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靑) 와이번 >
푸른 색의 와이번으로 용종 중 최하위종. 가장 강한 와이번이 무리를 이끌며 더운 곳을 찾아 이동한다. 산맥이나 협곡에서 생활하며 먹이를 찾아다닌다. 외형은 도마뱀에 가까우나 퍼덕이는 날개는 자신의 몸만하고 크기는 집 한 채만 하며 가장 큰 개체는 성(城)과 맞먹는다고 한다.
마물 등급 : B
진서가 감정스킬로 뜬 알림 창을 채 읽기도 전에 와이번이 빠른 속도로 다가 오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한 마리만 온 것인데, 그 한 마리 조차 가공할만한 위력이 느껴졌다.
크롸아아!!
와이번의 포효에 다리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채찍질을 하는 상인은 젖먹던 힘을 다해 채찍을 휘둘렀고, 짐 속에서 고기를 찾던 상인이 부리나케 고기를 들고 진서에게 외쳤다.
"이걸 신호와 함께 던져주세요! 미끼가 되는 겁니다!"
고기 한 덩이는 상인이 들고, 남은 고기 한 덩이는 진서가 들어 와이번을 바라 보고 있었다. 얼른 던져버리고 싶었다.
와이번이 지척에 가까워졌을 때 상인이 소리쳤다.
"다리 밖으로 던지는 겁니다! 하나! 둘! 셋!"
진서가 신호에 맞춰, 있는 힘껏 고기를 던지는데 갑자기 몸이 붕 떠올랐다. 고기를 던지려던 상인이 진서를 맞춰 넘어뜨린 것이다. 마차에서 멀리 날아갔다. 처음보는 와이번에게 정신이 팔려 순간적으로 방심했다. 스킬도 쓰지 않았는데 머릿속에 천천히 상인의 말이 떠올랐다.
'미끼가 되는 겁니다!' 라고.
"시간가속!"
흩날리던 바람도, 던져진 고기를 먹으러 입을 벌린 와이번도, 열심히 달려가던 마차도, 상인의 비열한 웃음도 전부 멈췄다. 진서가 멈춰진 시간 속에서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마차에서 떨어져 다리에 구르다가 몸을 일으켜 마차를 향해 뛰었다. 중력만큼은 시간과 관계가 없어, 마차에서 꽤 멀리 떨어졌다. 마차엔 놀라는 인영의 얼굴과 비열한 웃음의 상인 대조되었다. 빠르게 마차로 되돌아갔지만, 직감적으로 시간이 부족할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멈춰진 시간도 촉박한 진서는 필사의 도약을 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였지만 차츰 탈력감은 찾아오고 부들거리던 다리를 힘을 주어 버틸 때, 멈춰선 마차는 천천히 움직여 결국 제 속도를 찾았다.
진서를 밀었던 상인은 준비한 스크롤을 찢어 인영에게 마법을 걸었다. 그러자 진서가 떨어져 놀라던 인영이 스르륵 잠에 들었다. 비열하게 웃던 상인을 바라 보며 진서는 무력한 느낌을 받았다. 마차는 속절없이 다리를 힘차게 내달렸다.
크롸아아!!
그런 진서의 기분까지 씹어먹어버리는 와이번의 포효와 힘을 다 썼음에도 마차를 붙잡지 못한 비통한 감정은 진서의 복수심을 일깨웠다.
'이렇게 있으면 안돼, 죽으면 전부 무용지물이다.'
와이번은 다리 밖으로 던져진 고기를 요령좋게 받아 먹고는 진서가 들고 있던 고기를 먹으려 다리를 순회했다. 진서는 머리 위로 와이번을 바라봤는데, 어릴적에 부모님이 여행가실 때 타던 비행기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게 마물이란 것만 빼면.
