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왕이라면... 빌어먹을, 무림사에 전왕이 한 둘인가? 누가 누군지 알게 뭐야?”
끼기기기기기기......!
끼기기기기기기기기......!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기......!
뜻밖에도, 척유한의 신형은 아직도 멈춰지지 않았다. 쌍십팔보는 십삼조에선 썅, 십팔! 이라고 불리는, 지랄 맞게 강맹한 경신의 원리였다. 그것은 변형된 보법으로, 멈추는 걸 불허하는 괴악한 특성으로 인하여, 조원들이 치를 떠는 보법이기도 했다.
-......
-훼헤헤... 우리, 삼대전왕을 몰라보다니... 거시기에 털도 안 난... 보숭한 놈이구면!
-털 안난 놈!
끼기기기기기기기기......!
“젠장! 빌어먹을! 시이벌!”
하지만, 아무리 썅 십팔 보법이라고 해도, 이상했다. 동굴 벽면을 탈 때까지 멈춰지지 않거니와, 벽면을 타고 올라가서는, 기어이 천장을 지나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또 다시 벽면을 타고 올랐다!
척유한은 쳇바퀴 돌듯 달리고 또 달렸다.
‘역시, 괴상한 동굴 탓인 거... 가만! 어쩌면...?’
그렇게 내달리며 노괴들과 말씨름을 하던 중, 퍼뜩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동굴의 기사(奇事)도... 저들 노괴들과 관련이 있는 거 아닐까?’
세 노괴에게 느껴지는 기감은 없다시피 했다. 역설적인 일이었다. 저들이 보인 능력에 비추어 본다면, 철저하게 기감을 갈무리했다는 얘기. 반대로 어마어마한 공력이라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어쩌면...
저들 세 괴인이...
사이한 동굴의 작용을...
더욱 예측할 수 없도록 바꿔 놓은 것은 아닐까.
그것이 의도한 것이건, 의도치 않은 것이건 말이다.
-흠훼헤! 저놈이... 드디어 우리 실력을 쥐뿔만큼은 알아본 모양이구먼!
소괴가 우쭐대며 말했다.
-훼헤헤... 그럼 혹여... 사왕전(邪王殿)이라고는... 들어 봤느냐!
-쿠쿠쿠... 사왕전이라고 들어봤... 아... 아니지! 난 현검전(玄劍殿)이지... 들어봤냐!
의외의 발언이었다.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언급된 명칭들이기도 했지만, 두 가지 모두가 강호에서 오래 전에 잊혀지다시피 한 것이었다.
-흠훼헤... 자네는 왜 아무 말 안 하는 게야?
-백마전(白魔殿)이다.
중괴가 못이기는 척, 어둠 속에서 중얼댔다.
“지... 지랄!”
척유한은 여전히 동굴 벽을 따라 달리면서,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외쳤다. 처음엔 전왕이라는 말에, 전왕(戰王)이라는 별호를 떠올렸고 누구를 뜻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정도맹 현검전(玄劍殿)!
사악련 사왕전(邪王殿)!
그리고... 마교의 백마전(白魔殿)!
하여, 정사마의 삼대전왕(三大殿王)이라면...
정도맹주와 사황, 그리고 마교주보다 강력하다는 이른바...
삼존(三尊) 아닌가!
-흠훼헤헤...!
-쿠쿠쿠쿡...!
-......
노괴들이 다시 웃었다. 정신이 제대로인지조차 의문이 드는 광기 어린 웃음이었다.
‘빌어먹을! 이제야 속도가 줄고 있다...!’
쌍십팔보가 잦아들고 있었다. 척유한은 신형을 멈추는데 온 신경을 쓰면서도, 입으로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빌어먹을 노괴들! 현검전과 사왕전, 그리고 백마전이라면... 무림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정, 사, 마의 연합을 말하는 건데...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게 말이나 되?”
-흠훼헤... 들어본 적은 있는 게구나?
-들어봤구나?
-......
