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
진서가 자신의 부끄러움에, 그리고 다크엘프의 무감각한 시선을 못이겨 다시 감싸버린 포대를 풀어 다크엘프를 꺼내어 주었다.
다크엘프는 손발이 묶인 채로 온 몸의 군데군데 흉터가 있었다. 눈빛만으로 그리고 몸에 있던 그 증거들만으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막연하게 느껴졌다. 진서는 속박시킨 밧줄을 칼로 잘라 다크엘프를 풀어주었다.
손발이 풀렸음에도 다크엘프는 탁한 눈빛으로 진서를 쳐다만 보고 미동도하지 않았다. 결국 진서가 가져온 옷을 다크엘프에게 대충 입히고는 말린 과일을 손에 쥐어주었다.
'신기하네…'
진서가 다크엘프를 도와주며 얼굴을 보고있자니, 아르바이트를 하며 잠깐 봤던 그 여고생이 생각났다. 앳된 얼굴로 생기를 듬뿍머금은 여고생.
'어디 고등학교였더라... 하인영이랬나?'
문영여고 하인영. 편의점 알바를 할 때 손기술이 좋아 기억이 난다. 얼마나 좋은지 cctv가 아슬아슬하게 못잡는 수준이였다. 그래서 하인영이 나가고 나서도 cctv를 몇 번이나 돌려봤다.
그런데, 그 하인영하고 다크엘프의 얼굴이 닮았다.
"저기... 이름이 뭐야?"
"…"
"말을 할 수 있어?"
"…"
진서가 물어보는 말들에 대답도 안하고, 손에 쥐어준 말린 과일들은 손에 쥔채로 그대로였다. 다만 계속 진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진서는 다크엘프의 눈빛을 피하지 않고 계속 받아드렸다. 그리고 말린 과일들을 직접 입에 먹여주었다.
"갈 곳 있어?"
여전히 다크엘프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진서가 먹여주는 과일들은 대충 씹어 넘겼다.
'혹시 듣는 것만 번역이 되는 건가?'
귀로는 똑똑히 한국어로 들었는데, 진서의 말이 번역되는 건 별개의 문제였나 보다. 게임에 접속한 이후로 대화를 못해봤으니 번역에 대해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몰랐다. 강도들한테도 대답을 듣지 못했고, 혹시나 번역이 안되어 진서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부끄러웠던 말들도 못알아 듣는 것이다. 갑자기 진서에게 자신감이 붙었다.
"인영아, 일단 여기서 벗어나자. 폭팔 소리에 사람들이 올거야, 골치아파."
자신감이 붙자마자 멋대로 부르기 편한 이름을 붙여 불렀다. 다크엘프는 그런 진서를 쳐다만 볼 뿐 여전히 가만히 있었다.
'역시, 말을 못듣는건가, 아니면… 나의 도움은 필요 없다는 건가?'
그렇다면 두고 가면 된다. 진서는 뒤 쪽에 있는 식재료를 보며 이것들만 들고가도 며칠은 먹고 산다. 이런 횡재를 놓칠 수 없다.
그러나 진서의 머릿속에 그 눈빛이 맴돌았다. 첫눈에 반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첫눈에 알았다. 나와 똑같았다는 걸, 아니, 판타지 세계에선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 도와주자. 감자따위야 직접 캐면 돼.'
결국 진서는 감자포대의 반을 버린 후 허리에 둘러메고, 다크엘프에게 갔다.
"일단 이것 좀 먹고, 나한테 업혀, 여기있으면 위험해"
진서가 감자를 다크엘프의 입에다 넣어주곤, 등에 받쳐 업었다. 여기 오래있으면 분명 또 다른 사람이 올테고,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오해할테니 장소를 옮겨야했다. 진서는 다크엘프를 업고 길에서 조금 물러나, 마차가 가던 방향으로 걸어갔다.
