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칼린 이 지옥불에 떨어질 년.”
척 보아하니 칼은 이 물약이 필요한 모양이었고, 사칼린은 ‘이놈, 까마귀, 엿 먹어봐라!’ 하는 마음으로 그의 제조를 굉장히 어렵게 구성한 듯 했다. 그러니까 깨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는 RPG게임 필수 퀘스트를 욕 나올 정도로 깨기 어렵게 만들어둔 느낌 비슷한 것일까.
칼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쌔빠지게 어려워 보이는 물약 제조를 무조건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 같은데, 이게 저만 마음먹어서 될 게 아닌 게, 준비물 모으러 다니는 ‘주인공’은 한낱 조류인 그가 아니라 짱짱 센 멋쟁이 마법사 나이기 때문이다.
혹 까마귀가 건방지게 굴면 곧바로 ‘나 안 해!’ 하며 협박할 마음을 먹고 있는데, 칼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물약 하나만 만들어주라.” 한 이후론 살살거리며 비위를 잘 맞춰주었다. 아주 좋았다.
“아, 그런데 사칼린은 그 염소 머리랑 붙어먹은 게 아니고 태어날 때부터 마녀라고 하지 않았어? 이 책에는 왜 사칼린이 염소 머리랑 만났다고 쓰여 있어? 내가 잘못 해석한 건가?”
“아니. 잘 해석했어. 그 책에 있는 마녀의 시초 사칼린은 내 주인이었던 사칼린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 정도 될 거야. 사칼린이라는 이름을 대물림했을 뿐이지.”
“아하? 그러면 네 주인 사칼린은 시초의 마녀 피가 흐르고 있던 거였네?”
“맞아.”
“오오. 나름 귀족이었던 건가.”
고귀한 시초의 피는 시초의 피고, 그 말로가 다시 떠올리기 싫을 정도로 끔찍했던 터라 절로 몸이 떨렸다. 불쌍한 사칼린. 소환 마법 한 번 잘못 부렸다가 호되게 당하고 저세상 갔네. 역시 가는 덴 순서 없고 예외 없어.
“이것부터 외우기 시작해.”
칼은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책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앉아서는 발을 꽝꽝 굴렀다. 슬쩍 봐서 무슨 책인지는 알고 있었다. 칼이 이 오두막을 복구할 때 그린 마법진들이 마법 종류별로 설명돼 있는 책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해리포X처럼 “윙가르디움 레비오사!” 하면 샤라랑 마법이 나오게 할 수 있는 건 마녀들의 능력 밖이란다. 무조건 마법진을 그려 피로 시전해야만 한다는데 솔직히 듣고 좀 실망했다. 이 정도로 사람 귀찮게 하는 수동 시스템이라니.
앞서 말했듯 난 초중고 12년 의무교육 기간 동안 책과는 담 쌓았던 불량 학생이었던지라 당연히도 암기에는 약하고 흥미도 없다. 다 외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싫은 소릴 하려고 했더니 칼이 금세 눈치 채곤 푸드덕 날아 몸을 홱 틀어버렸다.
“안 돼. 외워야 해.”
“네가 못 그려? 아까 보니까 책 안 보고도 척척 그리더만?”
“내가 24시간 붙어있을 수는 없잖아. 너도 네 한 몸 지킬 수는 있어야지.”
“몸을 지켜? 뭘 지켜? 뭘 지키기까지 해야 해? 여기 그렇게 위험해?”
기껏해야 아까 칼이 썼던 구조물 복구 마법이라든가, 빗자루 타게 해주는 마법 같은 걸 부리게 해주는 마법진을 외우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설마 불 나오고 얼음 나오고 그런 무시무시한 마법을 부리라고 하는 건가. 오오. 사실 그건 그것대로 흥미 있긴 했다.
칼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더니, 물약 준비물들이 쓰인 종이를 발로 집어 들고서 내 눈앞에 휘휘 흔들어보였다.
“딱 봐도 무시무시해 보이지 않냐? 기르곤 숲의 독지네 다리는 뭐, 기르곤 숲에 가서 ‘지네야, 다리 좀 잘라가도 될까?’ 하면 잘라주는 줄 아냐?”
“지네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 벌레 별로 안 무서워해.”
“네가 생각하는 지네 크기에서 정확히 오백 배 정도 덩치를 불리면 될 것 같다.”
“흐이이익! 미친! 나더러 그런 괴물을 잡으라는 거냐?”
