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은의 가랑이 사이에서 흐르는 액체는 검붉은색이 아니었다. 액체 가운데 커다란 알맹이들이 명암을 만들며 어둡게 보이게 만들긴 했지만, 잘 봐줘도 오렌지색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믿는 동물이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 보고 싶은 대로 믿는 동물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도 아니고, 고등학교 3학년인 세은이 화장실 앞에서 똥을 지릴리 없다고 생각한 한결한테 가랑이사이에서 흐르는 건 똥이 아닌 피였다. 학교에서 학생이 피 흘리며 쓰러질 일은 거의 없지만, 눈 앞에 보이는 상황을 해결해야했던 한결은 벌벌 떨리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화장실 안으로 향했다.
“그래도 나 이승으로 돌아갈래. 창피해도 친구들이랑 거기서 살래. 그러니까 나 다시 이승으로 보내줘. 안 그러면 너 계속 쫓아다니면서 괴롭힐 거야.”
똥을 지린 자신의 모습을 본 순간 세은은 심각하게 저승행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아직 이승에서 할 일이 많았던 세은은 결국 이승행을 택하면서 주피터에서 징징거렸다. 그러면서 주피터는 사면초과에 빠지게 되었다. 주피터는 저승사자고, 세은은 망자였다. 마음만 먹는다면 주피터는 언제든 세은을 데리고 저승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이 다해서 죽은 것도 아니고, 억울하게 죽은 세은이 저승에서 어떻게 행동할지는 주피터도 예상할 수 없었다. 저승에 가서 망신당하지 않으려면, 망자를 관리하는 염라대왕한테 혼나지 않으면 세은을 잘 설득시켜야했다. 그래서 답이 없는 가운데에서도 다시 한 번 대화에 나섰다.
“저도 세은씨를 이승으로 돌려보내고 싶어요. 하지만 이미 끊어져버린 운명의 실타래는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제발 저승으로 가요, 우리.”
“운명의 실타래가 뭔데요?”
“영혼이랑 육체를 이어주는 끈인데, 왼쪽 새끼손가락을 보면 알 수 있을 거에요.”
주피터의 말을 듣자마자 세은은 왼쪽 새끼손가락을 확인했다. 왼쪽 새끼손가락엔 살구색으로 된 두꺼운 털실이 끊어진 채 나풀거리고 있었다.
“이걸 붙이면 다시 이승으로 갈 수 있다는 거에요?”
“이론상으론 그런데, 현실로 그걸 붙인다는 건 여태.”
주피터는 희망적인 말을 한 뒤, 참혹한 현실까지 말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앞에 말만 듣고 귀가 닫혀버린 세은은 더 이상 주피터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재빨리 육체가 있는 곳으로 달려간 세은은 새끼 손가락을 확인했다. 육체에 있는 실타래는 영혼에 붙어있는 것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승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세은은 죽을 힘을 다해 실타래를 묶으려고 했지만, 그건 능력 밖의 일이었다. 뒤늦게 화장실 앞으로 나온 주피터는 세은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쌍한 영혼이시여........”
세은의 부질없는 몸부림을 계속 보고 있기 힘들었던 주피터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벽에 바짝 붙어있는 한결을 보게 되었다. 뭍으로 나온 오징어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동양과 서양의 미를 적당히 섞어놓은 것 같은 오묘한 아름다움이 묻어나왔다. 한결에 대한 호기심도 생겨났고, 좀 전에 배운 가로쓰기도 활용해볼 겸 주피터는 명부를 꺼내더니 한결의 이름을 찾기 시작했다. 한편, 운명의 실타래를 묶으려고 발버둥쳤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세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서 다리를 꼰 채 도도하게 명부를 보고 있는 주피터를 보게 되었다. 주피터는 분명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었다. 하지만 사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무것도 없었다. 문제가 해결되기 위해선 사과와 함께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기 위해 자신과 달리 유유자적하게 명부나 살피고 있는 주피터의 모습이 꼴불견으로 느껴진 세은은 축구선수들이 시저스킥하듯이 앉은 자세에서 붕 떠올라 명부를 차버렸다. 죽고 나서야 본인의 재능을 찾게 된 걸까? 꽤나 어려운 자세에서 시도한 시저스킥이었지만, 세은의 발등에 제대로 맞은 명부는 총알마냥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니가 왜 거기 있어?”
날아가는 명부를 눈으로 쫓아가던 세은은 그때서야 한결을 보게 되었다. 한결은 자신과 달리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하늘색 실타래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명부에 맞은 실타래를 너무 쉽게 끊어져버렸다. 끊어진 실타래는 세은과 마찬가지로 살구색으로 변하더니 점점 짧아지게 되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던 세은은 주피터를 바라봤다. 이런 상황은 처음 맞이한 주피터도 멍하니 세은을 바라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아이고, 하나님.......”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지만 한결이 죽었다는 걸 알게 된 주피터는 저절로 하나님을 찾았다. 저승사자인 주피터가 하나님을 찾으면서 세은은 현실을 받아들여야했다. 한결이 죽었다는 걸, 그리고 한결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걸. 믿고 싶지 않은 사실이었지만, 받아들여야했던 세은은 빠르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어? 세은아? 너 언제 일어난 거야?”
세은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한결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아니, 한결의 영혼만 세은에게 다가올 뿐, 한결의 육체는 방전된 건전지가 들어있는 장난감처럼 바닥으로 떨어져버렸다. 보고 싶지 않았던 현실과 마주하게 된 세은은 눈을 질끔 감아버렸다. 그리고 살인자가 되어버린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증기터번보다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예전부터 머리는 머리카락을 위해 존재하는 장식물일 뿐, 저장장치로서, 혹은 실행장치로서 사용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몇 번을 생각해도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 세은은 무작정 한결에게 달려갔다. 버팔로마냥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세은을 보며 깜짝 놀란 한결은 멈칫거렸다.
“저기 주피터가 너 죽인 거야.”
“어?”
세은의 말에 당황한 주피터는 눈이 500원짜리 동전만큼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한결은 비웃을 뿐이었다.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저 사람이 저승사자라도 돼?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죽이냐?”
“어? 어떻게 알았어? 주피터 저승사자 맞아.”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얼른 들어와. 수학선생님이 찾으시니까.”
더 이상 세은에게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한결은 할 말만 마치고 바로 뒤돌았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한결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바닥에 쓰러져있는 자신의 모습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맞았다. 교복 상의에 적혀있는 이름이라든지, 오른쪽 귀 밑에 난 점과 어릴 적 다쳐서 생긴 이마부근에 상처까지 바닥에 쓰러져있는 사람은 한결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 한결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도 한결이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던 한결은 자연스럽게 세은을 쳐다봤다. 세은은 자신의 시체(?)위에 서 있었으며, 세은이 주피터라고 부르던 사람이 그 옆에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는 여전히 피(?) 흘리고 있는 세은의 모습이 보였다.
“세은아, 나 진짜 죽은 거야?”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