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은아,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어, 어.......”
원어민인 제레미와의 프리토킹에 정신을 빼앗긴 세은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대놓고 못 들었다고 할 만큼 무례하지 않았던 세은은 형식적인 대답만 던진 채 딴 생각에 빠졌다. 귀는 열려있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던 세은은 유체이탈과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참에 영혼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간다면 좋겠지만, 세은이 느낀 건 진짜 유체이탈이 아니었다. 유체이탈 같은 느낌일 뿐이었다. 하루에 2시간 이상 공부해본 적이 거의 없었던 세은에게는 새벽 2시까지 책상 앞에 앉아있어야 한다는 것만으로도 고문이었다.
“난 집에 가서 뭐해야 돼?”
“우리 집은 공부하라고 잔소리는 안하니까 너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티비보고 싶으면 티비보고, 자고 싶으면 자고.”
“진짜?”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했던 한결에게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해결할 수 있는 세은이네 집은 소설 속에나 나오는 유토피아처럼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집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듣고 싶었지만, 잠시 후면 수학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올 시간이었다. 첫 수업부터 선생님에게 찍혀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한결은 궁금증을 꾹 참고 집으로 향했다.
“여기가 니네 집이야?”
“어. 2003호로 들어가면 돼.”
세은은 한결을 따라 대단위 아파트 단지에 들어갔다. 오래된 주택에 살고 있는 세은에게 한결은 로망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한결이 집이라고 알려준 곳은 마치 1층이 1개 호일만큼 커보였다. 집을 보면서 새삼 한결과 자신의 차이가 느껴진 세은은 혼자 집으로 들어간다는 게 두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한결의 모습을 하고 있는 건 세은이었다. 좋아서 이런 꼴이 된 건 아니었지만, 이런 모습이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누가 져야하는지는 세은도 잘 알고 있었다. 집 호수와 비밀번호를 적은 세은은 한결에게 자신의 집을 알려주기 위해 시장으로 향했다.
“집에 간다면서 어디 가는 거야?”
“따라오면 알아.”
집을 알려준다면서 시장으로 향하는 세은의 속을 알 수 없었던 한결은 불안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세은은 집으로 가고 있는 게 맞았다. 지금까지 책에 갇힌 것처럼 전형적인 삶을 살았던 한결이었기 때문에 그 외의 삶에 대해 인지하는 못하는 거였다. 상인과 행인들에게 몇 번씩이나 어깨를 부딪치며 시장 안으로 들어갔던 한결은 한 가운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야.”
“어?”
세은의 말에 놀란 한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엔 노점상만 보일 뿐, 집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태의 가옥은 보이지 않았다. 한결이 집을 찾지 못하자 세은은 뒷목을 잡더니 친절하게 집이 있는 위치를 알려줬다. 세은의 안내를 받은 뒤에야 한결은 노점상들 사이에 숨어있는 2층짜리 건물을 보게 되었다.
“2층으로 올라가면 방은 2개 밖에 없으니까 내 방 찾기는 쉬울 거야.”
“그래.......”
말을 마친 세은은 이제 한결네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겉모습에 압도당한 세은은 도저히 혼자서 그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건 한결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전형적인 주거공간에만 살았던 한결에게, 상업공간과 섞인 세은이네 집으로 들어가는 건 몬스터들이 득실득실한 던전에 혼자 들어가는 것만큼 막막하게 느껴졌다. 서로 다른 이유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던 한결과 세은 앞에 낮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19년 동안 들어왔던 목소리에 세은은 저절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오늘 아침과 똑같은 표정의 엄마를 보게 되었다. 엄마를 보면서 마음의 안정을 얻은 세은은 씩 웃어보였다. 하지만 낯선 학생의 미소가 달갑지 않았던 세은엄마는 재빨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서야 자신이 가야할 곳을 알게 된 세은은 힘없이 아파트단지로 발걸음을 돌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발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마음이 아팠던 한결은 뒤에서 세은을 안아줬다.
“저승사자가 오면 다 잘 될 거니까 그때까지만 잘 버텨줘.”
“알았어........ 내일 보자.”
