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와 칼, 그리고 생선을 본 한결은 어떻게 행동해야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한결은 지금까지 조리가 된 생선만 봤었다. 간혹 가다 냉장고에서 조리되어있지 않은 생선을 보기도 했지만, 그건 한결의 몫이 아니었다. 엄마, 혹은 일하시는 아주머니 몫이었다. 그래서 눈으로 ‘생선이 있다.’는 것만 확인할 뿐, 생선이 손질되어있는 상태 따위는 눈여겨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이 아닌, 세은이 된 지금, 게다가 노량진수산시장에서나 볼법한 앞치마를 한 지금, 한결은 눈 앞에 있는 생선을 손질해야만 했다. 난감한 상황이었지만 기댈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잘 손질해드릴게요.”
친절한 립서비스로 손님을 안심시킨 한결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뒤 고등어손질하는 법을 검색했다. 인터넷엔 친절하게도 고등어손질하는 법이 글과 사진으로 게재되어있었다. 방법을 찾아낸 한결은 자신감 넘치는 눈빛으로 텍스트와 사진을 함께 읽어나갔다.
‘아가미를 양쪽으로 빌려준 다음에, 머리 끝부터 항문까지 쭉 갈라주면 되는구나. 그 뒤엔 내장제거하면 되고.’
지문으로 가득 찬 언어관련 문제집을 이틀에 한 권씩 풀어나가던 한결에게 글과 함께 사진까지 개제되어있는 게시글은 보는 순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웠다. 하지만 쉬운 건 딱 이론까지였다. 마치 원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고등어와 눈이 마주친 한결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해보자! 의사가 될 몸인데 고등어 해체도 못한다면 말도 안 되는 거지. 그게!’
장래희망란에 10년 넘게 의사라고 적었으면서 고등어 해체를 놓고 망설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진 한결은 작심한 듯 도마에 꽂혀있던 칼을 뽑았다. 그리고 죽일 듯한 눈빛으로 고등어를 노려봤다. 하지만 이미 죽어있는 고등어는 한결의 눈빛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고등어와 의미없는 기싸움을 벌이던 한결은 거칠게 아가미를 벌렸다. 아가미가 벌어지면서 살까지 뜯어진 고등어는 빨간 피를 보였다. 깜짝 놀란 한결은 칼도 내팽개친 채 도마 뒤로 2~3걸음 물러났다. 도마에서 멀어진 뒤에도 한결은 놀란 심장을 좀처럼 진정시키지 못했다.
“내가 이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나?”
고등어 하나 해체하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한결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의사가 된다는 건 생명을 살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사람을 살린다는 일은 결코 낭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사람의 피와 뼈를 봐야 했으며, 환자를 살리지 못한다면 싸늘하게 식어가는 환자의 모습도 봐야했다. 부모님이 의사이기 때문에, 성적이 의대에 갈 수 있을 정도로 좋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절대 아니었다. 고등어를 해체하면서 뜬금없이 자아성찰까지 하게 된 한결의 기분은 땅 속으로 한없이 떨어져갔다.
“죄송해요. 오늘 생선은 못 팔 것 같아요.”
고등어해체에 실패한 한결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손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손님은 한결의 사과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손님이 화났다고 생각한 한결은 다시 한 번 꾸벅 고개 숙이며 미안한 마음을 나타냈다.
“어? 어디 가셨지?”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한결은 그때서야 손님이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바쁘게 걸어 다니는 행인들의 숨소리밖에 남지 않은 길거리를 보게 되었다.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저마다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결은 수능이라는 목표지점을 향해 전력질주 했었다. 전력질주하면서 남들보다 빠르게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는 있겠지만, 자신에 대해, 주위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새삼스레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된 한결은 공부할 생각도, 장사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늘은 몸이 안 좋은 가봐?”
“네....... 학교에서 무리했나봐요.”
“학교수업도 중요하지만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해선 선생님하고 수업하는 거에 좀 더 집중해야 되는 거 알고 있지?”
“네. 죄송해요. 오늘만 쉴게요........”
사립 명문대 출신에, 외모까지 뛰어난 수학선생님을 처음 봤을 때만 해도 세은은 학구열에 불타올랐었다. 하지만 학구열이 유지된 시간은 고작 10초였다. 학교에는 다양한 학생이 존재했다. 수학을 잘하는 친구부터, 못하는 친구까지. 개개인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학교선생님들은 수준별 교육이 아닌, 표준형 교육으로 반 전체의 지적능력을 향상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과외는 그렇지 않았다. 애초부터 한결만을 보고 온 과외선생님은 굳이 수준 낮은 문제에 시간을 소비할 이유가 없었다. 4점, 4점, 4점, 4점, 4점.......... 3점짜리 문제 하나 없이 4점짜리 문제만 푸는 바람에 세은은 숨쉬기는 것조차 힘들었다.
“한결학생, 식사하세요.”
“네.....”
어영부영 수학과외를 마친 세은은 터덜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수학선생님에게 기를 빨려버린 세은은 찬 물에 밥이나 한 사발 말아먹은 뒤, 잘 생각이었다. 하지만 식탁 위에 놓여있는 음식들을 본 세은은 바로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갈비찜, 갈비탕, 대하찜, 해물탕까지 제삿날에도 쉽게 접하지 못하는 음식들을 영접하게 된 세은은 허겁지겁 식탁 위에 놓인 음식들을 해치워갔다. 게걸스럽게 보일 수도 있었지만 세은의 모습이 마냥 이뻐보였던 아주머니는 흐뭇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참 잘 드시네요.”
“사실 과외할 때부터 배고팠거든요.”
“앞으로는 배고프면 저한테 미리 말씀해주세요. 선생님이랑 같이 드실 수 있는 간식 정도는 해드릴게요.”
집에서 밥 먹는 돼지, 하마 취급 받던 세은은 오늘 처음 보는 아주머니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마음 같아선 나중에 영혼이 바뀐다면 아주머니까지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안형편상 그럴 수 없다는 건 누구보다 세은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에 감동받은 세은은 말 한 마디가 가지는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Hi~ bro.”
감상에 빠지는 세은의 모습이 꼴보기 싫었던 걸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며 밥 먹고 있는 세은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바로 고개를 돌리며 따끔하게 한 마디해주고 싶었지만, 세은에게 말을 건 누군가는 한국말이 아닌 영어를 사용했었다. 그렇다는 건 지금 식탁 옆에서 세은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제레미일 확률이 99.9%이상이라는 말이었다. 수학도 수학이지만, 원어민에게서 영어를 배울 만한 실력도, 마음가짐도 되지 않았던 세은은 못 들은 척하고 계속 밥만 먹었다.
“Hey, What is it? Are you angry?"
세은이 계속 무시하자 제레미는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회화로 세은을 유혹했다. 하지만 세은은 쇄국정책 수호자였다. 제레미가 하는 말을 알아들었지만, 굳이 영어로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밥만 먹었다. 세은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제레미는 가방을 내려놓은 뒤, 장난스레 고개를 푹 숙인 채 밥만 먹고 있는 세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Fuxx!"
제레미의 얼굴을 본 세은은 스스로 쇄국정책을 깨고 강력한 한 방을 날렸다. 당황한 제레미는 잽싸게 얼굴을 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숟가락을 쥐고 있던 손이 날아와 제레미의 머리를 꽉 눌러버렸다. 당황한 제레미는 풀어달라는 제스쳐를 취했지만, 세은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릇에 놓여있던 마지막 대하 한 마리까지 밥 위에 올려놓은 세은은 제레미에게만 들릴 만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 주피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