진서는 길을 따라 가는 동안 인영을 보고 계속 말을 걸었는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원래의 진서로 돌아왔다. 게임 시작한 후 너무 정신없는 일이 많아져서 수다스러워졌지만, 무뚝뚝하던 진서로 돌아왔다. 그렇게 반나절을 아무 소리 없이 서로의 숨소리만 느끼며 걸었다.
진서는 공장에서 시멘트포대를 옮기던 일이 생각났다. 다크엘프는 그것과 비교하면 크기에 비해 훨씬 가벼웠다. 그런 이질감에 요정 같은 분위기가 더 흘러나왔다.
해는 땅에 숨어 달빛만 비췄다. 달은 총 세 개로 붉은색, 파란색, 밝은 백색이 조화롭게 판타지스러운 느낌이 물씬 났다. 덕분에 어둡진 않았지만, 숲 속은 위험하다. 마나가 풍부하니 몬스터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밤이라면 몬스터들이 더 강해지는 시기이니까.
일단 진서가 오늘 밤을 보낼 적당한 곳을 찾았다. 아까 강도들도 이 근처 어딘가에서 보낼테고, 상인의 호위인원 레벨을 보면, 이 근처엔 위험한 몬스터는 없을 것이다. 다크엘프를 나무에 기대어 내려놓고 임시거처를 만들 준비를 했다.
나뭇가지들을 주워 불을 피웠다. 서바이벌 지식도 다 섭렵한 진서에게 뚝딱하니 모닥불 주위로 뾰족한 나무들, 잿더미로 둘러싸 벌레까지 막는 훌륭한 임시 거처였다. 진서는 임시거처를 다 만들고나서 고개를 돌려 다크엘프가 쉬는 곳을 봤다.
진서는 다크엘프를 보며 숨이 멎는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두웠던 피부가 달빛을 머금으니 은은하게 빛이 났다. 푸석해진 머릿결은 조금 차분해졌고 회색의 눈동자는 조금이나마 붉은 빛이 돌았다. 같은 옷을 입고 있는데도 흘러넘치는 분위기가 달랐다. 애초에 앳되고 수려한 외모는 달빛과 어울려 진서의 눈에 녹아들었다.
'힘들었겠지.'
누가 봐도 다크엘프의 외형에 홀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진서는 아름다움에 가려진 고통을 보았다. 차분해졌지만, 푸석함이 지워지지 않은 머리카락, 생기 없는 눈빛, 은은한 피부에 가려진 흉터들. 측은했지만, 자신도 예전엔 동정을 바란게 아니니 편하게 대했다. 동정은 허울만 있을 뿐이니까.
"인영아, 불에 가까이 와."
"..."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인영이라 부르며 손짓했다. 자신을 부르는 걸 아는지 힘없이 고개를 들어 진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시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인형처럼. 죽음을 기다리는 인형은 한 없이 가라앉았다. 진서는 그런 그녀를 세상에 져버리게 두고 싶지 않았다.
진서는 기대어 있는 인영을 안아 들어 모닥불 근처에 앉혔다. 인영은 진서가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었다.
'인영이 아니라 인형이네, 인형.'
인영을 모닥불 근처로 앉혀 놓고 자신도 그 반대편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타닥, 타다닥
진서의 처음 맛보는 이세계의 밤은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다. 특히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소리와 선선한 바람이 퍽 좋았다. 문득, 바라본 인영은 진서가 앉힌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너도 누워, 쉴 수 있을 때 쉬어야 해."
"…"
진서의 말에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으니 짧게 한숨을 쉬고 일어나, 인영을 편안하게 눕히고 다시 자기자리에 누웠다. 그러다 문득, 저주에 걸린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저주에 걸린 공주가 왕자에게 키스를 받아 저주를 풀었다는 이야기!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다. 안그렇고서야 저렇게 힘이 없을리가 있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인영을 쳐다보니, 인영도 진서를 쳐다 보고 있었다. 이상한 생각을 한 걸 들킨 기분이였다.
"어... 음... 아무생각도 안했어."