한결과의 스킨쉽에 입이 찢어질 법도 했지만 머릿속엔 제레미 밖에 없었던 세은은 이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세은이 집으로 돌아가면서 한결도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친구네 집에 놀러가는 건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결은 놀러가는 게 아니었다. 알맹이만 한결일 뿐, 겉모습은 세은이었던 한결은 이 집에 살기 위해 가는 거였다. 지금까지 학생으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철저한 선행학습과 함께 차분하고 끈기 있는 성격이 조합된 결과일 뿐이었다. 앞으로는 모든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해결해 나가야했던 한결은 지금 상황이 그 어떤 상황보다 힘들게 느껴졌다.
“아까 남자친구야? 잘 생겼던데?”
“네?”
큰 맘 먹고 집으로 들어가려는 한결을 붙잡은 건 다름 아닌 세은엄마였다. 세은엄마의 눈빛에는 장난스러움과 함께 대견함이 가득 묻어있었다.
“밥만 먹고 다니는 식충인지 알았는데, 연애도 할 줄 알고. 다 컸네. 남자친구는 공부 잘해? 얼굴보니까 샌님 같이 생기긴 했는데.”
“남자친구 아니에요. 어머니.”
“뭐?”
당황하는 세은엄마를 보며 한결은 빠르게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려봤다. 하지만 세은엄마를 놀라게 할 말은 없었다. 세은엄마가 왜 놀라는지 알지 못했던 한결은 가만히 기다려보기로 했다. 평소 세영은 엄마에게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았다. 기분이 좋을 때에는 엄마라고 불렀으며, 기분이 나쁠 때에는 윤여사라고 불렀고, 부탁해야하는 일이 있었을 때에는 꽃여사라고 불렀다. 말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를 빼고는 세은의 입에서 어머니란 말이 나오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세은엄마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엄마한테 어머니라고 부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괜한 말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던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이 어머니는 떡집에 가야 되니까 가게 좀 보고 있어.”
“네?”
“떡집에 갈 테니까 가게 좀 보라고.”
“아니, 어머니. 저 수험생인데요?”
“오호라~ 그 말 하려고 어머니라고 한 거였어? 수험생이어서 지금껏 그 점수 받은 거야?”
세은이 평소 집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 알지 못했던 한결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한결이 고개를 숙이자 세은엄마는 입고 있던 앞치마를 친히 목에 걸어준 뒤 떡집으로 향했다.
“학생. 여기 고등어 얼마야?”
“네?”
“고등어 얼마냐고.”
손님은 한결을 보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교복을 입고 있었지만, 앞에 수산시장에서나 보던 비닐로 된 기다란 앞치마를 하고 있던 한결은 누가 봐도 생선장수였다. 생선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세은이네 집의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었던 한결은 질끈 앞치마를 동여메며 좌판으로 향했다. 마트에선 생선 이름과 함께, 용량, 그리고 유통기한까지 친절하게 적혀있었다. 하지만 여기는 그렇지 않았다. 나무로 된 상자에는 생선들이 냉동된 채 진열되어 있을 뿐, 생선 이름도. 가격도 적혀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마에 사고 싶으신데요?”
“뭐?”
“사실은 어머니가 가격을 말씀 안하시고, 화장실에 가셔서 제가 얼만지 몰라요. 어머니가 주고 싶은 대로 주세요.”
장사에 이골이 난 상인들과의 밀땅을 기대했던 손님은 알아서 가져가라는 한결의 말에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선 100원만 내고 싶었지만, 자신을 믿고 오픈 프라이스정책(?)을 펼치는 세은을 상대로 등쳐먹을 정도로 손님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두마리에 5000원 주면 되지?”
“네.”
정확한 가격은 모르지만, 어림잡아 그 정도 가격일 거라고 생각한 한결은 환하게 웃으며 생선 두 마리를 봉지에 넣었다.
“그냥 주려고? 손질 안해줘? 그리고 그거 고등어가 아니라 조기잖아.”
“조, 조기는 다른 손님이 주문했던 게 생각나서 넣은 거에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손님을 자기 손으로 내쫓을 수 없었던 한결은 조기를 꺼낸 뒤, 고등어 두 마리를 집어 도마 위에 올려놓았다. 도마 위엔 영화에서나 보던 커다란 칼이 찍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