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같이 맑은 비늘, 두 쌍의 뿔. 몸 보다 작은 날개지만, 수영하기에 적합한 팔과 다리. 기다란 꼬리는 힘차게 흔들거렸다. 육지 전투에는 적합하지 않다던 수룡(水龍)이 용들이 싸우던 곳으로 날아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용을 막아세우려 몇 안 남은 상급악마들이 나섰지만, 날아오던 수룡이 바다에서 헤엄치듯 하늘을 날아 요령좋게 피했다. 악마들은 자신들을 무시하고 지나간게 어이가 없는 듯이 수룡을 쳐다 봤다. 어짜피 수룡이 가는 방향은 용들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고 악마들도 휩쓸릴까 두려워 물러난 곳인데, 제 발로 날아가고 있으니 구경이나 했다.
하늘도 두려워 하는 천공용(天恐龍)은, 세뇌되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네 마리의 용과 막상막하였다. 감히 다가설 수 없는 무력에도 용들은 필사의 싸움을 계속했다. 바다도 아니고 여기에 수룡이 나서봐야 얼마나 도움이 될 지는 미지수였다.
네 마리의 용들은 다가오는 수룡을 확인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희망없는 싸움이 계속 되리라 생각했지만 수룡을 본 순간 분위기가 달라졌다.
수룡이 나타나기 전까진, 용들은 천공용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걸 계속 했다. 그러나 수룡의 등장으로 용들이 힘을 합쳐 동시에 공격했는데, 천공용도 바랬는지 자신도 큰 기술을 준비했다.
천공용은 용들을 깔보며 허공에 마력을 듬뿍 담은 구체를 소환했다. 눈깜빡할 사이에 거대해지는 구체는, 필히 마지막 공격이 될 듯했다. 구체를 보는 용들마저 두려워 떨었지만, 용맹하게 앞으로 나선 용이 있었는데, 천공용의 앞을 막아세운 수룡이었다.
수룡도 가히 아름다운 곡선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지만, 천공용 앞에선 외형마저 압도당했다. 거대한 천공용에 비해 조금 왜소해 보이는 수룡은 악마들의 비웃음을 사기에 충분했다. 천공용은 그런 수룡을 상대할 마음도 없는지 구체에 마력을 집중하기만 했다.
수룡은 자신을 무시 하는 천공용의 얼굴을 때리려 했으나 압도적인 무력은 접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바다였어도 이길리 만무한 수룡이, 육지의 싸움은 터무니 없었을텐데 계속해서 덤볐다. 천공용에게 가까이 가기도 전에 결계에 막혔으나, 천공용이 마력을 구체에 집중하며 약해진 틈을 타, 수룡은 한 곳만 집요하게 파고 비틀며 결계를 뚫었다.
뚫었다고 해서 무언갈 할 수 있던 수룡은 아니었지만, 천공용에게 무어라 외쳤다. 천공용은 수룡의 외침이 귀찮은 듯이 마력에 집중하던 손의 반대편을 수룡을 향해 휘둘렀다. 날카로운 천공용의 발톱은 수룡의 연약한 비늘을 뚫고 갈라 치명상을 입혔다. 안쓰럽기까지 한 수룡은 땅에 쳐박혀 피를 흘렸는데, 천공용은 그 때까지만 해도 수룡을 귀찮아했다. 수룡이 무어라 포효하기전까지.
수룡이 피를 흘리며 처절한 포효를 천공용에게 외쳤는데, 구체에 마력을 모으던 천공용이 덜컥거리며 몸을 비틀었다. 파괴적인 욕망이 가득한 눈빛이 하늘을 굽어 살피던 눈으로 돌아오고, 뒤틀렸던 마력회로가 원래대로 돌아오면서 정신을 차렸다. 천공용은 마력을 모은 구체를 그대로 악마들의 진영으로 던졌는데, 잔존해있던 상급악마들이 휩쓸려 소멸했다.
악마들이 몇 백년을 준비한 수가 허망하게 깨지는 순간 악신 디아블로가 강림했다. 회색의 단정한 머리, 앳된 이목구비, 붉은 빛의 눈. 어디서나 볼 수 있던 평상복. 차분한 느낌을 주는 소년 모습이지만 잠재되어 있는 끔찍함은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 냈다.