진서의 생각은 인영의 눈빛으로 훨훨 날아가버렸다. 저 눈빛은 저주따위가 아니라는 걸 자신이 더 잘 알았다. 문득, 도움이 될까 싶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지옥같은 곳에 있었어. 너랑은 비교도 못하겠지만…"
진서가 겪었던 공장에서의 이야기를 인영에게 조심히 들려주었다. 처음 들어갔을 땐 폐인에 가까워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았었다. 가르쳐주는거 하나 없이 그저 무거운 걸 옮기는 것만 했다. 끊임없이 나르고 또 날랐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 하루를 끝낼 때면, 진서의 숙소로 밤마다 간부들이나 동료가 찾아왔다.
처음엔 저항했다. 그래 봤자 폐인이었던 나는 힘도 없었다. 그렇게 저항하는 나의 몸을 누구나 탐했다. 그딴 쓰레기들에게 몸이 더러워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어렸을 적에 불량배에서 지켜준 아버지가 생각났다. 더 화가 났다. 지금 이렇게 당하는데 어디있냐고.
그렇게 보름동안 부들대던 몸을 부여잡고 고통속에서 살아갈 때, 왜 살고있는지 의문점이 들었다. 이렇게 살아봐야 저딴놈들의 장난감으로 살아갈 뿐이지 않냐고. 그렇게 철저하게 진서의 편이 없어지니 깨달았다. 살 이유가 없어졌다. 저항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냥 이러다 죽으면 되겠구나' 라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힘내서 죽고 싶지도 않았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냥 살아만 있었다. 그러다 밤마다 찾아온 쓰레기들이 딱 하루 찾아오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밤이었다. 그 날. 진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한숨을 쉬는 순간, 고작 이딴 것에 안도를 하는 자신이 너무 웃겼다. 웃기고 초라하고 비참하고 억울했다. 억울했다. 정말 억울했다.
이렇게 살다 죽는 건 정말 억울했다. 그래서 진서는 그냥 죽긴 싫었다. 살아서, 살고 살아서, 악착같이 살아서 이딴 세상 다 없애버려야겠다고. 고요한 밤에 활활타오르는 의지가 진서를 다시 일으켰다. 진서의 불꽃은 꺼지지 직전 최고로 타올랐고 최후의 순간까지 타오르리라 다짐했다.
진서의 다짐이 어떻든 쓰레기들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옥의 공장은 진서를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그럼에도 진서의 눈빛은 활활 타올랐다. 실제론 몇 번 더 꺾였지만 부들부들 떨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상이 저주했으니 똑같이 세상에 저주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너도 포기 하지 않았으면 해."
어짜피 인영은 한국어도 못하니 혼자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댔거지만, 인영을 보니 자신의 어릴 적이 생각나, 앞으로도 포기하지말라는, 자기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이런 소리 남한테 한적 없는데.'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진서가 부끄러워졌다. 왜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싶었다. 푸념하듯 내뱉고나서 인영을 돌아봤을 때, 인영은 진서의 눈을 똑바로 쳐다 보고 있었다.
진서가 움찔하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알아 들은거면 어떡하지?'
진서가 이렇게 주저리 얘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과 비슷한 고통의 경험을 했었다는 것과, '알아 듣지 못할테니'였다. 그러나 눈치 것, 말하는 어투나 감정들이 전달되었을 수 있다. 그정도는 이해하지만, 혹시라도 알아들었다면?
진서는 그렇게 흑역사를 차곡차곡 쌓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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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 부스럭
'음? 잠들었나?'
진서가 얕은 잠에서 깨어 슬며시 눈을 떴다.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는데 아직 밤이다. 조금 잤나 보다.
'역시, 긴장되니 잠을 못자는 군'
아무리 몬스터가 없더라도 아예 없는 것과 있을 것의 차이는, 많이 컸다. 진서는 잠을 깊게 자지 못하니, 애초에 이런곳에서 잘 자기는 글렀다.
진서가 고개를 흔들어 피곤한 정신을 깨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자기전 그 모습 그대로였으나, 놓친 부분이 없을까 꼼꼼히 확인했다.
