 진서를 쳐다볼 뿐이었다. 앳된 이목구비는 그렇다 쳐도, 다른 용인족에 비해 가녀린 육체는 진서가 봐도 어린애일 뿐이다. 이런 애와 무슨 수련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진서의 생각을 읽었는 지, 므레이는 손을 뻗고 마력의 구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의 일렁임이 스멀스멀 손 끝으로 둥글게 모였다. 한 겹 한 겹 쌓이면서 푸른 빛의 일렁임은 더욱 세차게 움직이며 크기를 키웠다. 므레이는 진서의 얼굴만한 크기에서 멈추곤, 작은 새가 지저귀듯 청아한 목소리로 퉁명하게 말했다.
"따라해."
홉고블린이 사용했던 화염구, 헤르파멘 일지에서 봤던 영상. 마력에 대해 보긴 봤지만, 이걸 다룬다는 생각은 안해봤다. 엉클은 마력을 다루게 할 심산인가보다.
"못할 줄 알고?"
진서가 호기롭게 뻗은 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자 헤르파멘 덕분에 스킬은 이미 습득했다. 므레이의 우쭐거리는 눈빛을 꺾어주마.
손 끝으로 집중을 하여 힘을 모았다. 몸 안에 흐르는 마력을 조금씩 모아 손 끝으로 방출한다. 그런 느낌으로 집중하고 힘을 주었다.
그러자 폭팔적인 마력이 손 끝에서 쿠콰카캉하면서 모아지……지 않았다. 그저 부들거리는 손 뿐이었다.
"흥."
부들거리던 손에 집중하고 있는데, 므레이의 비웃음이 진서의 달팽이관을 때렸다. 이 마을은 용사라고 다 모시는 거 아닌가? 아니, 연극에 빠질 뻔했다. 이런게 더 정상이다. 처음 보는 사람은 경계 하고 의심해야 하는 것이 맞다. 그래도, 비웃다니 용서못한다.
진서가 다시 한 번 천천히 집중 하고 손 끝에 힘을 주었다. 단전에서 머무르던 꿈틀대는 마력은 스멀스멀 진서의 몸을 타고 움직였다.
'느껴진다.'
헤르파멘의 일지를 본 이후부터 이미 마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순간 자기 멋대로 꿈틀대니 그냥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진서가 집중하는 대로 조금씩 움직여줬다. 그렇게 살살 어루만져주며 손끝으로 향하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흐트러지더니 진서의 몸 속에 새끼용이 소리쳤다.
'뺙뺙!!'
'넌 또 왜 갑자기.'
'뺙!! 뺙뺚!!'
새끼 용이 무언가 기쁜듯이 소리치니 집중하던 마력이 흐지부지 되며 다시 자기 멋대로 날뛰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새끼 용이 집중을 다 망쳤다.
"흫."
멋대로 들어온 새끼 용도 짜증났는데, 진서의 귓가에 므레이의 비웃음이 또 맴돌았다. 진서는 눈을 부릅뜨고 므레이를 노려봤다.
므레이는 진서의 눈빛에 지지 않고, 익살맞게 혀를 빼꼼 내밀었다. 진서는 어른이었다. 화가 난다고 욱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최대한 정중하게 행동했다.
"에베베베베베베"
므레이보다 혀를 더 쭉 내밀고 흔들어재꼈다. 진서는 참 어른스럽게 행동했다. 므레이는 당황한 나머지 손에 모아뒀던 마력구체를 진서에게 집어던졌다.
"에베켘케렠 쿨럭!"
흔들어재끼던 진서가 므레이가 던진 마력구체에 정통으로 맞고 기절했다. 한 방이었다.
기절한 진서가 정신을 차렸을 땐 엉클이 곁에 있었다.
"헐헐헐, 어떻게 되신 거죠?"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엉클은 진서에게 물어봤지만 대답 하지 않았다. 여자애를 놀리다가 맞아서 기절했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았다.
"헐헐헐,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시간도 됬으니 또 가보실까요?"
분명 므레이와 마주 앉아있었을 땐 어두웠는데, 지금은 밝다. 꽤 오래 기절해 있었나 보다. 진서는 사실을 더 말하기 힘들어졌다.
