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나온 한결은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공부에 매진해야했다. 그게 가장 한결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잡다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한결은 그러지 못했다. 집이 아닌 놀이터로 향한 한결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봤다. 금으로도 사지 못하는 소중한 시간을 함부로 낭비하는 한결의 모습은, 이전 같았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연달아 벌어지면서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란 말조차 애매해졌다.
“어? 저거 세은이 아니야?”
오토바이에 생선박스를 몇 개씩 들고 배달 다니던 세은아빠는 놀이터에 혼자 앉아있는 세은을 보게 되었다. 잘하는 건 밥 먹는 것 밖에 없지만, 언제나 밝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식구들을 웃게 만들었던 세은의 풀이 죽은 모습에 세은아빠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세은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오토바이엔 아직 배달해야하는 생선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세은아빠가 입고 있는 옷은 배달복이었다. 집 안도 아니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세은아빠는 옷도 갈아입어야했다. 배달 중에 1까치씩 피우던 담배의 여유도 잊은 채 바쁘게 움직이던 세은아빠는 6시쯤 다시 놀이터로 돌아왔다. 배달을 마치고, 옷도 갈아입으면서 거의 2시간 정도 시간이 흘렀지만, 세은은 사진인 것처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은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확신한 세은아빠는 몸을 과장되게 움직이며 놀이터로 향했다.
“딸, 여기서 뭐해?”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한결은 세은아빠를 보게 되었다. 한결과 눈이 마주친 세은아빠는 환하게 웃어줬다. 하지만 웃을 여력조차 없었던 한결은 같이 웃어주지도, 어떤 말도 해주지도 못했다.
“요즘에 안하던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지?”
한결이 생각하는 학생은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부하느라 힘들다?’는 말은 어불성설에 가까운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세은을 만든 건 다름 아닌, 눈 앞에 있는 세은아빠일 확률이 가장 높았다. 무책임하다고 할 수도 있는 세은아빠의 공부법이 원망스러웠던 한결은 무겁게 닫혀있던 입을 열었다.
“아니요. 학생은 모름지기 공부하는 사람인데, 공부하는 게 뭐가 힘들겠어요.”
“아이고, 이제야 철들었네. 우리딸.”
“아버지는 공부가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왜 저한테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한결의 질문이 기특하게 느껴졌던 세은아빠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공부 잘하면 좋지. 근데 그게 억지로 시킨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 자기가 필요성을 느껴야하는 거지. 그리고 학생일 땐 공부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공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크지 않거든. 아빠는 세은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찾고 나면 밀어주는 사람이지. 뭐해라. 뭐해라. 시키는 사람이 아니거든. 물론 그럴 능력도 없고.”
감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성적으로는 세은아빠가 한 말을 100퍼센트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의 세은이 결코 비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매듭이 풀어지면서 한결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공부에 임해야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요즘에도 100일주 먹어? 수능보기 전에?”
“먹을 애들은 먹죠.”
“그럼 딸도 아빠랑 한 잔 할래?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워야 하는 거야.”
술이라는 얘기에 아무런 꿈도 희망도 보이지 않는 듯 흐리멍텅했던 한결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대답은 없었지만 표정에서 이미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세은아빠는 한결을 데리고 시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시장에서 가장 큰 횟집으로 들어갔다. 앉자마자 나오기 시작한 반찬그릇은 줄어들기 무섭게 새로운 반찬으로 되돌아왔다. 먹어도 먹어도 줄어들 생각이 보이지 않는 반찬그릇을 보며 한결은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 한 잔 해야지. 이제.”
반찬으로 한결이 배를 채웠을 때쯤, 세은아빠는 소주잔을 건넸다.
“소주보다는 맥주로 주시면 안 되나요?”
마셔본 적은 없지만 악명은 익히 잘 알고 있었던 한결은 소주 대신 맥주를 원했다. 하지만 세은아빠의 표정은 단호했다.
“약한 걸로 술을 배우면 주량도 모르고, 취한다는 기분도 몰라서 안 돼. 힘들더라도 처음엔 독한 술로 배워야 돼. 그래야 나중 되면 조절해가면서 먹을 수 있거든.”
세은아빠의 말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완벽주의자였던 한결은 맥주가 아닌, 소주로 술을 배우기로 했다. 한결이 소주잔을 내밀자 세은아빠는 바닥에만 살짝 깔릴 만큼만 소주를 따라줬다.
