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은 눈부시게 아름다운데, 더 빛나는 진서의 그 곳... 이 아니라 늠름한 진서의 자태가 빛이 났다. 당황한 강도가 갑자기 튀어나온 진서의 자태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미친놈아냐?!"
"미친놈이라니, 초면에 할 소린가."
강도가 외친 욕설에 맞받아치는 진서였다.
반격 당할 줄 몰랐던 강도의 표정이 황당한 표정으로 바뀌었으나, 이내 진서의 체격을 보곤 계산을 끝냈다.
"길 잃은 모험가인가? 몸도 다부진게 노예로 팔면 딱 좋겠어?"
진서는 탐욕스러워지는 강도의 눈빛을 읽고 공장의 일이 생각났다. 자신의 몸을 탐내는 쓰레기들. 내 몸을 뺏으려 하다니, 배짱이 좋구나. 이 상황과 엮이기 싫었지만, 이렇게 된 거 살아남아야겠다.
하지만 진서도 가망이 없었다면 다가올 때 선수를 치는게 아닌 도망을 시도했을 것이다, 이미 파악은 해뒀다. 머릿 수로만 밀어붙이는 검술이 딱 자신이 하던 '검객'의 튜토리얼 정도라는 걸.
그러나 이건 실전이며, 검을 들고 있지도 않았고, 가상의 체격이 아닌 진서 본인의 체격이다.
'알몸의 실전이라니, 바로 로그아웃 당하는 거 아니야?'
가상의 공간이니 죽음으로써 강제 로그아웃을 당한다. 그렇게 되면 한동안 접속도 못하니, 며칠동안 죽어라 접속했는데 또 그 짓을 하긴 싫었다.
별로 깨끗해보이지 않는 인상과 덥수룩한 털로 뒤덥힌 강도의 우두머리. 생긴걸로 봐선 강도가 천직이다. 양 쪽 허리에 차고 있는 두 개의 검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와 진서의 몸을 난도질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강도는 별로 조심하지 않는 것 같다. 진서를. 나체의 사내를. 크고 우람한 그 ... 아니,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방심하고 있다는 증거로 팔짱을 끼고 있다. 진짜 그런 실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방심을 하면 틈이 생기게 된다.
강도의 부하들은 멀리서 진서와 두목을 바라 보고 있었으나, 나체의 사내에게 위협을 못느껴 먼저 마차를 뒤지고 있었고, 두목도 이미 어디에다 팔까 고민중에 있었다.
진서는 그런 두목을 앞에 두고 어떤 방법을 쓸지 고민중이였다. 말로 설득하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저 눈빛은 이미 진서의 분노를 일게했다. 그냥 죽이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마땅한 방법이 있는가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두목은 생각이 끝났는지, 음흉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흐흐흐,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지만, 순순히 잡혀주면 좋겠어?"
"하아... 그렇게 쳐다보지마."
"그래그래, 그렇게 저항하는 맛이 있어야지."
진서가 노려보는 눈빛은 강도의 즐거움인지 더욱 음흉한 표정으로 다가와 팔짱을 풀고 큼직한 손으로 진서의 몸을 포박하려 했다.
"시간가속"
진서는 게임은 게임의 시스템으로 해결하려했다. 진서의 생각이 닿았던 끝에는 이 모든게 튜토리얼같았다. 그러니 말도 안되는 스킬을 주었고, 그걸 사용해서 튜토리얼을 해결해라 라는 느낌.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감정 스킬을 쓸 이유는 없으니, 크로노스의 축복으로 받은 스킬을 사용했다.
별 생각없이 스킬을 썼지만, 진서는 처음 접속했을 때 느꼈던 모든게 느려지는 순간을 맞이했다. 포박하려 뻗은 두목의 손이 진서의 몸에 닿지도 않았는데 허공에 멈추었다. 쏜살같이 도망치던 다람쥐가 나무에 올라타려던 모습 그대로 멈추었다. 모든게 멈추었다.
그러나 진서는 이 모든걸 느끼고 자신이 움직일 수 있다는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느껴본 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 알았다.