진서는 생존을 위해 가장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세계에 오면서 스텟이란 시스템이 생기고 진서에게 변화가 생겼다. 근육질의 고블린을 힘으로 이긴 이유도, 스텟에 따른 이질적인 힘을 낼 수 있어서였다. 그러나 마차를 붙잡으려 할 때 힘을 다 소진했다. 탈력감을 무릅쓰고 두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는게 고작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해도 시간 벌이용이고 결국 먹힐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진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진서가 고기를 붙잡고 최대한 달렸다. 다리만 벗어나면 숲으로 숨어 살 가망은 있었다. 그러나 진서의 노력에 무색하게도, 와이번이 다리를 한 바퀴 돌아 진서에게 도착하는 데, 진서는 몇걸음 채 가지 못했다.
진서는 선택해야했다. 만약 여기서 죽는다면 필사적으로 살아온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이런 결말은 진서 본인이 용납 못했다. 진서는 고기를 내려두고 다리 밑으로 뛰어 내렸다.
크롸아아아!!
육중한 와이번이 다리위에 내려앉아 향긋한 고기를 한 입에 털어 넣었을 때 진서는 이미 떨어지고 있었다. 협곡밑으로 조그맣게 흐르는 강물은 진서의 마지막을 함께 하리라. 진서는 아득한 높이를 체감하며 시간이 느려졌다. 떨어지면 죽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살 방법을 찾았다.
허망하게 죽는게 죽는 것보다 싫다. 진서는 최대한 입수자세를 취했다. 강물에 빠진다면 어떻게 헤엄치면 될 것 같았다. 깊이가 어떨지 모르니 두려움이 컸지만.
진서는 강물이 다가오자 눈을 질끈 감았다.
'물에 닿자마자 조금이라도 헤엄친다!'
진서는 물에 닿는 순간 헤엄치려 몸을 살짝 웅크렸다. 바짝 긴장한 진서는 물에 젖을 것을 대비하여 털이 곤두세워졌는데, 시간이 지나도 강에 닿지 않았다.
진서가 눈을 뜨니 아직도 강물이 보였다. 심지어, 자신이 날고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 되니 진서의 숨겨진 힘을 찾았다. 바로 날 수 있는 것이다! 라며, 진서의 망상이 시작 될 찰나에 무언가 자신을 붙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와이번이 다리에 있던 고기 한 덩이를 먹고 진서를 놓치고 싶지 않아, 바로 뒤쫓았다. 펄럭이는 날개짓에 하강 하는 속도는 진서를 추월했다. 다만 붙잡은 것은 강에 가까이 와서야 할 수 있었고, 내려온 속도의 부하가 걸려 다시 날아오르는 데 힘이 들었다.
그렇게 진서는 협곡 밑으로 와이번과 함께 날고 있었다. 정확히는 와이번의 발톱에 붙잡혀 있었지만. 그러나 곧바로 와이번이 협곡 사이로 날아오르려는 낌새가 느껴져 진서는 최대한 발버둥을 쳤다. 미리 허리에 걸쳐둔 검을 꺼내 와이번의 발가락을 푹푹 찔렀다.
와이번의 튼튼한 비늘은 진서의 힘으로 뚫을 순 없었지만, 계속된 발버둥과 집요하게 한 곳만 찌르니, 와이번은 귀찮은 듯 날아오르기도 전에 진서를 잡아 먹으려 고개를 숙였다. 손이 짧으니 직접 입을 갖다대려고 했다.
진서가 원하던 건 붙잡은 손을 풀려고 했으나, 조금 이상하게 흘러갔다. 진서의 몸보다 커다란 입이 쩌억 하고 벌리며 다가왔다.
죽음을 피해 연명하면 또 다른 죽음이 찾아왔다. 그러나 진서는 이렇게 살아왔다. 그런 죽음을 피하는 방법에 도가 튼 사람이었다.
칼로 발가락을 찌르던 진서가, 칼을 고쳐 잡아 쩌억 벌린 입에 던져버렸다. 회전 하며 날아간 칼은 정확하게 입 안에 박혔고 와이번은 고통에 균형을 잃었다.
크르와아아!!
진서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벤토리 창에 있던 남은 칼을 꺼내 발가락 사이를 벌렸다. 와이번은 균형을 잡으려다, 날개가 좁디 좁은 협곡의 절벽에 부딪혀 강물로 추락했다. 그 틈에 진서는 어디론가 튕겨져 날아갔다.
