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런 세은의 행동에 당황한 제레미는 알 수 없는 영어만 나불거리며 풀어달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하지만 제레미가 주피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던 세은은 풀어줄 생각이 10원 어치도 없었다. 세은의 과격한 행동에 어쩔 줄 몰라하던 아주머니는 결심한 듯 세은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친구머리를 그렇게 잡고 있으면 안 되죠. 말로 하세요, 한결학생. ”
분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세은에게 맛있는 음식을 선사해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사람한테 미움 받을 용기가 없었던 세은은 어쩔 수 없이 제레미의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식탁바닥에서 머리를 떼게 된 제레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닮아있었다. 머리스타일하며, 눈, 코, 그리고, 턱선까지. 제레미는 마치 쌍둥이형제라고 할 만큼 주피터와 닮아있었다. 풀어준 뒤에도 제레미를 향해 날리는 세은의 날선 눈빛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러자 제레미는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진짜 주피터인지 확인한 것도 아니잖아.”
제레미는 억울한 듯이 과장된 행동과 함께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은은 제레미의 행동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이 분석한 상황들을 차분하게 털어놓았다.
“그래. 네가 주피터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나한테 얼굴을 들이밀었을 때 눈동자에 비쳤던 건 내 모습이 아니었어. 게다가 나랑 아주머니는 조명을 받으면서 그림자가 생겨났는데, 너만 그림자가 없잖아. 이건 어떻게 설명할건데? 설명할 수 있다면 주피터가 아니라는 네 말을 믿어줄게.”
“예리하네.”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잡혀버린 제레미는 자신이 주피터라는 걸 인정하는 수 밖에 없었다. 주피터를 보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은 바람에 감정이 앞섰지만, 주피터가 다시 나타났다는 건 본래 몸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조금 더 한결이 사는 법을 느끼고 싶었지만 다가오는 모의고사와 수능이 부담됐던 세은한테는 지금 본래 몸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온 세은은 조용히 방문을 잠궜다. 세은이 방문을 잠그면서 더 이상 제레미의 모습으로 있을 필요가 없었던 주피터는 본래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본래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찾아온 거야?”
“그럼요. 좋은 소식 없이 제가 세은씨를 찾아왔겠어요?”
세은의 말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한 주피터는 다시 명부를 꺼냈다. 세은도 볼 수 있도록 손가락으로 명부를 돌린 주피터는 웃으며 말했다.
“세로 읽기 나도 잘해요, 이제.”
지난번에 배웠던 걸 잊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 주피터는 명부를 확인했다. 주피터의 행동이 얄미웠지만 한 시라도 빨리 본래 몸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세은은 가만히 기다렸다.
“어? 없어졌네?”
여유롭게 명부를 확인하던 주피터는 당황한 듯 빠르게 종이를 넘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애써 참고 있던 세은의 인내심은 뚝하니 끊어져버렸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세은은 뚜벅뚜벅 주피터를 향해 걸어갔다. 세은이 다가오는 걸 보면서 주피터는 더욱 빠르게 손을 움직였지만, 그런다고 없던 내용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주피터 앞에 도착한 세은은 바로 헤드락을 걸었다. 어릴 때 곧잘 남자아이들과 레슬링을 즐겼던 세은은 대충 팔로 머리만 감는 게 아니라 엄지손가락관절로 관자놀이를 누르는 정교함을 보였다.
“뭐하는 짓이냐!”
주피터가 고통에 발버둥 치고 있을 때,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목소리에 압도당한 세은은 주피터의 목을 잡고 있던 팔을 풀며 뒤로 물러섰다. 세은이 주피터와 완전히 떨어지자 주피터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저승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피터는 저승사자지만 이웃집 외국인 같은 친근함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나타난 저승사자는 그렇지 않았다. 이번 저승사자는 세은을 압도하는 외모와 포스를 지니고 있었다. 저승사자가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한 세은은 절로 눈을 돌렸다. 세은한테서 기고만장했던 모습이 사라지자 저승사자는 그때서야 입을 열었다.
“네 얘기는 들었다.”
압도적인 모습과 달리 저승사자는 세은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러면서 세은은 조심스럽게나마 저승사자에게 말을 걸 수 있었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건가요?”
“그럼 있지.”
“뭔가요, 그게?”
“죽으면 된다.”
“네?”
저승사자의 말에 깜짝 놀란 세은은 농담이길 바랬다. 하지만 남자의 목소리나 표정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태연하게 죽어야한다는 말을 꺼낸 저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말들을 이어갔다.
“생명이 귀하냐?”
“당연하죠.”“네 생명만 귀하냐?”
허를 찌르는 저승사자의 말에 세은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약육강식에 의해 먹고, 먹히는 관계에 대해선 관여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외에 생명을 함부로 한 적이 너는 한 번도 없느냐? 아니, 누군가의 생살을 먹을 때라도 너는 한 번이라도 누군가에겐 생명이었다는 걸 알고 먹었느냐?”
세은은 고기라면 종류를 묻기보다 젓가락이 먼저 움직이는 본능으로 움직이는 육식동물이었다. 그만큼 고기를 좋아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가끔씩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징그럽다는 이유로 생명을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적도 꽤 많이 있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되짚어보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힌 세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급기야 몇 초 지나면서 세은의 눈가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알아보기는 하겠다만 크게 기대하진 말거라. 원래 운명이란 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저승사자의 말을 인정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세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은이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자 저승사자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사라졌다. 저승사자는 사라졌지만, 세은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던 주피터는 그러지 못했다. 저승사자가 사라진 뒤에도 방에 남아있던 주피터는 조심스레 세은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괜히 나 때문에.......”
“아니야.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거 맞아. 그러니까 나 때문에 괜히 고생하지 않아도 돼.”
“진짜?”
“응.”
세은은 주피터에게 부처님보다 자비로운 미소를 보였다. 미소의 진의가 의심스러웠지만, 괜찮다고 하는 세은을 상대로 주피터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아~ 결아~”
자신이 한결임을 뒤늦게 깨달은 세은은 이름 모를 강을 건너,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강을 건너 육지에 도착한 세은은 낯선 아줌마를 보게 되었다. 생전 처음 보는 아줌마였지만, 이목구비까지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엄마한테 안녕하세요가 뭐야? 자면서 헤매던데 악몽꿨어?”
“네.......”
“어떤 꿈이었는데?”
아직 한결엄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던 세은은 엉겁결에 제레미가 주피터로 변한 것부터, 새로운 저승사자를 만난 것까지 몽땅 털어놓았다. 웃으면서 세은의 이야기에 집중하던 한결엄마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져갔다. 하지만 말하면서 자신의 기분에 심취한 세은에게 한결엄마의 표정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10여분에 걸쳐 꿈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 세은은 그 어느 때보다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저승사자도 나오고, 굉장히 무서운 꿈이었네. 그럼 이제 공부하자.”
세은이 저승사자와 나눈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저녁을 먹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이 들었던 세은은 자신이 저승사자를 만난 게 꿈인지, 아니면 현실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다. 세은이 저승사자와 만난 일을 과장되게 부풀리면서 말한 이유는 악몽을 꿨다는 이유로 다시 자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한결엄마는 한치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 미치겠네. 도대체 언제 자는 거야?’
안방으론 들어갈 생각도 하지 않고, 옆자리에서 같이 공부하는 한결엄마를 보며 세은은 꿈에서나마 ‘괜찮다.’고 말한 자신의 행동이 후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