'누가 왔다 간 흔적은 없네.'
진서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모닥불을 붙이려 애를 쓰고 있을 때 문득 인영의 얼굴을 쳐다봤다.
"…"
모닥불을 붙이던 진서가 전원이 꺼진 로봇처럼 그대로 작동을 멈췄다. 인영의 붉은 빛의 눈이 진서를 쳐다 보고 있었다. 어두운 곳에서 붉게 빛나는 야수의 눈빛이 이럴 것이다. 진서는 미리 준비해뒀던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자 인영이 놀란 듯 귀가 움찔하며 눈을 꼬옥 감고 고개를 돌렸다.
'응?'
놀란건 진서도 마찬가지였다. 살기는 아니여도 분명 그건 야수의 눈빛이였다. 그러나 경계태세를 취하는 순간 인영은 토끼와 같은 느낌으로 변했다.
언제부터 그런 눈으로 보고 있었을까, 자고 있는 동안 죽일 수 있었을 텐데. 눈을 꼬옥 감고 있는 인영을 보며 수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영이 스을쩍 눈을 뜨다가, 진서와 또 다시 눈이 마주치자 움찔하며 눈을 힘주어 감고는 삐걱대며 돌아서 눕는 걸 보곤, 머리가 멍해졌다.
'뭐지? 아직 죽일 필요가 없다. 이건가? 조심해야겠어.'
진서는 불을 마저 붙이곤 조심히 누웠다. 인영을 힐끗 봤지만, 돌아선 인영은 가만히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행동인 진서가 힐끔 힐끔 인영을 쳐다보며 이해하려고 했다.
'왜, 아까 등에 업혀있을 때는 가만히 있던거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진서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밤은 깊어가는데도 싹 달아난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그렇게 진서는 가끔 불을 피우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인영과 진서는 아침을 맞이 했다. 인영은 유연하게 몸을 떨며 잠에서 깨어났다. 여전히 힘이 없는 동작이었지만, 그래도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진 않았다. 손 끝부터 발 끝까지 몸이 풀려가는 기분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리곤 누워있는 진서를 보...
"..."
이번엔 진서가 인영을 쳐다 보고 있었다. 인영은 아주 천천히 눈을 감고 다시 뒤돌아 누웠다. 마치 아무일 없는 듯이, 아직 일어난 적 없는 듯이. 그러나 인영의 귀가 사정없이 움찔거리고 있었다.
"흐음."
진서가 콧바람을 냈다. 그 소리를 들은 인영이 움찔하며 몸서리쳤다.
"가자, 걸을 수 있지?"
진서가 무심하게 일어나 인영을 지나쳤다. 인영이 움찔거리다 조심히 고개를 들어 진서를 바라봤다. 이미 좀 걸어가 진서의 뒷모습을 바라 보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게 꽤 오랜만인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벌써 진서는 저만치 걸어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인영은 또 혼자가 되었다. 진서는 따뜻한 바람처럼 왔다가, 차가운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인영은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부 저 남자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몸을 삐걱대며 일어났다. 오랜만에 느낀 따뜻한 바람을 좀 더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움직인 몸은 빠르게 사라지는 바람을 잡을 수 없었다. 인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세상이 자신을 버린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주 하고 있었다. 그러니 이렇게 희망을 주는 순간 뺏어버린다. 이제 정말 세상이 지긋지긋하다.
"이거 봐, 또 포기했어. 말을 못하면 돌이라도 던져보지"
밤새 들어 익숙해진 소리가 들렸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드니, 따뜻한 바람이 서 있었다. 진서가 내민 손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진서의 등에 업혔다. 힘이 빠져 있던 어제완 달리 살짝 끌어안았다.
"몇 번 더 꺾여도 되니까, 포기하지만 말자."
목소리의 온기가 등을 통해 인영에게 전해졌다. 인영은 죽기전에 조금만 더 이러고 있고 싶었다. 그저 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