두목의 검을 꺼내 쥐고 그대로 심장에 찔러 넣었다. 칼은 두목의 헐렁한 옷과 두부같은 살을 그대로 찢고 들어갔다. 그 순간 진서에게 극심한 탈력감이 몰려와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는 것과 동시에 시간이 정상적으로 흘렀다.
두목은 진서를 붙잡고는 포박하려 힘을 주었다. 그러나 허공에 흩날리는 진서의 잔상이 두목의 균형을 잃게 하였고 갑자기 덜컥거리는 몸이 기우뚱하며 쓰러졌다.
두목은 갑자기 일어난 일을 받아드리지 못했다. 아니,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도 몰랐다. 쓰러지고 난 이후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을 때 몸에 박혀있던 자신의 검이 보였다.
"끄아아아악!"
두목은 자신의 마지막 여력이였던 힘을 소리를 지르는데 소진했고, 그의 촛불은 그렇게 꺼졌다.
진서는 주저 앉은채로 쓰러지는 두목을 쳐다 보고 있었는데, 두목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고 갑자기 찾아온 극심한 탈력감을 이겨내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아까는 그저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지만, 지금은 진서가 힘이 다해 시간이 원래대로 돌아온 느낌이였다.
'역시...'
진서는 아까 본 스킬창에 대해 의심은 하고 있었다. 쓸 수 있는 스킬은 맞다. 그러나 소모값이 없었다. 시간을 가속시킨다는 능력도 사긴데 소모값이 없다? 그렇다는 건 무한으로 쓸 수 있다는 얘기다. 즉, 말도 안되는 소리다.
'분명히 그런 사기적인 스킬이 나한테 왔을 리 없다.'
그러나 이런 탈력감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주저앉아 천천히 기운을 차렸다.
쓰러질 것 같은 정신을 온힘을 다해 붙잡았고 빠르게 회복하고있었다. 그러나 너무 촉박했다. 쓰러지는 두목의 마지막 외침을 부하들도 들었기 때문이다.
마차에서 짐들을 뒤지고 있던 부하 세 명이 두목의 비명을 듣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두목과 나체의 사내 모두 쓰러져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두목의 가슴팍이 두목의 칼에 관통되어 있었다.
"두목!!"
강도들에게도 의리는 있는지, 쓰러진 두목에게 세 명이 모두 몰렸다. 쓰러진 진서를 무시한 채 말이다. 쓰러져있던 진서는 이미 체력을 조금 회복했고 흘깃 쳐다보며 강도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진서를 등진 사람 한 명, 마주보는 위치에 한 명, 두목의 시신 머리위에 앉아있는 사람 한 명. 진서는 강도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기 전에 한 발 먼저 움직였다.
"한 명."
쓰러져있던 진서가 등 뒤에 숨겨놨던 강도두목의 남은 칼을 손에 쥐고, 제일 가까이 있는 강도의 발목을 베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 손에 쥔 흙을 마주보고 있던 강도의 눈에 뿌렸다.
"크악!!"
"이자식이!!"
강도들은 갑작스런 진서의 습격에 칼을 꺼내지도 못했다. 진서는 쓰러진 몸을 일으켜 세우며 칼을 고쳐 잡고 앉아있던 강도의 목덜미를 베고, 눈에 흙이 들어가 눈을 감고 있던 강도의 복부에 칼을 찔러 넣었다.
발목이 베여 균형을 잃어 쓰러진 강도는 순식간에 두목과 동료를 쓰러뜨린 진서를 보며 연신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런 강도에게 진서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당연하게 뺏어갈려고 하면서, 자신이 뺏기는 건 두렵나 보지?"
진서는 마저 회복된 체력으로 일어나 복부에 찔러 넣은 칼을 뽑아 들어, 균형을 잃고 쓰러진 강도의 목을 내리쳤다. 날카로운 검은 그대로 강도의 목에 박혔고, 벌떡이는 혈관을 따라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휴, 이걸로 튜토리얼 완료인가."