'두고봐, 꼭 복수해줄테다.'
엉클이 데려간 곳은 어제와 같이 멘티스 동굴이었다. 멘티스들은 여전히 살벌하게 싸워댔고, 진서는 싸움에 져서 낙오 된 멘티스들을 잡았다. 앞발이 모두 없어도 진서와 호각으로 싸우는 멘티스도 있었고, 앞발이 하나 남아 있어도 진서에게 압도당하는 멘티스도 있었다.
죽을 위기도 몇 번 넘기면서 맹세의 검 오쓰를 손에 익혔다. 장검은 확실히 진서와 상성이 잘 맞았다. 거리를 벌리면서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얍삽한 검술은 진서의 특허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동굴에서 지내다보면 엉클이 찾아온다. 사람 좋은 얼굴로 죽었나 살았나 확인하러 오는 것이다. 망할 할아범.
동굴이 어둑어둑해지면, 엉클의 집에서 므레이와 마력 수업을 한다. 어제 맞아본 마력구체는 확실히 죽을뻔했다. 만약 조금 더 컸더라면 진서는 기절이 아니라, 어린애를 놀리다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리라.
그런 상상을 하니, 확실히 엉클의 말이 생각났다. '상대의 강함을 알아야 합니다.'라고.
어쨌든 므레이는 진서 앞에 앉았고 조심스럽게 진서를 쳐다 보았다. 빤히 쳐다 보고 있는 므레이를 보며 진서가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뭘봐, 괜찮으니까 빨리 시작해."
"…"
므레이는 짜증내며 귀여운 입술을 삐죽하고 내밀었다. 그러나 짜증내는 얼굴과는 다르게 내뻗은 손은 조심스럽게 마나를 모았다. 혹시나 또 던져버릴까봐 어제보단 조금 작은 사이즈였다.
진서도 기합을 넣으며 손을 뻗고 눈을 감았다.
이번엔, 므레이가 보여준 마력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므레이의 신체에서 조금씩 뿜어지는 마력이 손끝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따라했다.
'일단 마력을 뿜어야해.'
마력을 뿜어낼 원천이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서가 느끼기엔 날뛰는 마력부터 잠재우는게 우선이었다. 진서의 몸속에서 중구난방 돌아다니는 마력을 차분하게 만들려고 집중했다.
그러나 집중하려고 하면 움직이고, 집중하려고 하면 움직였다. 자신의 마력이지만 자신이 컨트롤 하지 못했다. 슬며시 눈을 떴을 땐, 므레이는 계속해서 퉁명스럽게 쳐다만 볼뿐 비웃진 않았다.
진서가 다시 눈을 감고 집중을 계속했다. 진서가 마력의 움직임을 쫓아가면 마력은 진서를 인지하고 도망갔다. 원래 마력이 이렇게 움직이는지 모르겠지만, 애초에 마력이란게 생소한 진서였으니, 몸 안에 있는 마력을 바깥으로 꺼내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래도 진서는 포기 하지 않았다. 몸 안의 마력을 붙잡을 때까지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기만 하는데도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므레이는 심심한지 진서를 뒤로한 채 자신이 만든 마력구체를 던지며 놀았다.
쿵쿵대던 므레이가 방해됐지만, 애써 집중했다. 그러나 집중에 방해가 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는데, 바로 새끼 용이었다. 마력이 잡힐 듯 하면 새끼 용이 소리쳐서 집중을 흩뜨려놨다. 므레이랑 새끼 용을 자신의 앞에 앉혀 놓고 삼시 세끼 밥 대신 욕으로 먹여 주고 싶었지만…
므레이는 진서 보다 강했다. 새끼 용은 대체 어떻게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래서 진서는 참고 집중에 더 힘썼다. 어떻게든 더 강해진다면, 므레이와 새끼 용을 자신의 앞에 앉혀 놓을 방법이라도 알 수 있을테니까.
그럼에도 진서는 탈진이 될 때까지 결국 해내지 못했다. 진서는 그 날, 좀 씁쓸하게 밤을 맞이했다. 검은 좀 더 하면 손에 익힐 수 있겠는데, 마력은 도통 손에 잡히질 않았다. 진서는 미련을 뒤로 하고 잠을 청했다.