“언제 적 일을 갖고, 허튼소리를...! 아무튼, 정신이 나간 게 분명하...”
쓰으윽!
그 순간. 말이 없던 중괴가 유령처럼 앞으로 튀어나왔다. 툭 불거진 이마 아래로, 퀭한 눈매가 지옥의 밑바닥처럼 음습한 존재감을 발했다.
-그건 그렇고, 네놈...
중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놈...!
-니놈...!
대괴와 수괴가 재미있다는 양 그 말을 따라했다.
-...장가는, 가봤냐?
-...갔냐?
-...갔어?
...끼이익!
척유한이, 섰다.
멈춰서는 순간.
쩌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저적!
벽면과 천장, 바닥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이내, 갈라져갔던 실금이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듯 스르륵 사라져갔다. 환청 같은 소리가 그 위로 울렸다.
-대답해라, ...갔냐?
-...갔냐구?
-...갔어?
“뭐... 뭐야?”
척유한이 멍한 얼굴로 중괴를 바라봤다. 큰소리를 외친다는 것이, 헛바람 빠진 소리가 나왔다.
“뭔 소리야?”
스스스스스스 - !
-안 갔군...
소름끼치는 중괴의 면상이, 다시 암흑 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져갔다. 시커먼 그림자로 화하기 직전, 중괴가 머쓱하게 덧붙였다.
-......해라 ......제일미랑...
중괴는 사라졌다. 처음처럼, 대괴와 소괴만이 남아 있었다. 나머지 두 노괴들은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중괴가 지나간 쪽을 흘긋거리며 미친듯이 웃어제끼고 있었다.
-흠훼헤헤...! 니가 이해해라... 이 안에만 갇혀 살다 보니까...
-쿠쿠쿠쿠...! 이해해라...!
소괴와 대괴가 킬킬거리며 지껄였다.
-훼헤헤헤! 그 뭐시기냐... 남자랑 여자랑... 혼인하면 첫날밤에... 그거 있잖냐...?
-쿠쿠쿠쿡...! 있잖냐?
“이런, 미친!”
그 미친 소리가, 척유한의 귓전에, 우뢰와 같은 굉음으로 울렸다.
-흠훼헤... 복수고 지랄이고 간에...
-...지랄이고 간에!
-그러니깐 우리들의 원(願)은 말이지...
-...소원은 말야!
-네놈이 강호제일미하고...
-강호제일미... 강호제일... 제일... 아... 아냐!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크흑!
그때 갑자기, 대괴가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와 흐느끼기 시작했다.
-크흑흑!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썩을 놈들을 죄다 잡아서 요절을 내고...!
대괴가 구부정히 선 채, 고개를 갈팡질팡 흔들며, 태산이 무너질 듯 굉음을 내질렀다.
-내 원은... 이제껏 뒤집어쓴 분통 터지는 개소리들을 찢어발기고...
-시끄러워! 시끄럽단 말이다아아아아아아아...!
또 한 번, 소괴가 기성을 내질렀다.
-그... 그러니까...
-꼬장꼬장한 노친네 같으니! 영겁을 살고도, 정신을 못 차려? 뭣이 중헌데?
-그거야... 아무래도...
-억만 년이 넘도록, 고리타분한 소리만 쏟아놓을 거냐?
-그래도... 생각하면 분통이...
-에잉, 정파 놈들 쪼잔함이란... 시커먼 마교 늙은이만도 못해가지고...
-어... 어디서 마교 따위와 비교질을... 정도맹주놈을 업어 키운 사람한테...
-시끄러! 우리끼리 족보 따져서 어쩌자는 게야! 이 안에서 억겁이나 해온 지랄이 그건데... 또 하자고?
촤촤촤촤촤촤촤!
쿠쿠쿠쿠쿠쿠쿵!
퍼퍼퍼퍼퍼퍼펑!
둘 중,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기운을 폭사했다. 일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휙 지나간 듯 보였지만, 일 개 성(省)을 날릴 정도의 기파가, 순식간에 충돌한 덕분에 소멸한 것이다.