디아블로가 강림한 순간 소멸되었던 악마들이 다시 소환되고 쓰러졌던 악마들이 다시 태어났다. 디아블로는 정신을 차린 천공용이 오랜 세뇌의 효과로 어지러워할 때 빠르게 처리하려 했다. 모든 악마들은 불길하고 끔찍한 기운들을 모아서 천공용을 향해 발사했다.
발사된 끔찍한 기운은 밝게 빛나는 결계를 뚫고 들어가 천공용이 있던 일대에 적중했다. 천공용이 있던 중심 반경으로 대지가 끔찍한 기운으로 녹아 사라졌다.
어두운 기운은 대지에 물들었으나, 어두운 기운을 가로질러 하늘로 솟구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상처입은 수룡을 감싸는, 황금 빛으로 물든 천공용이었다.
번쩍거리는 황금 빛은 황혼의 빛과 닮아있었다. 천공용이 수룡을 감싸던 날개를 펼치자 수룡은 어디론가 날아갔는데, 용들과 함께 일대를 벗어났다.
용들을 쫓으려던 악마들은 천공용의 날개에 막혔다. 천공용은 수룡을 지키려 디아블로의 어두운 기운을 전부 맞았던 충격을 가실 수 없는 지, 포효하는 것도 지쳐보였다. 그런 모습을 보며 디아블로는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여기서 너만 죽으면 중간계도 못지킬텐데, 다른 용따위를 지킬 수 있을까?"
"기고만장하군. 너도 나에게 끝을 맛보리라."
천공용이 날개를 퍼덕이며 디아블로에게 향했다. 디아블로는 자신의 진영쪽으로 후퇴해 천공용을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철두철미한 디아블로는 지쳐있던 천공용을 확실하게 소멸하기 위해 좀 더 끌어드렸다. 자신의최측근들이 있는 곳으로.
천공용은 분노로 차오른 감정을 억누르며 디아블로를 쫓는 데 집중했다.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걸 알면서도.
디아블로는 충분히 유인했을 때 어두운 기운을 모았다. 그 순간 디아블로의 최측근 절반이 소환되어 끔찍한 기운들을 모으는데 보탰다. 그런 기운들이 모이니 하늘은 탁한구름들이 모여 태양을 가렸고, 어두운 허공에선 상대적으로 밝게 빛나는 황금의 천공용이 있었다.
"태양이 추락하면 세계는 내 것이 된다."
디아블로가 천공용을 보며 짧게 읊조리고 끔찍한 기운을 천공용에게 쏘아보냈다. 황금빛이 나는 천공용은 끔찍한 기운을 쳐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모든걸 내려 놓은 듯한. 다만 허공에서 정지한 천공용이 날개를 퍼덕여 빠른 속도로 디아블로를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끔찍한 기운이 먼저 천공용을 덮쳤는데, 기운이 닿는 찰나에 천공용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디아블로는 천공용이 무엇을 벌이는 건 지 몰랐다. 천공용의 모든 마력이 담겨있던 심장을 터트렸다. 그 순간 황금 빛의 천공용이 빛에 휩싸이며 폭팔적인 마력이 그의 몸을 통해 발산되었다. 둑이 터진 댐처럼 억눌려있던 마력이 폭팔하며 천공용 주변 일대를 휩쓸었다.
"후퇴한다!!"
디아블로는 천공용이 자폭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지고의 존재인 용은 신이 직접 만든 작품이다. 그 작품은 중간계를 위해 살아가며 마지막까지 힘써 지키는 것인데, 자폭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디아블로는 뒤늦게 악마들에게 외쳤지만, 폭팔하는 마력의 폭주에 휩쓸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디아블로와 소환되었던 절반의 최측근들이 휩쓸렸고, 거대한 폭팔의 여파는 판테온 대륙에도 미쳤는데, 대지가 갈라지고 하늘이 쪼개어졌다. 판테온 대륙은 세 등분이 나고, 소환되었던 최측근들과 상급악마들은 눈깜짝할 사이에 천공용과 함께 소멸되었다. 허공에 남아있던 것은 어둠을 방패삼아 천공용의 자폭을 막아낸 디아블로 뿐이었다.
그러나 천공용의 자폭을 막는데 모든 기운을 다 써버렸고 디아블로조차 상처입었다. 악마들은 소멸됐고 다시 소환하기엔 기운도 없었다. 자신의 원래 세계로 돌아가야 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난 용사가 그 것조차 방해했다.
"한낱 인간주제에!!"