그 후로, 아침엔 멘티스 동굴에서 검을 익히고, 저녁엔 므레이와 마력 수련을 계속해서 반복했다. 날이 갈 수록 오쓰는 진서와 한 몸이 되어 멘티스를 베어 갈랐지만, 마력은 붙잡으려 할 수록 새끼 용의 방해가 심해졌다. 즐거운 듯이 소리지르는 새끼 용은 필시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진서는 좋은 징조로 보았다. 새끼 용은 마력을 붙잡을 것 같을 때만, 소리 친다. 진서가 집중해서 붙잡을 기회가 늘었으니, 자주 소리 치는 것이다. 언젠가 새끼 용이 방해 하지 않는 날이 오면, 마력을 손쉽게 붙잡을 수 있다.
아침엔 목숨을 담보로 자신을 수련 하고, 저녁엔 탈진할 때까지 집중한다. 그렇게 한동안 별다른 소득없이, 아슬아슬하게 하루를 보내며 시간만 흐르다 일이 터졌다.
어느 때와 같이, 므레이는 자신이 만든 마력구체를 던지거나 여러 모양으로 변형시키며 놀고, 진서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집중하며 마력을 쫓았다. 어지간하면 잡혀 줄 만도 한데, 마력은 더 신나게 날뛰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진서는 날뛰는 마력을 쫓아가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날뛰던 마력은 가만히 있던 진서를 비웃듯 신나게 뛰어 놀았다. 그러나 쫓아 오는 진서가 없으니 무언가 허전했다. 뛰놀던 마력이 가만히 있는 진서 곁으로 슬쩍 슬쩍 다가 왔다. 진서가 집중해서 만든 몸속에 또 다른 가상의 진서. 가상의 진서는 마력이 다가 와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평소엔 쫓아오다 탈진 하고 집중이 풀려 가상의 진서가 사라졌는데, 지금은 사라지지도 쫓아오지도 않았다. 가상의 진서는 마력이 코앞까지 다가왔는데 움직임이 없었다. 마력은 가상의 진서를 여기저기 찔러 보며 반응을 살폈다.
"잡았다."
'뺙!!'
가상의 진서를 찔러 보다 방심한 마력이 진서에게 제대로 잡혔다. 그 순간 머리가 지끈 거릴 정도로 새끼 용이 소리 질렀다. 이대로 집중이 풀려버리나 했는데, 진서의 집중력은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뺚!'
가상의 진서에게 잡힌 마력이 격하게 꿈틀대다, 가상의 진서가 붙잡고 놓아 주지 않으니 이윽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 순간 가상의 진서와 마력이 합쳐지며 새로운 마력이 진서의 몸안에 자리잡았다.
새로운 마력은 진서와 동화되어 단전에서부터 몸속 구석구석까지 순환하며, 이리저리 날뛰던 마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차분하게 마력을 뿜어냈다.
그 순간 진서는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 확신 하고, 손을 쭉 뻗었다. 갑자기 기운이 달라진 진서를, 므레이가 화들짝 놀라 바라 봤다. 진서는 마력을 손으로 이끌었다. 점점 손으로 모이던 마력은 진서의 손 끝을 통해 방출됐다.
"자…잠깐."
청아한 푸른 빛을 내던 므레이의 마력관 달리 진서의 마력은 맑고 투명한 하얀 빛의 마력이었다. 그러나 지금 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방출되던 마력은 수도꼭지가 터진 배수관처럼 콸콸 터져 나왔다. 점점 커져가는 마력의 구체는 진서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진서의 눈앞에 푸른 빛의 마력구체가 날아왔다.
퍼억!
'데…데자뷰인가…'
얼마전 므레이에게 맞은 기억이 새삼 떠오르며 진서는 풀썩 쓰러졌다. 진서가 쓰러지자 손끝에 모이던 마력구체는 흐지부지 사라지며 소멸됐다.
므레이가 쓰러진 진서를 보곤 작게 웅얼거렸다.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