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칼은 와중에 출출하다는 나를 벌레 보듯 바라보더니, 곧 잔해더미 사이에서 냄새 나는 가죽 꾸러미를 찾아왔다. 거기엔 말라비틀어진 육포처럼 생긴 것들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생긴 것과 달리 제법 맛이 좋았다. 조금 더 고급스러운 육포 맛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걸 질겅질겅 씹으면서 꽤 오랜만의 한가로움을 만끽했다. 지구에 있을 때도 한가로운 건 매한가지였으나 왜인지 마음이 불편하고, 하릴없이 시간 죽이는 백조 상태인 내가 인간쓰레기처럼 느껴지고 뭐 그래서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는데.
나이스, 정말 나이스.
칼은 한참 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그는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남들이 보면 도대체 까마귀 표정을 어떻게 가늠할 수 있느냐고 의아해하겠지만, 몰라, 그냥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애증의 관계였을 듯한 사칼린의 죽음을 계속 곱씹고 있는 것 같았다. 미워도 고와도 함께 지냈던 주인인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겠지. 안쓰럽게 느껴져서 날갯죽지를 두어 번 쓰다듬어줬다.
“어딜 더듬어!”
“위로해준 거야. 우울해 보여서.”
“우울하지 않아.”
“불쌍한 놈.”
“동정하지 마라.”
칼은 귀엽지 않게 대꾸하고는 다시 말없이 잔해더미를 응시했다. 원래 집이었는지 뭐였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끔 왕창 바스러진 폐허를 함께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가 막힌 생각이 있었다.
“야. 집 다시 고치는 마법 같은 건 없어?”
“내가 무슨 집 부서져서 이렇게 궁상떠는 줄 아냐?”
“에헤이. 궁상떠는 건 인정하네?”
“아, 이 재수 없는 계.”
생각 없이 입을 놀리던 칼이 뚝, 움직이던 부리를 멈췄다. 아마도 저 주둥아리에서 또 계집 어쩌고 하는 말이 나왔을 거라 확신한다. 냉큼 손을 들어 날개 쪽 깃털을 하나 뽑아냈다.
“아아아악!”
“뽑는 맛 괜찮은데.”
“야, 이! 중간에 멈췄잖아! 끝까지 말 안했잖아!”
“내가 끝까지 말하면 뽑는다고 그랬냐? 계집의 ‘계’자만 나오면 뽑는다고 했어, 안했어? 학습능력 떨어지려고 한다?”
“아오, 진짜….”
칼은 부르르 몸을 떨며 분을 삭이는 듯 하더니 총총 움직여 내게서 물러났다. 후후. 조류와 영장류의 명백한 힘의 차이를 드디어 느낀 모양이다.
“그나저나 집 짓는 마법 없냐니까?”
“그런 건 없어. 해당 반경의 시간을 되돌려서 구조물을 복구시키는 마법은 있지만. 그런데 진짜 나 집 부서져서 궁상떠는 거 아니라니까 그러네?”
“네가 궁상떨고 말고는 상관없고. 계속 바닥에 앉아있기 뭐해서 그래. 마법 좀 부려봐.”
“내가 마법을 어떻게 부려?”
“뭐야. 여기 마법 부리는 세계라며?”
“개나 소나 다 마법 부릴 수 있는 줄 아냐? 시발, 내가 마법 부릴 수 있었으면 진작.”
“진작 뭐.”
“하아… 됐다.”
칼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새카만 날개를 펼치곤 안쪽을 부리로 벅벅 긁어댔다.
“가렵냐? 긁어주랴?”
“됐거든.”
“야, 그러면 쓰는 놈들만 마법 쓸 수 있는 거야? 난 못 써?”
“여기서도 마법사들은 귀해.”
“뭐야, 재미없게. 기왕 소환시켜줄 거였으면 빠방하게 스펙 좀 채워서 마법사로 만들어주지.”
“사칼린 그 년도 마법사가 아니었는데 널 무슨 수로 마법사로 만들어 주냐?”