물론, 그 정도를 알아보는 것만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무림의 일대종사 정도는 되어야 한달까.
‘서, 설마... 저 미친 노괴들이 정말로...?’
척유한은 알아보았다.
여전히 그들을 반신반의했지만, 어쨌건 노괴들의 무공만큼은 인정해야했다.
-커험! 아무튼 간에!
소괴가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잡생각일랑 접어두고... 이 어르신께서 말씀하시는 걸... 따라해 봐라...!
-따... 따라하란 건데...
대괴는 망설였다. 그러자 암흑 속에서, 아까의 둔중한 음성이... 울렸다.
-삼 대 이, 다.
-흠훼헤헤헤헤...!
소괴가 미친 듯이 웃었다.
-...훼헤헤! 시커먼 마교 늙은이가 도움 될 때가 다 있구만! 어떠냐? 이젠 따라해야겠지?
-따... 따라한다!
소괴가 척유한을 쳐다봤다. 히죽거리는 눈매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하지만 그 속에는 형언하기 힘든 무언가가 담겨 있었다.
-...제기, 어디까지 했는지... 까먹었잖아!
-...까먹었다!
-...이런 씨앙! 그딴 건 따라하지 말고... 아차차 생각났다!
-...따라하지 말고...
-...그러니까!
-...그니까!
소괴가 목청을 가다듬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 엄숙한 말소리가 울렸다.
-...강호제일미랑 혼인해라... 해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보고 ...요롷고롬 하기도 하면서 ...아무튼, 콱 그냥...!
-...응응응 ... 콱 그냥...!
-그니까 뭐냐... 그거?
-...그거!
-흠훼헤헤...!
-쿠쿠쿠...!
-훼헤헤...!
-쿠쿠쿠...!
-훼헤...!
-쿠쿠...!
땅바닥에 붙다시피 한 소괴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듯이, 몸을 배배꼬았다. 쇠꼬챙이처럼 키가 멀쭉한 대괴도 두 다리를 떨어대며 킬킬거렸다.
...어둠 속의 누군가도.
못나고 어리석고 기괴하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구석이 있는 광경이었다.
-뭐 꼭... 나를 대신해서라기보단... 그냥 뭐... 좋은 게 좋은 거라고... 후훼헤헤헤...!
-...좋은 게 좋은 거!
“시끄럽고!”
이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정신은 과연 온전한지를 따지기에 앞서, 척유한은 이들에게 품었던 적대감이 누그러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
“나갈 방도가, 있긴 해?”
-흠훼헤...!
-쿠쿠쿠...!
-거, 간단하지...!
-간단하다!
-천장만 뚫으면...!
-뚫으면...!
-반에 반에 반에 반... 각이면 될까...?
-아냐, 당장 될 걸?
-간단하지...?
-간단하다?
“쳇!”
물론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무시할 수도 없는 것이, 허당 같은 말 속에 뼈대가 있었다. 믿져야 본전일 것이다. 뜻밖의 도움이라도 얻으면 그만일 일이었다.
“좋아, 어쨌건 이제부터...”
-후헤헤... 잠깐!
-잠깐!
-......
“뭔데?”
-허나 한 가지 약조를 해야만... 나갈 방도를 조곤조곤 알려줄 터...!
-약속해라!
외양과는 달리, 두 노괴의 음성은 운율이 착착 맞고, 낭창낭창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실은 그런 이유 때문에, 듣는 입장에선 더더욱 견디기가 곤욕스러운... 흉물스런 노랫가락이기도 했지만.
“뭘?”
-훼헤... 그러니까...
-쿠쿠... 그니까...
-......
노괴들의 합창이 주위에 길게 퍼져갔다. 그들의 뒤에서, 벽면 곳곳에 어른거리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림자들이 유령(幽靈)처럼 일렁이며 일제히 따라서 외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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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제일미여야 한다...!
-강호제일미다...!
-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