“처음엔 그 정도씩만 먹어도 충분해.”
간에 기별도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보는 술이니만큼 이만큼씩 먹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한결은 눈 딱 감고 밑바닥만 겨우 깔린 소주를 들이켰다. 소주가 목구멍으로 들어가면서 기분 나쁜 맛을 보여줄 때쯤, 세은아빠는 손에 쥐고 있던 광어와 생마늘, 그리고 초장이 어울러진 깻잎쌈을 한결의 입에 넣어줬다. 그러면서 소주가 지니고 있던 쓰디쓴 맛은 마법같이 사라져버렸다.
“어때? 먹을만하지?”
“네........”
소주를 마셨지만, 마치 물을 마신 것 같은 느낌에 한결은 벙찐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한결이 세은아빠에게 술을 배우고 있을 때, 병원에서 퇴원한 한결엄마는 한결과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태어나서 레스토랑은 단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던 세은은 대답할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한결엄마가 하는 행동만 따라했다.
“결아. 아빠한테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했다면서?”
세은이 알아듣지 못하자 한결엄마는 조금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서야 한결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된 세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등학생 때에도 하지 않던 모습을 보이는 세은에게 어이가 없었던 한결엄마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게 뭔데?”
“배우요.........”
세은의 대답에 한결엄마는 땅이 꺼져라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보장된 길만 걸었던 한결이 뜬금없이 아무것도 보장되어있지 않는 길로 가려고 하는 이유를 한결엄마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결은 한결엄마가 가장 믿고, 사랑하는 존재였다.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한결을 응원해주고 싶었던 한결엄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결엄마의 대답에 깜짝 놀란 세은은 손에 쥐고 있던 포크도 떨어뜨려버렸다.
“대신 대학은 갈 거지?”
“그, 그래야죠.”
의대말고 다른 선택지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던 한결엄마에게 의대를 양보한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의대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세은은 한결엄마에게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체 모를 건더기가 둥둥 떠다니는 검은색 물도 마시고, 새벽 3시까지 하는 새벽공부도 마다하지 않았다. 세은이 이전 같은 모습을 보이면서 한결엄마도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결아, 나 공부 좀 가르쳐주면 안 돼?”
공부를 알라달라는 세은의 말에 한결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자 세은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한결에게 설명해줬다. 세은의 말에 한결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세은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저 결이랑 같이 공부하기로 한 오세은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수능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세은학생도 열심히 공부해요.”
자신을 세은학생이라고 부르는 모습이 서운했지만, 건강해진 엄마를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은 충분히 행복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기분이 좋아진 한결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공부에 집중했다. 시장통에서 들려오는 소음들과 싸우며 공부하던 한결은 수학 한 과목 공부하는데에만 3시간이나 써버렸다. 시간을 확인하며 깜짝 놀란 한결은 세은을 바라봤다. 세은 역시 공부에 집중하고 있었다. 세은의 모습이 기특했던 한결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장밋빛 미래를 꿈꿨다.
“어때? 점수 많이 올랐지?”
“어....... 많이 오르기는 했네.”
모의고사에서 6등급, 100점 환산점수로 계산한다면 40점 언저리에서 놀던 세은은 60점을 넘기게 되었다. 20점 가까이 시험점수를 올린 기적같은 일이었다. 시간이 조금만 있었다면 세은이 한국대에 입학하는 것도 마냥 헛소리처럼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앞으로 수능까지 남은 시간은 110일 밖에 없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이제 60점대로 올라온 세은이 수능 볼 때까지 90점 중반까지 점수를 끌어올린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국대는 힘들겠지?”
“아니야.........”
세은이의 희망을 꺽고 싶지 않았던 한결은 세은의 말을 부정했다. 하지만 힘이 쭉 빠진 한결의 대답을 믿을 만큼 세은이 어리숙하진 않았다. 다시 한 번 한결엄마를 실망시켜야한다는 생각에 기운이 쪽 빠진 세은은 침대에 누워버렸다. 세은의 흐트러진 모습을 어머니한테 들킬 수 없었던 한결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잠궜다.
“그게 방문 잠그는 거였어?”
“몰랐어?”
“어....... 몰랐어.”
달라도 너무 다른 세은의 모습에 한결은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