날아간 진서는 헤엄치려고 준비했으나, 딱딱한 바닥에 떼굴떼굴 굴렀다. 진서가 주변을 확인하니 동굴같은 곳이었다.
크롸아아!!
와이번이 강물에 허우적대며 협곡의 절벽을 붙잡고 올라 오려 했다. 진서는 어찌됐든 산 것 같으니, 와이번의 포효를 뒤로 하고 동굴 안쪽으로 피신했다.
다행이 와이번은 동굴 안쪽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진서는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대비해서 나쁠 것 없다.
'여긴, 어디지?'
진서가 암시[暗示]를 이용해 동굴을 확인했지만, 그냥 흔한 동굴이었다. 제발 빠져 나갈 구멍이 또 있기를 바라며 샅샅이 뒤졌다. 그러다 동굴 안쪽에 집 한 채가 지어져 있었다. 집은 그렇게 넓지도 않았고 허름했으며 누군가 살았던 흔적만이 존재했다.
당장이라도 부숴질 것 같은 집은 신비로운 힘이 느껴졌는데, 진서는 무시했다.
'이렇게 허름한 곳에 들어갔다가, 무너지면 어떡해?'
진서는 동굴 안쪽을 더 확인하려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 안쪽은 막다른 길이었고 간간히 메아리쳐 들리는 와이번의 포효가, 동굴에 꼼짝없이 갇혔다. 라는 걸 일깨워줬다.
진서는 다시 집 앞에 섰는데, 혹시라도 누군가 있으면 여기서 나갈 방법을 묻고 싶었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긴 싫었지만, 여기서 나가야하니 문짝을 두드렸다.
두드릴려고 문을 쳤지만, 파손 되어 있던 문은 스르륵 열렸다. 진서는 잠겨져 있지 않던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누구 없어요?"
진서의 작은 외침은 고요만이 답해줬다. 집 안은 방이 두 개뿐인 작업장 같은 곳이었는데, 이상한 액체가 담겨져 있는 병들과 여러 책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이런 곳에 살면 미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상한 액체들만 빼면 비슷한 처지니 이해했다.
"허억!"
진서가 여기저기 둘러 보다 책상에 로브를 입은 해골이 엎어져 있었다. 무언가 연구를 하고 있었는지 손뼈마디 끝엔 덮어진 책 하나가 있다.
진서는 슬쩍 책을 빼내어 살폈다. 겉은 아무런 단어도 적혀 있지 않았다.
"감정!"
< 헤르파멘의 일지 >
500년 전 행방불명 된 현자 헤르파멘이 적은 일지이다. 그의 지혜와 지식이 종합해 적혀 있는 일지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쳐주고 지혜를 탐구하는 그의 노력을 알 수 있게 된다.
스텟 [마력]이 [60]이하 일 시, 영구적으로 마력 [4] 상승. 스텟 [마력]이 [80]이하 일 시, 영구적으로 마력 [2] 상승.
진서는 해골을 보며 떨떠름 했다. 500년 도 더 된 해골일텐데 어떻게 무너지지 않고 책상에 엎어져 있는지 이해가 안갔다. 어쨌든 책을 펼치니 무수히 많은 단어들이 지직거리며 번역되었다.
해월력 82일
나는 드디어 이 곳을 발견하였다. 내 일생을 다 바친 모험이라 기쁘기 짝이 없었다. 존재 하는 생명체중 가장 생명의 힘이 강한 용의 레어라니, 믿을 수 없었다. 그럼……
해월력 90일
나는 감탄하고 또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몇 백년이 지났을 터인데, 아무것도 없는 레어에서, 끊임 없이 흘러나오는 마력은 아직도 요동쳤다. 동굴에 집을 짓고 연구를 본격적으로……
해월력 107일
레어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또 다른 통로를 발견하였다. 그 곳에서는 …
진서가 일지를 읽다가, 어느 반짝거리는 단어를 읽는 순간 머릿속으로 영상이 주입되었다. 마치 영화관을 머릿 속에 박아 놓은 느낌이었다.
영상에는 해골이 입고 있던 로브와 똑같은 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