나름대로 판타지 세계니까 잘 쳐줘서 팔뚝만 한 지네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칼의 말을 따라 상상 속 놈의 모습을 오백 배 불리니까 온 몸에 절로 소름이 돋았다. 그건 잡기도 전에 내가 잡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칼은 질겁하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발에 들고 팔랑거리던 종이를 내려놓으며 테이블 위로 시무룩하게 몸을 앉혔다.
“의무는 아니야. 위험하지 않다고 거짓말할 수준을 넘어 있는 재료들이라서 강요는 못 하겠다. 내키지 않으면 그냥 거절해도 좋아. 나 혼자 찾으러 갈 테니까.”
칼은 대가리를 푹 숙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이 구하기가 헬급 난이도인 재료들을 자랑하는 물약이 도대체 무슨 물약인지는 알 수 없지만(깃털 수십 개를 뽑아도 안 알려줬다) 칼에게는 목숨 걸고 만들어야 할 만큼 굉장히 중요한 모양이었다.
공부가 싫긴 했어도 바보는 아닌지라 대충 읽어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마족의 피라든가 뭔 드래곤의 비늘이라든가… 목숨은 내놓고 도전해봐야 할 것 같은 준비물들이 아닌가.
이 마법진을 다 외워 모든 마법을 섭렵한다고 한들 가망이 있을까 싶었지만, 왠지 시무룩한 칼의 모습이 안쓰러워서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떨어지고 난 이후로 답지 않게 감수성이 풍부해진 모양이었다. 원래 이렇게 부드러운 여자 아닌데.
“까짓것 외우지 뭐.”
“정말?”
“응. 순서대로 보면 돼?”
“응. 공격편, 방어편, 실용편 순서대로 보는 게 좋을 거야. 뒤에 봐야하는 것들 중에 빨리 외워야 할 만한 건 따로 내가 빼놓을게.”
“그래, 그래.”
“마법진 외우는 건 생각보다 안 어려워. 낮에는 마법 연습을 하고, 저녁에는 빗자루 타는 연습을 하자.”
“우와, 우와. 빗자루 대박. 대박. 빗자루 어디 있어?”
칼은 부리로 오두막 구석진 곳을 가리켰다. 과연 내 키 정도 되는 길이의 나무 빗자루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사칼린이 타던 거야.” 하고 부연설명 해주는 칼을 뒤로 하고 냉큼 달려가 빗자루를 집어봤다. 평범해 보이는 이 빗자루로 날 수 있다니.
빗자루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냥 평범한 빗자루였다. 당장 타보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칼을 바라보니까, 츤데레 까마귀는 한숨을 푹 한 번 내쉬더니 내게로 날아왔다.
“사칼린이 붙여놨던 마법진은 떼고, 네 걸 다시 써서 붙이자.”
칼은 빗자루 손잡이 끄트머리에 달려 있던 작은 종이쪼가리를 발로 뜯어내더니 아무 곳에나 휙 내버렸다. 그리고는 테이블로 돌아가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새 종이 하나를 깔아두고, <실용편>이라고 표지에 큼지막하게 적힌 책을 펼쳐 휘리릭 장을 넘겼다.
“이리 와 봐.”
칼이 시키는 대로 다가갔더니, 그가 펼쳐놓은 <실용편> 책장에는 낯선 마법진 모양과 함께 재잘재잘 부연설명들이 달려 있었다. 슬쩍 읽으니 비행 마법 어쩌고 적혀있었다. 아마 빗자루를 탈 때도 마법진을 그려 피를 쏟아 붓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알면 알수록 성가시고 귀찮은 세계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난다는 유혹적인 상황에 홀라당 마음을 빼앗기고 만 나는 내 쓸 곳 없는 피 따위 한 트럭 넘게 부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패기 있게 펜을 쥐는데, 칼이 말렸다.
“아예 피로 그려야 할 거야. 펜으로 그리거나 흙으로 흔적을 그려서 피를 쏟는 건 일회용으로밖에 시전이 안 되거든. 피로 그린 마법진은 여러 번 따로 쓸 필요 없어. 빗자루 탈 때마다 새로 쓸 게 아니면 피로 써두는 게 좋아.”
“뚜와이씨. 혈서라니. 독립운동가 된 기분이다.”
주사기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생살을 찢어 피를 내야 하는 무식한 방법은 역시 드센 나라도 망설여진다. 아까 칼이 쪼아버린 상처에서 피가 겨우 말랐는데.
