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저 의대에 가도 되나요?”
“뭐?”
“지금 말한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궁금해서요.”
“간다고만 하면 의대가 아니라, 의대할아버지도 보내주지.”
뜬금없는 의대이야기에 얼척이 없었던 세은엄마는 비아냥거리듯이 대답했다. 농담이었다면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게 서로에게 가장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13년 넘게 의사라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던 한결에게 의대입학은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큰 선택이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전 현실적으로 제가 의대에 들어가면 다닐 수 있는지를 묻는 거에요. 의대학비가 1학기에 600~700정도 하고, 책값까지 더하면 800정도, 여기에 생활비까지 더 하면 1학기에 1000만원 정도고, 1년이면 2000만원 정도 생각하셔야 돼요. 그리고 6년 다녀야 되니까 학비로만 최소 1억 2천 정도 생각하셔야 돼요. 저희 집이 이걸 감당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니까 어머니도 진지하게 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한 번은 비아냥거리며 넘겼지만, 계속 의대에 대해 물어보는 세은에게 언제까지 농담조로 이이기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세은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었다. 말로만 의대타령하고 예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였다면 면박을 줬겠지만, 단 1%라도 ‘진짜 의대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세은엄마는 진지하게 학비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1년에 2000이면 좀 그렇기는 하네. 근데 의대는 학비가 그렇게 비싸니?”
“졸업한 뒤로 바로 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전문 의료진을 양성하는 게 목표다보니까 다른 과들에 비해서는 조금 비싼 편이긴 하죠. 아무튼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저기 세은아?”
“네.”
“너 내 딸 세은이 맞는 거지?”
뜬금없는 세은엄마의 질문에 한결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세은엄마의 질문에 한결은 사실을 말할 수도, 거짓말을 할 수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한다고 해서 듣는 사람이 그 말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보장은 없었다. 여러가지 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결국 한결이 결정한 건 타인이 아닌, 자신의 희생이었다.
“그럼요. 이제 내년부터는 대학생이니까 정신 좀 차리자고 생각한 것 뿐이에요.”
“그래도 변할 거면 한 번에 변해 이년아. 너무 변하니까 헷갈리잖아.”
“아, 알았어. 알았어.”
동갑내기하고만 편하게 이야기할 뿐 1살이라도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에게는 깍듯하게 대했던 한결한테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게 반말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세은엄마의 의심을 덜어줘야 했던 한결은 어색하게나마 반말로 대꾸한 뒤 방으로 올라갔다. 방에 올라간 한결은 교과서 대신 연습장을 펼쳤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새 페이지를 펼친 한결은 크게 의사라는 단어와 함께 물음표를 적었다.
“의사가 안 된다고 하면 뭘 해야 되지?”
의사는 13년 넘게 한결이 가지고 온 꿈이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의사였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도 의사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의사로 사는 것이 적성에 맞는 건지는 생각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시 본래 몸으로 돌아간다면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은 아주 쓰잘데기 없는 고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는 건 한결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기대해야하는 불확실하고, 믿음직하지 못한 일이었다. 타인의존적인 성향이 거의 없었던 한결에게 주피터만 믿고 기다리는 건 시간낭비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의대에 가지 못했을 경우, 계속 세은의 몸으로 살아야할 경우를 생각하며 플랜 B와 C를 떠올리며 만약의 상황에 대비했다.
“결아. 도대체 왜 그러는 거니?”
“죄송해요....”
한결은 차분하게 만일의 상황에 대비했지만, 세은은 그렇지 못했다. 공부, 놀이, 몸무게, 심지어 머리스타일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던 세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꽉 짜여진 스케줄에 맞춰 산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다. 세은은 얼른 본래 몸으로 돌아가길 꿈꿨다. 하지만 며칠 전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공간에서 주피터를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주피터의 그림자도 구경하지 못했던 세은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저기 한 번 가볼까?”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세은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골목길에 있는 “뉴욕선녀보살.”이라는 간판을 보게 되었다. 예전이었다면 비웃고 말았겠지만, 세은에게 실수한 저승사자는 다름 아닌 주피터였다. 국적은 다르지만 뉴욕선녀보살이라면 프랑스국적인 주피터를 불러줄 수 있다고 생각한 세은은 돈 1만원을 들고 점집으로 들어갔다. 점집에는 자유의 여신상과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 같은 뉴욕을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모형으로 있었으며, 전체적인 분위기도 동양스럽다기보다는 서양스러웠다. 인테리어를 확인하며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긴 세은은 조심스럽게 주피터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저한테 주피터라고 하는 프랑스 국적의 귀신이 붙었거든요? 그 친구 좀 불러주세요.”