디아블로가 덤벼드는 용사를 쳐내고 후퇴 하려 했지만, 어딘가 막이 쳐진 듯이 결계에 막혔다. 그제서야 용사 주변으로, 천신의 문양이 그려진 순백색의 옷을 입고 무기를 든 자들과 책을 든 인간들이 보였다. 성국의 성기사와 사제들이었다.
"천신이여 이렇게 방해 하는가!!"
천신은 디아블로와 상반 된 힘을 갖고 있으나, 직접적으로 나설 힘이 없었다. 그래서 디아블로가 중간계를 점령할 준비 하고 있을 때, 천신도 대비 하고 있었다.
용맹하게 자신에게 달려드는 용사와 성기사는 디아블로가 보기엔 떨거지들이나 다름 없었다. 다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디아블로는 결계를 탈출 하려 기운을 모았다.
"두려워 하라!"
끔찍한 기운이 스멀스멀 모이더니 디아블로의 모습이 뒤틀렸다. 관절이 꺾이고 손가락이 늘어나며, 근육이 부풀어 오르고 살점이 찢겨나갔다. 이마엔 두 개의 굵은 뿔이 나며, 등 뒤로 날카로운 꼬리와 날개가 살점을 찢고 솟아났다.
힘이 없다고는 하나, 인간과 악신의 터무니 없는 격의 차이가 있었다. 괴기스러운 모습에 성기사와 사제들이 두려움에 떨었으나 용사는 자신이 들고 있던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하늘 높이 치켜든 검은 밝게 빛이 나며 주변을 환하게 비췄다. 그 따스한 빛을 받은 성기사와 사제들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모두 할 수 있습니다!!"
"천신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용사와 성기사들이 디아블로에게 맞섰다. 괴기스럽게 변한 디아블로가 결계를 가뿐하게 찢어발기곤 큼직한 손을 휘둘러 인간들을 쳐냈다.
그러나 휘두른 손은 다 휘두르지 못하고 중간에 막히고 말았는데, 자신과 크기가 비슷한 손을 용사가 막아냈다.
"인간따위가 감히!!"
사제들의 가호와 용사 본연의 힘. 그리고 용사가 들고 있던 검에 특수한 효과가 생겼다. 용들을 불러내면서 연결된 용의 힘이, 검에 녹아 들어 용의 힘을 일부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압도적인 무력(武力)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르는 디아블로는, 자신이 힘이 빠졌다곤 하나 인간에게 자신의 공격이 막힌 사실이 꽤나 충격이었다. 용사가 막아세우는 사이에, 사제들의 가호를 받은 성기사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달려들어 공격했다. 디아블로는 몸을 떨며 불길한 기운을 뿜어댔다. 그럴 때마다 사제들이 결계를 만들어 막거나 용사가 나서서 기운을 갈랐다.
용사는 치명상을 줄 순 없지만 디아블로를 점점 궁지로 몰았다. 기껏 모은 불길한 기운마저도 용사의 검에 분산되어 사라지니 힘을 보충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디아블로가 궁지에 몰렸을 때 사제들이 비장의 한 수를 꺼내들었다. 천신의 성배, 천신의 종, 천신의 성서. 이 세 개의 성물로 디아블로의 봉인을 시도했다.
자신을 봉인하려는 낌새를 눈치챈 디아블로가 더 폭팔적으로 포효했다.
"천신!!! 무슨 짓을 꾸미는 것이냐!!"
디아블로가 끔찍한 기운을 모아 괴기스런 모습을 더 징그럽게 변하였다. 근육은 더 커지고 날개가 찢어지며 관절은 뒤틀리며 덩치가 더 커졌다. 용사는 성기사들과 함께 디아블로를 저지했지만, 폭주하는 디아블로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디아블로가 남은 힘을 짜내어 성물을 들고 있던 사제들을 향해 저주의 기운을 내뿜었다. 사제들은 밝은 빛으로 결계를 세웠지만, 결계를 깨부수며 막힘없이 나아갔다.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 용사가 사이로 뛰어들어 모두 자신의 몸으로 받아냈다. 또 한 번 내뿜기 전에 용사가 만들어낸 빈틈은, 성물의 힘으로 디아블로를 제압하는 충분한 시간을 벌게 되었고 디아블로를 봉인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고작 이따위로 나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 하지 마라. 어둠이 조금씩 드리울 때 나를 부르는 소리에 다시 돌아온다."
디아블로는 봉인 되기 전에 마지막 말을 인간들에게 전하고 은은한 빛이 나오는 마력의 구체에 봉인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