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아, 지금 자는 거니?”
“네?”
“공부에도 다 때가 있는 거야. 지금 아니면 언제 수능공부 하느라 밤새겠어? 이제 몇 달 안 남았으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달려보자.”
세은의 고개가 좌우로 갸웃거리자 한결엄마는 쏜살같이 명언을 날렸다. 말투는 굉장히 다정했지만, 그 안에는 반드시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강압이 들어있었다. 한결한테 괜한 민폐를 끼칠 수 없었던 세은은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많이 꼬집히면서 살구색이었던 살이 파랗게 멍들어갈 때쯤, 세은은 잠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잠기운이 날아가버린 세은은 한결이 늘 그랬던 것처럼 문제집에 집중했다. 문제집에 집중하자 기껏 쫓아내버린 잠기운이 다시 스멀스멀 세은에게 찾아왔다. 더 이상 한결의 허벅지에 멍자국을 남길 수 없었던 세은은 공부하는 척하면서 연습장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결이네 어머니는 언제 주무시는 거지?’
10장 넘게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에도 지친 세은은 원망스런 눈빛으로 한결엄마를 쳐다봤다. 시계는 새벽 2시를 넘어, 2시 20분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한결엄마는 좀처럼 잘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12시가 되기 전에 온가족이 잠이 드는 집안에 살던 세은한테 새벽 2시가 넘을 때까지 자지 않는 한결엄마는 수퍼우먼처럼 느껴졌다.
“근데 어머니는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뭐하시는 거에요?”
평소 어머니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지만, 한결엄마의 포스에 눌린 세은은 저절로 어머니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세은이 좀처럼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자 한결엄마는 아예 책을 덮어놓고 돌려 앉으며 말했다.
“무슨 공부하긴 의학공부하는 거지. 다음 주 학회 때 엄마가 발표할 차례인데, 망신당할 수 없잖아.”
“공부에는 때가 있는 거라면서요?”
“그건 수능공부 이야기한 거였지. 앞으로 의사가 되고, 의사사회에서 뒤처지지 않으려면 계속 공부해야 돼. 그래야 원로들도 좋게 봐주고, 후배들한테도 존경 받는 의사가 될 수 있어.”
맞는 말이었다. 한결엄마가 하는 말은 교과서에 인용해도 될 정도로 도덕적이고 올바른 말이었다. 하지만 세은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한결엄마가 하는 말은 지금껏 모범적이고, 올바르게 자라온 한결 같은 학생한테나 어울리는 말이었다. 지금껏 평범하게, 혹은 살고 싶은 대로 살아왔던 세은에게 어울리는 말은 절대 아니었다. 한결엄마의 라이프스토리를 듣던 세은은 2시 45분에나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세은은 바로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늘 같은 생활을 며칠, 운 없으면 몇 달, 몇 년 동안이나 해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산같이 쌓인 세은은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공부하니?”
“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아버지.”
“어........ 그래........ 근데 안 자? 시간도 늦었는데.”
“오늘 가게 보느라 공부를 늦게 시작해서 4시에 자려고요.”
한결의 말에 세은아빠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한결이 하는 말은 몇 줄 위에서 한결엄마가 했던 것처럼 교과서에 인용해도 좋을 정도로 도덕적이고 올바른 말이었다. 하지만 세은이네 집과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으로 여태껏 삶을 꾸려왔던 세은아빠에게 한결의 말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혹시 용돈 필요해서 그래?”
“아니요.”
좀처럼 의심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세은아빠에게 한결은 환한 미소로 답했다. 외모는 그대로지만 너무 변해버린 세은을 보며 세은아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방에서 나갔다. 방에서 나간 세은아빠는 생각할 게 있는 듯 안방이 아닌, 거실소파로 향했다. 세은아빠가 소파에 앉자 세은엄마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봐도 이상하죠?”
“공부 안한다고 잔소리했어?”“하려면 진작에 했지. 내가 왜 이제 와서 그런 소릴 하겠어요.”
세은엄마의 말에 세은아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세은이 갑자기 변한 이유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일어나셨어요.”
“너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네?”
“세은아. 제발 하던 대로 해. 너 때문에 닭살 돋아서 못살겠다, 진짜.”