고민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칼은 오두막 부엌의 찬장 쪽으로 날아가더니, 큼지막한 식칼을 부리에 물고 돌아왔다. 날이 잘 선 그것이 반짝 빛을 냈을 때 나는 흠칫 떨었다.
“어차피 마법 연습도 계속 해야 하니까, 미리 많이많이 짜 두자.”
미친.
***
“아… 빈혈….”
팔뚝을 그어서 피를 왕창 짜낸 나는 당장 빗자루에 올라보지도 못하고 사칼린의 침대에 드러누워 삼십분 동안 골골댔다.
나름 흠뻑 짜냈다고 생각했건만 작은 유리병에 담긴 피는 양이 얼마 안 됐다. 마녀라는 게 아주 극한 직업이구나. 기왕에 마법을 쓸 수 있게 해주려면 좀 편하고 안락하고 안전하게 해줄 것이지. 만나보지도 못한 멍청한 염소 대가리 악마에 대한 반감이 물씬 피어올랐다.
“옷을 갈아입는 게 어떨까?”
칼은 사칼린의 옷장을 열더니 내 주의를 끌고 말했다.
찢겨서 너덜너덜해진 반팔 티셔츠가 볼품없어 보이긴 했다. 옷만 찢어졌으면 몰라 가슴팍에 길게 난 까마귀 발톱 자국 상처도 그렇고, 지혈을 위해 돌돌 붕대 감은 팔뚝이며 아마도 모래 폭풍에 휩쓸렸을 때 난 듯한 팔다리 이곳저곳 생채기들까지.
모태 히키코모리인지라 웬만해선 다칠 일 없었던 나였으니 이렇게 좌로 구르고 우로 구르고 데굴데굴 굴렁쇠가 되어본 건 실로 27년 인생 처음이라 할 수 있겠다.
일단 옷을 갈아입는 건 좋은 선택 같았다. 침대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바로 빈혈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피곤하고 머리 아프고 짜증이 확 났다. 절로 욕 나오는 걸 겨우 삼키면서 다 찢어진 반팔 티셔츠를 훌러덩 벗었다.
“야, 이 바보야!”
걸레짝이 된 티셔츠를 아무 데나 내던지고 옷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는데 칼이 뜬금없이 빽 소리를 내지르더니 뒤로 홱 몸을 틀고는 허둥지둥 날갯짓을 했다. 뭐냐. 까마귀 주제에.
“아무 데서나 옷을 훌러덩 훌러덩 벗고!”
“내가 옷 훌러덩 벗는 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냐?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너 수컷이니?”
“그래, 수컷이다!”
“그런데 수컷이면 뭐. 까마귀 주제에 인간 여자 몸 보고 발정이라도 나냐.”
“이, 이…”
말문 막힌 듯한 칼을 내버려두고 사칼린의 옷장을 뒤적거렸다. 누가 마녀 아니랄까봐 옷장은 전부 시커먼 색 원피스로 가득 차 있었다. 무릎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기장의 헐렁한 원피스 하나를 골라 입은 다음, 아래 입고 있던 트레이닝 반바지를 벗어 여전히 내외하듯 뒤돌아 선 칼에게로 휙 던졌다.
“악!”
“풉.”
반바지를 뒤집어쓰고 한참 허우적거리던 칼이 겨우 그걸 벗어내곤 씩씩거리며 날 돌아봤다. 한 대 칠 기세였다. 그렇지만 짧은 시간 느낀 은근 헐렁한 그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뭘 해도 안 무서울 것 같다.
아늑하게 지낼 보금자리도 마련되었고, 옷도 깨끗한 걸로 새로 갈아입었고, 딱히 긴장한 건 없지만 왠지 마음이 느슨해지고 보니 또 배가 고팠다. 나는 먹는 걸 굉장히 좋아하고 배도 자주 고픈 스타일이었다. 거기에 움직이는 건 또 별로 안 좋아한다. 살이 잘 안 찌는 체질인 게 엄청 다행인 사람이었다. 안 그랬으면 침대 위에서 한 발자국도 못 움직이는 1톤짜리 박제 뚱땡이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칼.”
“뭐!”
역시나 귀엽지 않게 대꾸한다. 그런데 귀엽다. 묘한 매력을 가진 애완 까마귀다.
양 손으로 덥석 칼의 날갯죽지를 잡고는 까만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잔뜩 긴장하는 표정을 보아하니 또 내가 깃털을 뽑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배고파.”
긴장하던 표정을 탁 푼 칼이 작게 중얼거렸다.
“등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