세은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지만, 점쟁이의 표정은 굳어져갔다. 그러자 세은은 준비했던 1만원권 지폐를 점쟁이에게 건네면서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제가 아직은 학생이라서 이것밖에 준비 못했는데, 나중에 커서 돈 벌면 더 갖다드릴게요. 제발 주피터 좀 불러주세요. 선녀님.”
돈까지 꺼내는 걸 보면 세은이 장난치는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자신한테 귀신이 씌였다는 둥, 귀신 이름이 주피터라는 둥, 게다가 귀신의 국적이 프랑스라는 해괴망측한 소리를 하는 세은이 믿음직스럽게 보이진 않았다. 점쟁이가 뉴욕선녀보살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전에 들어와 일하던 세입자가 뉴욕선녀보살이었기 때문이었다. 계룡산에서 신내림을 받았던 점쟁이는 뉴욕은커녕 해외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었다. 양심대로 한다면 세은을 돌려보내야했지만, 눈 앞에 보이는 1만원에 마음이 혹한 점쟁이는 눈을 감고 시낭송하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귀신이 어떻게 생겼는데?”
“전형적인 외국인처럼 생겼어요. 할리우드배우 중에 디카프리오 아시죠? 어렸을 때 디카프리오처럼 생겼어요.”
“잘 생겼네, 그럼?”
“네. 생긴 건 잘 생겼어요. 애가 멍청해서 그렇지.”
세은의 말에 점쟁이는 절로 입을 벌렸다. 중증이었다. 점집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지만 세은 같은 이상한 경우는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더 이상 세은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점쟁이는 아무렇게나 쌀을 던졌다.
‘어? 이게 뭐지?’
아무렇게나 던진 쌀은 정확히 사자, 죽은 자를 가리켰다. 자신의 점괘를 믿을 수 없었던 점쟁이는 다시 한 번 쌀을 던졌다. 하지만 형태만 달라졌을 뿐, 점괘가 이야기하는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뭐가 좀 나왔어요?”
점쟁이가 계속 쌀을 던지자 세은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자라고 하기에는 세은이 너무 혈기왕성했고, 운도 좋았다. 점괘를 받았지만, 점괘를 믿을 수 없었던 점쟁이는 한숨만 내쉬었다.
“아직 안 나왔어요?”
“아니, 점괘는 나왔는데 죽은 사람이라고 나와서......”
언제까지 숨길 수 없었던 점쟁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점괘에 대해 이야기했다.
“선녀님, 진짜 용하시네요. 저 한 번 죽었어요. 근데 다시 살아난 거에요.”
“예끼! 나이도 어린 놈이 어디서 어른을 놀려!”
“진짜에요! 제가 왜 여기 와서 거짓말을 하겠어요.”
“훠이~ 훠이~”
자신을 사자라고 하는 이상한 고객과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던 점쟁이는 쌀을 뿌리면서 세은을 내쫓았다. 주피터에 대한 단서를 알아내진 못했지만 사주에 자신이 망자로 나온다는 걸 알게 된 세은은 좀 더 효과적으로 주피터를 부르기 위해 어디론가 향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
점집에서 쫓겨난 세은이 찾은 건 교회였다. 예배당에 들어간 세은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간절하게 주피터를 찾았다. 하지만 주피터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교회에서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세은은 성당과 절을 다니며 절대신께 소원을 빌었지만, 이뤄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어디에서도 응답을 듣지 못한 세은은 집으로 가야했다. 그리고 5시 30분에 시작하는 수학과외를 시작으로 12시까지 빡빡한 과외일정을 소화해야했다. 그 뒤에는 새벽 3시까지 한결엄마와 함께 새벽타율학습까지 마쳐야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린 세은은 좀처럼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저기, 학생 얘기 좀 할래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계단손잡이에 걸터앉아있던 세은에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주피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은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세은을 부른 건 주피터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아저씨였다. 나쁜 사람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곤란에 처한 세은을 도와줄 사람으로 보이진 않았다. 아저씨의 정체를 그저 그런 ‘도를 아십니까?’ 정도로 생각한 세은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손잡이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낯선 아저씨도 한결을 따라 움직였다. 건널목에서도, 계단에서도, 그리고 아파트로 향하는 골목에서도 낯선 아저씨는 마치 그림자라도 된 것처럼 세은을 쫓아다녔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았던 세은은 아파트로 나가기 전 마지막 골목에 우두커니 서서 낯선 아저씨가 오길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