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을 따라 오던 낯선 아저씨는 마치 대결을 신청하는 것처럼 골목길 앞에 서 있는 세은을 보게 되었다. 한결의 모습과 눈빛, 그리고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까지. 낯선 아저씨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한결이 말하려는 바가 뭔지 알 수 있었다. 동의 없이 쫓아오기는 했지만 한결과 맞설 생각이 10원어치도 없었던 낯선 아저씨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다시 한 번 말을 걸었다.
“학생, 오래 안 걸릴 테니까 우리 얘기 좀 하자. 학생한테 좋은 얘기가 될 수 있을 거야.”
“좋은 거요?”
“그래. 아주 좋은 거.”
현재 세은에게 좋은 거는 주피터를 데려오는 거밖에 없었다. 낯선 아저씨가 자신이 필요하는 걸 충족시켜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단에서부터 자신을 쫓아왔던 낯선 아저씨의 정체가 궁금했던 세은은 못이기는 척 쫓아갔다. 낯선 아저씨와 카페에 들어간 세은은 조각케이크와 파르페를 먹으며 그간 집에서, 학교에서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다. 세은이 먹을 거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낯선 아저씨의 시선은 잠시도 세은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동양인치고는 뚜렷한 이목구비와 큰 키, 마른 몸이 단점으로 보일 수도 있었지만, 반항적이고 신경질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에는 큰 몸보다는 차라리 마른 몸이 좋을 수 있었다. 게다가 새하얀 피부는 제임스딘을 연상시킬만큼 매력적이었다.
“학생, 배우해볼 생각 없어요?”
낯선 아저씨의 말에 세은은 코웃음치며 계속 케이크를 먹었다. 하지만 그 순간 티스푼에 비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세은이 세은의 몸 속에 있었다면 낯선 아저씨의 말은 순진한 학생을 꼬득여 한탕해 보려는 고약한 사기꾼으로 보였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세은은 한결의 몸에 있었다. 워낙 뛰어난 스펙 때문에 가려져있었지만, 한결은 스펙 못지 않게 외모도 뛰어난 편이었다. 공부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세은한테 어떻게 보면 배우를 하라는 낯선 아저씨의 제안은 하늘이 준 기회일 수도 있었다.
“없어요.”
하늘이 준 기회였지만 마음대로 한결의 진로를 결정할 수 없었던 세은은 낯선 아저씨에게 ‘NO.'라는 대답을 안겼다. 하지만 낯선 아저씨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세은을 설득했다. 그러면서 세은의 머릿속에 배우라는 직업군이 생겨나게 되었다. 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주부들도 하나, 둘씩 주방으로 들어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을 저녁 7시 30분. 세은엄마는 DMB가 나오는 스마트폰을 TV삼아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사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스스로 정해놓은 영업시간을 지켜야하는 건 세영엄마뿐만이 아니라, 모든 자영업자들이 가지고 있는 철칙이었다.
“저저, 죽일 년.”
캐릭터에 몰입하며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던 세은엄마는 드라마가 끝난 뒤에야 얼굴이 풀어졌다. 얼굴이 풀어지면서 현실로 돌아온 세은엄마의 눈에는 나무상자에 수북하게 쌓인 생선이 보였다. 신선도가 생명인 생선은 언제까지 팔 수 있는 상품이 아니었다. 신선도가 떨어지면 바로 버려야했다. 그때마다 생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세은엄마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이제 올라가서 쉬세요. 제가 가게 볼게요.”
드라마가 끝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한결이 내려왔다. 평소 세은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편안함이었다. 그래서 가게에 내려올 때나 수퍼에 갈 때, 독서실이나 학원에 갈 때에도 늘 슬리퍼에 트레이닝복만 입고 다녔었다. 하지만 옷차림도 매너라고 생각하던 한결은 그렇지 않았다. 매번 TPO에 맞는 옷차림을 할 수는 없었지만, 깔끔한 모습은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한결은 방에 있는 옷 중에서 가장 깔끔한 옷을 입고 나왔다. 물론 가게 보는 동안 틈틈이 공부까지 해야 했던 한결은 교과서 또한 잊지 않았다. 바뀌어도 너무 바뀐 세은의 모습에 더 이상 의심할 여력도 남아있지 않았던 세은엄마는 힘없이 2층으로 올라갔다. 세은엄마를 2층으로 올려 보낸 한결은 네온사인이 가장 잘 비치는 곳에 국사책을 펼쳐놓은 뒤, 장사와 공부를 병행했다.
“학생. 여기 고등어 4마리만 줘봐.”
“네.”
곁눈질로 교과서를 보고 있었지만, 한결은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손님의 주문대로 고등어를 손질해나갔다. 슉, 슉, 슉, 슉.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안절부절했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한결은 능숙하게 고등어를 손질해나갔다.
“생선 손질하는 거 보니까 시집 가면 사랑받겠어.”