“엥? 마녀랑 마법사는 뭐 달라?”
궁금해서 물었더니 칼은 귀찮은 표정으로 날개를 휘휘 저었다. 노코멘트 하겠다는 뜻이었다. 건방진 날갯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깃털 뽑을 기세로 달려드니까 칼이 화들짝 놀라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내가 빨랐다. 스치듯 잡힌 날갯죽지를 쭉 당기니까 또 깃털 하나가 뽑혀 나왔다. “아아아악!” 하고 이제는 좀 익숙해진 칼의 비명이 터졌다.
“이, 이, 이… 또라이야!”
또라이네 뭐네 하면서도 칼은 나를 피해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았다. 갈 곳이 없기 때문인지, 짧은 시간 내 털털한 매력에 빠졌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아마도 후자일 거라고 예상해본다) 어쨌든 나쁘지 않았다. 나 또한 짧은 시간 그에게서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다.
씩씩거리며 숨을 고르던 칼은 조금 진정됐는지, 바닥에 주저앉은 나와 눈높이를 맞춰 날면서 입을 열었다.
“마녀는 원래 평범한 인간 여자들이야. 몸에 마나가 없어서 마법은 쥐뿔도 못 쓰지. 마녀들이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모든 마녀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포메트라는 악마에게서 마력이 깃든 피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야.”
“와, 대박. 완전 대박. 나 소름 돋았다.”
“뭐에서?”
“악마가 있다는 거에서.”
“나도 실제로는 본 적 없어. 아마 사칼린도 본 적 없을걸. 여기서도 거의 전설 비슷하게 취급되는 존재야.”
칼은 말을 끊고는 다시 날갯죽지를 펼쳐 안쪽을 부리로 벅벅 긁어댔다. 사람이 아니라 잘은 모르겠는데 어째 겨드랑이 긁는 느낌 같아서 썩 위생적으로 보이진 않는다. 도와줄까 싶어서 덥석 그를 잡았다.
“야, 뭐하냐?”
“내가 대신 긁어줄게.”
날개를 잡아 쥐고 안쪽을 살살 긁어주는데, 좋은 건지 아닌 건지 칼은 이리저리 몸부림을 쳐댔다. 간지러워하는 건지 고통스러워하는 건지 시원해하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악! 시발! 하지 말라고! 간지럽다고!”
간지러워하는 거였군. 귀엽긴.
“캬캬캬. 누나가 시원하게 긁어줄게.”
“와씨, 안 놔? 안 놔?”
자꾸 달아나려고 하기에 아예 품에 안아 넣고 벅벅 긁어줬다. 이게 나름대로 애완동물이랑 교감하는 느낌이라 꽤 좋았다.
본가에 지낼 땐 털 달린 동물을 키우고 싶어도 부모님이 싫어했고, 나와서 자취할 땐 귀찮아서 엄두가 안 났다. 27년 만에 비로소 다른 세계까지 와서야 손에 넣게 되었구나. 마이 펫.
“아, 아파!”
순간 품에서 몸부림치던 칼의 발톱이 날카롭게 내 가슴팍을 헤집고 지나갔다. 달아나기 위해 고의로 그런 건 아니었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다. 저도 놀랐는지 딱딱하게 굳어서 내 눈치를 본다.
귀엽긴. “괜찮아.” 말해주고 다시 긁어주랴 물어보는데 도리도리 고개를 젓는다. 틈을 놓치지 않고 푸드덕 날아올라 내 품에서 벗어나 버렸다.
긁힌 곳이 제법 쓰라려서 힐끗 내려다보는데, 입고 있던 반팔 티셔츠의 목 부분이 보기 좋게 쫙 찢어져 있었다. 오른쪽 어깨부터 쇄골까지 길게 발톱자국도 남아있었다.
“새끼, 힘 좋네.”
