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뚝뚝한 부녀마냥 어색하게 주피터 옆에 서 있던 세은은 다시 한 번 죽음을 알렸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양호실로 가던 중에 죽었다는 사실이 몇 번을 생각해도 어이없었던 한결은 헛웃음만 지었다.
“아니, 내가 갑자기 왜 죽은 건데?”
지금 상황을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보고 싶었던 한결은 세은에게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결이 죽은 이유는 저승사자인 주피터도 모르고 있었다. 세은과 주피터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한결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들에게로 향했다. 한결이 오는 이유를 알고 있었던 주피터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서 한결이 물어볼 대상은 세은 밖에 없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어떤 상황인지 반드시 알아야했던 한결은 차분하며 설득력 있는 목소리로 세은에게 말을 걸었다.
“세은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무슨 일인지 설명 좀 해줘.”
우등생이라서 그런 걸까? 죽었다는 말에 길길이 날뛰었던 세은과 달리 한결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은은 자신의 실수를 털어놔도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래. 어서 말해봐.”
세은이 말을 시작하려고 하자 한결은 재촉하는 눈빛을 보냈다. 말투와 표정은 한없이 침착하고 부드러웠지만, 눈빛은 사냥을 앞둔 사자처럼 날카로웠다. 순간 한결이 보내는 말투와 표정이 거짓임을 파악한 세은은 잽싸게 생각을 바꿔 표적을 자신이 아닌 주피터에게로 돌렸다.
“아까 내가 말했잖아. 주피터가 죽였다고.”
세은의 말에 한결은 고개를 돌려 주피터를 바라봤다. 한결은 주피터에게 얼음장보다 차가운 눈빛을 내보냈다. 간혹 가다가 영혼들에게 원망을 듣기도 했지만, 저주에 가까운 눈빛을 받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세은은 주피터가 잘못했다고 쳐도, 한결 같은 경우는 주피터가 잘못한 게 10원어치도 없었다. 억울한 상황이었지만 이 곳에선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없었다. 억울한 부분은 본인이 직접 해명해야했다. 물 없이 고구마만 10개 정도 먹은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찌됐든 이 상황을 해결해야했던 주피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세은씨는 제가 잘못 데려온 게 맞지만 한결씨는 제가 데려온 게 아니에요.”
“그럼 저는 누가 데려왔는데요?”
한결과 주피터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세은은 말보다 강한 눈빛으로 주피터를 압박했다. 한결에 이어, 세은한테도 협박 아닌 협박을 받게 되면서 주피터는 저승사자로서의 자존심을 구기게 되었다. 하지만 세은에 이어 한결까지 저승으로 잘못 데려가는 머저리로 평가 받고 싶지 않았던 주피터는 크게 숨을 내쉰 뒤 말했다.
“한결씨는 세은씨가 데려왔어요.”
주피터는 진지한 말투였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한결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세은과 한결은 같은 반 친구였으며, 같은 인간이었다. 저승사자도 아닌, 같은 반친구였던 세은이 자신을 죽였다는 건 한결이 아니라 한결의 할아버지가 온다고 해도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한결의 반응을 확인하며 세은은 씩 웃었다. 하지만 세은에게 진짜 중요한 건 잘못을 주피터에게 떠넘기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첫 번째였다. 그래서 기쁨을 잠시 거둔 채, 이 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말해줬다.
“사람이 이렇게 쉽게 죽는다고? 살아나는 것도 이렇게 허술하고?”
부모님을 따라 의사가 되려고 했던 한결에게 사람이 죽는 과정과 다시 살아나는 과정은 터무니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허무했다. 하지만 주피터와 세은 밖에 없는 이 곳에서 한결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세은 밖에 없었다. 세은과 다른 이유로 수능도 보지 못하고 죽을 수 없었던 한결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세은의 행동에 집중했다.
“어? 세은아. 나 왜 이러는 거야?”
세은은 붙이려고 발버둥 쳐도 붙지 않던 실타래가 기적적으로 한결의 영혼에서 나온 실타래와 붙게 되었다. 그러면서 살구색이던 실타래의 색은 다시 푸른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한결은 세은을 불렀지만, 세은의 시선은 한결이 아닌 주피터를 향하고 있었다.
“어???? 결아?”
뒤늦게 고개를 돌린 세은은 한결이 사라진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세은의 육체에서 보였던 실타래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세은은 또다시 주피터에게 해답을 요구했지만, 세은을 만나면서 모든 점이 처음이었던 주피터가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죽은 듯이 누워있던 세은의 육체가 마치 다시 살아나려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미치겠네. 이거, 진짜.”
보진 않았지만, 그리고 믿기지도 않지만 지금까지 상황만 놓고 보면 한결의 영혼이 세은의 육체에 들어갔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 세은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한결의 육체에 들어가는 것. 한결로 다시 태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만, 이대로 죽을 수 없었던 세은은 재빨리 한결에게 향했다. 그리고 육체에서 삐져나온 실타래에 자신의 실타래를 갖다댔다.
“주피터! 나는 왜 못 들어가는 거야?”
“어??”
세은의 윽박에 주피터는 거의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주피터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전히 아무것도 없었다. 주피터는 폭풍 같은 이 상황이 그저 아무 일 없이 지나가길 바랄 뿐이었다. 주피터의 기도가 통한 걸까? 아니면 세은의 절박함이 통한 걸까? 땅 속으로 기어들갈 것처럼 몸을 수그렸던 세은은 마침내 원하던 대로 한결의 육체에서 나왔던 실타래와 엮일 수 있었다. 세은과 한결이 사라지면서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악몽에서 겨우 풀려난 주피터는 서둘러 저승으로 향했다.
“어? 이거 뭐야?”
세은의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른 채 들어간 한결은 알 수 없는 복통에 시달려야했다. 그러면서 좀 전에 자신이 봤던 얼룩이 응고된 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고통에 발버둥치면서 일자로 뻗어있던 이물질은 부채꼴모양으로 넓게 펼쳐지게 되었다. 한결의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란 세은은 자신의 몸도 추스르지 못한 채 한결에게 다가갔다.
“결아, 너 여기서 이러면 안 돼, 화장실 가야 돼. 화장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