엄밀히 이야기한다면 한결은 시집을 가는 게 아니라 장가를 가야하는 입장이었다. 손님의 이야기에 다시 한 번 원망스런 현실이 떠오른 한결은 씁슬한 미소를 지었다. 능숙하게 고등어 4마리를 판매한 한결은 다시 교과서로 시선을 옮겼다.
“아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요즘? 엄마한테 불만 있어?”
“아니요......”
낯선 아저씨와 면담하느라 7시쯤에나 집에 오게 된 세은은 수학선생님이 아닌 한결엄마를 먼저 보게 되었다. 가운을 입은 채로 한결을 기다리던 한결엄마는 눈에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한결은 하나뿐인 아들이자, 집안의 희망이었다. 하루에도 수 십 명씩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사람 대하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한결엄마는 한결을 소파에 앉은 뒤, 눈을 마주보며 이야기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있는 거야? 친구들이 괴롭히니?”
한결엄마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대하는 게 예의였다. 하지만 세은은 진심을 담아 이야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비밀로 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주피터가 영혼을 본래대로 돌려주기만 하면 바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주피터는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본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던 세은은 점점 지쳐갔다.
“그럼 사실대로 말씀드릴게요.”
“그래. 사실대로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더 이상 한결이 했던 일정을 소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 세은은 주피터를 만났던 일부터, 최근에 있었던 일까지 모조리 털어놓았다. 세은의 이야기를 듣던 한결엄마는 당황스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어떤 거에요?”
다음 날 아침, 학교에 가기 위해 한결엄마가 운전하는 차에 탄 세은이 도착한 곳은 정신과심리센터였다. 이정도 상황정도는 예상했었던 세은은 심리치료사가 설명해주는 대로 움직였다. 노는 건 아니었지만, 잠시나마 공부에 대한 부담없이 검사에 집중했던 세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밝아보였다. 해맑게 검사에 임하는 세은의 모습은 CCTV를 통해 원장실에 있는 한결엄마한테도 생중계되었다. 전문의의 소견 없이도 알 수 있을 만큼 세은의 행동 및 그에 따른 발달사항은 확연하게 눈에 보였다.
“지금까지 학생의 모습을 보면 선생님이 걱정하시던 부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신과전문의는 한결엄마도 알고 있는 부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한결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알게 된 한결엄마는 더 이상 원장실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의자에서 일어났지만, 계속된 한결의 이상행동에 지친 한결엄마는 제대로 서지 못하고 풀썩 쓰러져버렸다. 엠뷸란스를 타고 한결엄마와 함께 응급실로 향하던 세은의 눈에선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한결엄마의 모습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자신이 없었던 세은은 응급실에 들어가지 못한 채 복도에 있는 벤치에 앉아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밥 먹자.”
잠시 후, 응급실에서 나온 한결아빠는 기도하는 세은을 데리고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구내식당에 앉은 한결아빠는 별다른 말도 없이 식판을 비워갔다. 배는 고팠지만, 도저히 음식을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을 자신이 없었던 세은은 우두커니 식판만 바라봤다.
“뭐해? 안 먹고? 제사 지내?”
입맛은 없었지만, 한결아빠가 하시는 말씀을 무시할 수 없었던 세은은 억지로 숟가락을 들었다. 하루에 5끼씩 먹던 세은에게 오후 12시가 넘어서야 먹는 첫 끼는 호텔뷔페보다 맛있게 느껴졌다.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은 여전했지만, 본능을 숨길 수 없었던 세은은 식판 위에 올려져있던 음식물을 깔끔하게 비운 뒤에야, 숟가락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 세은은 한결아빠와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마셔.”
세은이 벤치에 앉아있는 사이, 한결아빠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빼와 세은에게 건넸다. 음료수를 마실 상황은 아니었지만 허겁지겁 식판을 비우면서 속이 더부룩했던 세은은 빠른 속도로 음료수도 마셔나갔다. 세은이 잘 먹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던 한결아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부하는 거 많이 힘들지?”
“네........”
한결엄마가 입원한 상황에서 더 이상 어떤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세은은 솔직히 대답했다. (솔직히 대답했다고 해서 어젯밤 한결엄마를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게 만들었던 주피터에 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아빠는 결이가 의사되겠다고 했을 때 걱정이 많았었어. 의사라는 직업은 단순하게 공부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그리고 주위에서 보는 것만큼 편한 직업도 아니고. 엄마한테는 아빠가 잘 얘기해볼 테니까 공부하기 힘들면 다른 일을 한 번 생각해봐.”
한결아빠의 말에 세은의 눈은 500원짜리 동전 만큼 커지게 되었다. 공부에 대한 부담만 줄어든다면 모든 학생들이 바라는 최고의 환경이 될 테니까.
“결이 병원에 있다니까 수업 끝나고 시간 되는 사람은 가보도록 해.”
한결이 병원에 있다는 말에 미나와 한결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