주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인사 먼저하는 한결을 보며 세은엄마는 제발 돌아와달라며 부탁했다. 지금껏 당연하게 행동했던 것들을 특별하게 여기는 세은부모님의 반응을 한결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정형화된 틀에 갇혀있지 않고 살아있는 표정을 보여주는 부모님의 모습이 안 좋게 보이진 않았다.
“우웩~”
세안 후 매일 아침 한결이 먹던 검은색 물을 마시던 세은은 자신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나왔다. 검은색 물은 주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보약도 아니었다. 맛으로 표현한다면 초등학교 때 실수로 먹은 벼루에 있던 먹물 같았고, 냄새로 표현한다면 장마철에 하수도가 역류하면서 수챗구멍에서 풍기는 매캐한 냄새와 같았다. 도지히 검은색 물을 마실 수 없을 것 같았던 세은은 입을 가린 채 주방으로 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결엄마가 손을 잡으면서 세은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잘 먹었으면서 왜 그래? 조금만 더 먹자.”
“잠깐만요. 입에 걸리는 게 있어요. 그것만 빼고 먹을게요.”
“엄마가 너한테 나쁜 걸 주겠니? 나쁜 거 아니니까 다 먹고 물 마시자, 자~”
집이었다면 소파를 가운데 두고 추격전을 벌였겠지만 여긴 세은의 집이 아니었다. 바닥엔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이 깔려있었고, 가죽소파에는 그 흔한 주름 하나 잡혀있지 않았다. 게다가 소파 주변에는 가격도, 용도도 알 수 없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용품이 놓여있었다. 괜히 소란을 피웠다간 몇 십, 몇 백 만원이 날라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은은 눈 딱 감고 한결엄마가 주는 검은색 물을 전부 마셔버렸다. 아침부터 한결엄마와 한바탕 전쟁을 치른 세은은 쉬지도 않고 집에서 뛰쳐나왔다. 그러면서 자유를 꿈꿨다.
“결이야~ 안녕~”
세은은 쉴 시간이 필요했지만, 애석하게도 운명은 쉴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파트에서 나온 한결은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는 미나를 보게 되었다. 미나와 농담 따먹기나 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먼저 관심을 보인 사람에게 박하게 대할 정도로 모나지 않았던 세은은 어쩔 수 없이 미나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미나는 학교로 가는 동안 잠시도 입을 쉬지 않았다.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도 않고, 하고 싶은 말들을 하는 미나는 한결을 지치게 만들었다.
‘결이가 쉽게 사는 게 아니었구나.......’
미나와 함께 학교로 오던 중 미나친구들까지 만나면서 여자들에게 기를 쫄딱 빼앗겨버린 한결은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에 엎어져버렸다. 그러면서 반사적으로 앞에서 2째 줄에 앉고 있을 한결을 찾았다. 한결은 허리를 곧게 편 채 공부하는 중이었다. 겉모습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지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한결은 어제보다 50%정도 예뻐 보였다. 그러면서 사람을 만드는 건 환경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깨닫게 되었다.
“나로 사는 건 벌써 포기한 거야?”
“포기한 건 아니고 너에 맞춰 산다고 해도 해야 되는 건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역시 너는 타고난 범생이구나. 난 걱정돼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수능도 걱정이고, 다음 달 모의고사도 걱정이고........ 나 진짜 어떻게 해야 돼?”
기도실에서 세은의 이야기를 듣던 한결은 긴 한숨만 내쉬었다. 주피터가 와서 영혼을 바꿔주지 않는 이상 한결이 세은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진짜 이대로 계속 살아야 된다면 어떻게 해야 되지, 나?’
기도실에서 세은과 나눴던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던 한결은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한결은 지금까지 부모님들이 만들어주는 보장된 길만을 걸어왔다. 그래서 남들보다 쉽게 최고가 될 수 있었다. 물론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부담감은 언제나 성과로 돌아오며 한결을 웃게 만들어줬다. 하지만 세은의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상황은 180도 바뀔 수 밖에 없었다. 공부가 습관이 되면서 당장 성적이 떨어질 리는 없었지만, 더 이상 부모님이 만들어주는 길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한결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파리채로 생선에 붙으려는 파리를 내쫓는 세은엄마에게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