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피터씨. 아니, 주피터님 근데 제가 왜 죽은 거에요?”
“운명이 다하셨어요.”
핵전쟁이 벌어진 것도 아니고, 교통사고도 아닌 운명이 다해서 죽었다는 주피터의 말에 세은은 바로 반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금 전까지 죽음의 현장을 돌아다니며 히죽거리던 주피터의 사악한 얼굴이 뇌리에 남아있던 세은은 예전처럼 편하게 주피터를 대할 수 없었다.
“자, 이제 가시죠.”
“어디를요?”
“죽은 사람이 가야할 곳이 저승 말고 따로 있었나요?”
말을 마친 주피터는 세은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확실하진 않지만 본능적으로 손을 잡는 순간, 이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은은 잽싸게 손을 숨겼다. 세은의 손 따위야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지 잡을 수 있었지만, 공포에 질린 세은을 갖고 놀고 싶어진 주피터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며 세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수능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다행이었지만, 놀이동산도 몇 번 가보지도 못하고, 그 맛있다는 치맥도 못 먹어보고, 누구나 부른다는 남자친구 이름 한 번 못 불러보고 죽는다는 건 억울해도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이승에 남아있어야 했던 세은은 경직된 얼굴근육을 풀어준 뒤,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주피터님. 운명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직 제가 죽기에는 너무 어린 거 같은데, 병명 같은 거라도 알 수 있나요?”
주피터가 이미 죽은 세은에게 병명까지 알려줘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기세등등하던 세은이 주피터님, 주피터님하며 설설 기는 모습에 절로 기분이 좋아진 주피터는 명부에서 병명을 찾기 시작했다.
“노화네요. 노화.”
“네?”
“노화라고요.”
노화가 어떤 뜻인지 알지 못했던 주피터는 아무 감정없이 노화만 외쳐댔다. 노화는 나이가 들면서 신체에 나타나는 퇴행현상으로서 아직 10대 후반인 세은한테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질병이었다.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한 세은은 다시 한 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죽은 게 억울해서 그런데 제가 그 책 좀 봐도 될까요? 주피터님.”
인간의 운명이 적힌 명부는 저승사자들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책이었다. 하지만 말할 때마다, 주피터님, 주피터님하며 가슴을 긁어주는 행동은 바위 같이 단단했던 주피터의 마음을 열어주었다. 손가락으로 명부를 이동시켜주자 세은은 꾸벅 고개 숙여 주피터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한 뒤 명부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주피터가 보고 있는 명부는 겉모습답게 가로쓰기가 아닌 세로쓰기로 내용이 적혀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확인해야했던 세은은 손가락까지 써가며 명부에 집중했다. 하지만 좀처럼 본인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저. 주피터님. 제 이름이 보이지 않는데 좀 찾아주실 수 있으세요?”
“넌 한국 사람이면서 나보다 한글을 모르는구나.”
어리바리대는 모습에 콧대만 높아진 주피터는 명부를 보지도 않고 손 끝으로 세은의 이름이 적힌 곳을 가리켰다.
‘아놔, 저 개새끼 진짜.’
주피터가 가리킨 곳에는 오세은이라는 이름이 적혀있긴 했었다. 하지만 그건 세로쓰기를 가로로 읽었기 때문에 생긴 착오였다. 이름뿐만이 아니라 병명도 마찬가지였다. 이름과 병명이 마치 가로쓰기로 쓴 것처럼 적힌 건 서프라이즈에 나올만큼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걸로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다시 살아야했던 세은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다스리며 차분하게 주피터가 저지른 실수에 대해 설명해줬다.
“저 주피터님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이 책에 적힌 이름과 병명들은 가로쓰기가 아니라 세로쓰기로 쓰여 있어요. 그래서 읽으실 때 가로가 아니라 세로로 읽으셔야 돼요. 그러니까 오세은이 아니라 주피터님이 데려와야 하는 사람은 김오향, 윤세란, 기은혜씨에요.”
세은의 말에 주피터는 물끄러미 명부를 확인했다. 가로쓰기로는 김김이, 이윤김처럼 말도 안 되는 이름들이였지만, 세로로 읽으니 주피터가 흔히 보던 사람들의 이름이 보였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여태껏 사람들을 데려오지 못했는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듯 주피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피터가 실수에 대해 인정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세은은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냈다.
“실수하신 거 아셨으니까 이제 저 좀 이승으로 보내주세요. 저 아직 이승에서 할 일 많아요.”
“안 되는데요, 그건.”
“아니, 그게 왜 안 돼요? 실수로 데려온 건데 다시 이승으로 데려다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에요?”
주피터의 말에 세은은 따지듯 물었다. 세은의 반응에 당황한 주피터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좀 전까지 위세 좋게 세은을 바라보던 주피터는 쭈그러들기 시작했고, 반대로 조심스럽게 주피터의 눈치를 살피던 세은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빨리 이승으로 보내줘요. 주피터씨.”
“이상한 소리가 아니라 진짜 못 가요. 한 번 끊어진 운명의 실타래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입만 겨우 움직이며 말하는 주피터의 모습은 거짓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세은이 다시 이승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말했다.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세은은 영화배우들이 독백하듯이 자신의 심정을 격정적으로 토로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요, 지금? 머저리 같은 저승사자가 글을 잘못 읽는 바람에 죽게 됐는데, 이승으로 못 돌아간다고요? 내가 그렇게 우스워 보여요?”
꼼짝없이 죽게 생긴 세은은 길길이 날뛰며 주피터에게 윽박질렀다. 보잘 것 없는 인간한테 당하는 자신의 모습이 주피터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로 인해 벌어진 일인 만큼 주피터는 지금 상황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거짓말로 현재의 상황만 모면할 수도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나중에 더 큰 화가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 주피터는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원래는 한국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김씨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분이 아파서 제가 대신 한 거에요. 실수한 건 정말 죄송하지만, 한 번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으니까 이제 그만 운명을 받아들이세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한 주피터의 말은 상당히 강압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내용만 강압적일 뿐, 말하는 내내 떨리는 음색을 숨기지 못한 주피터의 모습은 저승사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나약해보였다. 잘못 죽게 된 건 억울했지만, 덜덜 떠는 주피터를 상대로 더 이상 화내는 게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세은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바라보는 하늘은 마치 세은을 약올리는 것처럼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