날고 있는 칼을 올려다보는데, 왜인지 그는 물끄러미 내 상처 난 가슴팍을 주시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순간이었다. 칼이 갑자기 내게로 달려들더니 발을 들어 티셔츠의 찢어진 부분을 더 길게 쫙 찢어냈다. 웬만해선 쉽게 찢기지 않아야 정상이거늘, 뭔 까마귀 힘이 그리 센지 꼭 약해빠진 천 쪼가리 갈라지듯 티셔츠가 하릴없이 나풀거렸다.
난데없이 옷을 찢어낸 칼은 가만히 그곳(그러니까 내 가슴)을 주시했다. 너덜너덜해진 티셔츠 아래로 분홍색 브래지어가 그대로 내보여지고 있었다.
“너 수컷이었어?”
칼은 대꾸가 없었다. 왜인지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동자로 한참 더 내 가슴팍을 주시하다가, 곧 제 날갯죽지로 그곳을 삿대질하듯 가리키며 물었다.
“그거 원래부터 있었냐?”
“응? 그거라니?”
“그거. 네 가슴 위에 그려진 그거 있잖아.”
칼의 시선을 따라 쪼르르 내려다보니, 아하, 작년 여름 영록이 따라 신림에 새로 개업한 타투 전문점에서 새긴 타투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수염이 엄청 멋있었던 타투 전문점 사장님이 떠올랐다. 여러 개 도안을 보고 한참 고민하던 내게, “아가씨는 무조건 이거야!” 하며 강력하게 추천해줘서 흔쾌히 그걸로 작업을 받았는데 꽤 마음에 들었다.
“멋있냐?”
뿔 달린 염소 모양의 도안이었는데, 사장님이 새겨주면서 이게 보통 염소가 아니고 무지막지하게 타락한 지옥의 염소라고 거창하게 겁을 줘서 꽤 웃었던 기억이 났다.
“따라와 봐.”
칼은 멋있냐는 내 물음은 간단히 먹어버리고 푸드덕 잔해더미 사이로 날아갔다. 거치적거리는 판자때기를 발로 대충 치워내 널찍한 흙바닥이 드러나게끔 하더니, 발톱을 세워서 뜬금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하는가 물어보려고 했는데 왠지 만난 이래로 제일 진지해보여서 관뒀다. 옆에 쪼그리고 앉아 가만히 지켜보니까 제법 그림 실력이 출중하다. 큼지막한 원을 그려 넣고 그 안에 고대 상형문자 같은 것을 쓰는데, 꼭 외워서 그리는 것처럼 한 치의 머뭇거림이 없었다.
“올. 피카소 까마귀.”
“손 줘봐.”
“응? 손?”
한참 그림 그리는 데에 열중하던 칼이 뜬금없이 손을 달라고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내어주는데 이놈의 잡아 죽여도 시원찮을 까마귀 새끼가 돌연 부리로 내 엄지를 씹듯이 쪼아내는 게 아닌가.
“악! 미친놈아!”
당연히도 피가 났다. 상처가 꽤 깊어서 아주 철철 났다. 칼이 그린 정체 모를 그림 위로 내 아까운 피가 뚝뚝 흘러내려 스며들었다. 빈혈 있어서 헌혈도 잘 안 하는 이 몸의 아까운 피를 이렇게나 많이 뽑아내다니.
이건 깃털 열 개 정도는 뽑아야 용서가 될 것 같다. 여전히 내 눈높이에서 푸드덕대고 있는 칼을 잡으려는데, 순간 흙바닥 위에서 정체 모를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 하더니 한순간에 시야가 점멸했다.
새하얘지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됐던 시야가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왔을 땐, 놀랍게도 나와 칼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뭐, 뭐야?”
놀라 주위를 두리번거리느라 바쁜 나와 달리, 칼은 뭔가를 알고 있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말이 없었다.
“뭐냐고!”
“뭐긴 뭐야. 마법이지.”
“그러니까 마법을… 너 마법 못 쓴다며?”
“내가 쓴 거 아냐.”
“그럼 누가 썼는데?”
“네가 쓴 거지.”
칼은 날갯죽지를 뻗어 자기가 뜯어놓은 내 손가락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