사람을 죽였지만, 무심한 진서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어짜피 게임이기도 하고, 실제로 안죽였으면 자신이 죽을테니까 이번에도 잘 살아남았다는 걸 안주하며, 강도들의 몸을 뒤져서 소지품들을 챙겼다.
쓰러진 강도 모두 뒤져봤지만, 쓸만한 건 없어보였다. 동전 몇 푼 정도만 주웠는데, 진서가 알던 동전들이 아녔다.
'무슨그림이지?'
동전에는 어떤 국가의 성이 그려져 있었는데. 자신이 알던 가일드의 화폐는 중앙대륙을 정복한 블라단제국의 황제가 새겨져있는 동전인데, 진서가 주은 이 동전에는 딸랑 성 하나만 새겨져 있었다.
'공부를 덜했나.'
진서는 광대한 세계의 모든 걸 알려고 가일드의 세계를 미리 공부 했지만, 역시 역부족이였나보다. 그렇게 동전 몇 푼과 두목의 두 자루의 칼을 챙겨 마차로 갔다.
쓰러진 마차 주변에 폭팔에 휘말린 상인과, 아까 대치하다 쓰러진 호위인원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이 옷은 이제 필요없을테니 제가 좀 쓸게요.'
진서는 지금까지 알몸이였고 그 사실을 알고있었다. 추위도 추위지만,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을 순 없었다. 상인의 옷은 이미 폭팔에 그슬려 입을 수 없어서 허름한 호위인원의 옷을 주워 입었다.
까슬한 느낌이 드는 옷이였지만, 없는 것보단 훨씬 좋았다.
그리고 빼놓지 않고 주머니도 뒤졌는데, 다른 호위인원은 그렇다치고 상인의 주머니는 역시 두둑했다. 금 두 잎과 은 30잎이였는데, 이정도면 아무것도 안해도 한동안 먹고사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다.
'강도나 해볼까...'
진서가 주머니를 챙기면서 슬쩍 장래희망을 생각했다. 자기가 생각해놓고 시덥잖은지 고개를 털고 마차에 실린 포대자루를 뒤졌다. 총 열 개의 포대자루가 있었는데, 강도들이 풀어 헤쳤는지 네 개는 너져분하게 끈이 풀어져있었다.
자루엔 말린 과일들과 감자가 대부분이였는데 아쉽게도 마차가 부숴져서 이걸 다 들고가진 못했다. 아쉽지만 들고갈 수 있는 다른 물품이 없을까 남은 포대의 끈을 풀었다.
남은 여섯개중 하나를 남겨두고 포대를 풀었는데, 역시 식재료 뿐이였다. 아마도 식자재 상인인 듯하다.
마지막 남은 포대를 풀며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할 지 생각하고 있는데, 마지막 포대를 열었더니 이때까지 생각했던 모든게 백지가 됐다.
그 포대엔 사람… 아니, 다크엘프가 손발이 묶인 채 담겨져 있었다.
마치 그림자가 몸에 깃든 듯한 어두운 피부색, 엘프의 수려한 이목구비와 뾰족한 귀, 많이 못먹고 다니는지 조금 야윈 몸, 그럼에도 막을 수 없는 볼륨감.
그러나 진서는 다크엘프의 외형을 보지 못했다. 퍼석해진 흑발의 머릿결 사이로 보이는 탁한 눈빛으로 전해지는 생명의 부재. 다크엘프는 영혼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어릴적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과 닮았다.
다크엘프는 그저, 포대를 푼 진서를 건조하게 올려다 볼 뿐이였다.
"죽지마."
진서가 다크엘프를 보며 뜬금없는 한 마디를 했다. 초면에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있을까. 그러나 진서는 해주고싶었다. 과거 자신이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실제로 내뱉으니 미칠듯한 후회감이 찾아왔다. 분명 자기전에 생각나서 또 부끄러워 할 것이다. 두고두고 부끄러워할 것이다.
진서는 무감각한 다크엘프의 눈빛과 자신의 부끄러움을 참을 수 없어서 열었던 포대를 다시 싸맸다.
그렇게 진서와 다크엘프의 첫 만남은 훗날 진서가 잊고 싶어 했고, 다크엘프에겐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