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꿔오던 꿈. 그 꿈은 이상하게도 한 여인의 일생을 보여주고 있었다.
삶이 힘겨워 어느 순간부터 꾸지 않던 그 꿈을 몇 년 전부터 다시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존과는 다른 형태의 꿈을 꾸고 있었다. 매번 같은 꿈이었다. 같은 장소, 같은 상황, 같은 사람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생기 잃은 눈동자와 흐트러진 머리카락, 단아했던 그녀의 모습은 처참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편집된 것 같은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보지 않았어도 알 수 있었다.
거친 사내들에게 쫓기던 여인이었다. 포기할 만도 했지만, 발톱이 뽑히고 돌이 박혀 피가 흘러도 그녀는 뛰고 또 뛰었다. 고왔던 그녀의 치맛자락은 여기저기 긁히고 찢어져 엉망이 되었고, 가쁜 숨을 토해내는 그녀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졌다.
마지막엔 결국 사내들에게 잡혀 어딘가로 끌려갔었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행동했으며 당당함을 잃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가에 흐르는 피조차도 처연해 보였다. 꿈인데도 눈물이 나는 것 같다. 울지 않는 그녀를 대신해 펑펑 울고 싶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그녀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주변을 둘러본다. 그녀의 시선이 멈춘 구석엔 오래된 낫이 널브러져 있었다. 녹이 슬고 이가 나간 볼품없는 것이었다.
그녀가 일어선다. 풀어진 옷고름은 힘없이 흔들리고 찢긴 치맛자락 사이로 상처투성이가 된 하얀 다리가 보였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그녀의 몸이 무너질 것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않되]
안된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녀가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깨달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살리고 싶었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었다. 그녀의 삶을 지켜본 사람으로서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이미 그녀의 손에는 볼품없는 낫이 들려있었다. 주저앉은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 후- ”
긴 숨을 내뱉자 손의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
[않되.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 마!]
들릴 리 없는 나의 외침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멈칫거리는 그녀가 보였다.
[제발 그러지 마. 이게…… 끝은 아닐 거야]
닿지도 않은 낫의 서늘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녀의 팔이 과감하게 움직였다. 생각처럼 잘 안 되었던지 몇 번을 더 움직이던 그녀가 낫을 내려놓았다.
“하아~”
더러운 바닥이 붉은 피로 물드는 것과는 반대로 그녀의 표정은 평화롭기만 했다.
“후회뿐인 삶이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어. 나는 어리석었어. 그에게 진심을 전하지도 못했고, 더럽혀진 채 이런 선택을 하게 한 그들에게 벌을 내리지도 못했어.”
우당탕
문밖이 부산스러웠다. 언제 대놓은 것인지 문 앞에 몇 가지 물건들이 놓여있었고 걸쇠까지 걸려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저것도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사내들이 힘을 쓰자 문이 들썩이는 것이 보였다.
그녀가 웃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내 이리 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나를 욕보이고 내 약점을 잡았다며 의기양양했을 것이야.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한다 하여도 쓰임이 다하면 버려질 것이라는 걸 아는데, 내 그리 비참하게 살아갈 수 없지 않은가? 처음 선택도 내가 한 것이었고, 마지막 가는 길도 내 선택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하더라도…….”
[아니야. 아니라고. 이건 개죽음일 뿐이야! 제발- 제발-.]
나는 어느 세 온몸으로 악을 쓰고 있었다.
그녀 생명이 다해가고 있는 것이 보였고, 나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미소마저 힘을 잃어가고 있을 때였다. 문득 그녀가 보일 리 없는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괜찮아…….”
그녀의 생명이 그렇게 꺼져버렸고, 나의 세상도 무너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