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이 부실에서 공 가지고 나오셨을 때 저희 오른쪽 두 번째 줄에 서 있었어요. 간식은 너무 배고파서 쉬는 시간에 미리 사다놓은 거구요.”
“그런데 왜 숨어서 먹었어?”
“숨어서 먹은 게 아니라 너무 배가 고파서 그 자리에서 먹은 거에요. 그리고 친구들한테 보이면 다 뺏기잖아요.”
이번 일을 무사히 넘겨야했던 세은은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세은은 체육선생님을 설득할 정도로 체계적이지도 분석적이지도 않았다. 세은이 하고 있는 설득은 선생님이 믿어주면 고마운 거고, 그게 아니라면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허공에 삽질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 세은은 제풀에 쓰러져버렸다. 힘없이 벤치에 앉은 모습을 보면서 선생님은 세은이 하는 말이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는 진짜 다이어트해야겠다.
여기서 더 살찌면 안 되니까 딱 한 입만 먹어야겠다, 한 입만.
엄마는 빨래를 어떻게 하길래 교복이 맨날 작아지냐.
비슷한 또래들이 아이돌이란 이름으로 연예계에 데뷔하며, 인기를 얻게 되면서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그러면서 화장과 다이어트는 학생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 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하지만 세은과 하나에겐 예외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과 벤치에 앉아 다리를 접으면서 앞으로 불룩하고 솟아오른 종아리살들은 이들이 현재 아이돌에, 외모에, 혹은 비행에 관심이 없는 학생이란 걸 말해줬다.
“선생님한테 빵 하나만 사다주면 눈 감아줄게.”
체육선생님의 말에 세은과 하나는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집어 까며 선생님에게 무일푼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사실 스마트폰이면 몰라도 체육시간에 돈을 가지고 나오는 학생은 거의 없었다. 향긋한 카스테라냄새에 취해 잠시 이성을 잃었던 체육선생님은 창피한지 서둘러 체육부실로 향했다. 멀어져가는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멀어져가는 대학처럼 보였던 세은은 서둘러 벤치에서 일어나 체육선생님한테 향했다.
“선생님! 돈 주시면 제가 빨리 사올게요.”
앞서 가고 있던 선생님을 따라잡은 세은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체육선생님은 굳이 세은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말할 때마다 입에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세은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점심시간을 기다리기 위해선 앞으로 2시간이나 기다려야했다. 결국 세은에게 설득당한 체육선생님은 지갑을 꺼냈다. 어른답게 지갑엔 다양한 색상의 지폐들이 들어있었다. 지폐들을 한 번 쭉 살펴보던 체육선생님은 지갑에서 맨 바깥쪽 값어치가 가장 낮은 지폐를 꺼내려고 했다. 순간 당황한 세은은 선생님한테 버럭 소리 질렀다.
“선생님! 그건 아니죠!”
“어??”
본능적으로 소리를 질렀던 세은은 뒤늦게 자신이 소리 지른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해답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답은 아주 쉬운 곳에 있었다.
“초등학생들도 심부름 시킬 땐 심부름값 주는데, 그걸로 주시면 진짜 선생님 빵 밖에 못 사잖아요.”
세은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심부름은 체육선생님이 시킨 게 아니었다. 어떻게보면 빵 먹는 걸 포기하고 부실로 돌아가는 선생님을 향해 세은이 자발적인 의지로 빵을 사오겠다고 말한 거였다. 그랬으면서 뒤늦게 심부름값 운운하는 세은의 모습이 사기꾼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선생님이었다. 세은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체육선생님은 1천원짜리 대신 1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며 세은에게 건네줬다.
“감사합니다!”
돈을 받은 세은은 심부름값이 아닌, 마치 용돈 받은 것처럼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하나와 함께 매점으로 가버렸다. 신나게 뛰어가는 세은의 뒷모습에서 웬지모를 찝찝함을 느꼈지만, 그게 어떤건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체육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부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편, 1만원을 들고 매점에 온 세은은 속칭 어른들의 빵으로 불리는 단팥빵과 자신이 먹을 크림빵 한 개를 집었다.
“야, 나는?”
“같이 먹자, 이걸로.”
“그럼 소보루빵 사자, 난 소보루빵 먹고 싶단 말이야.”
소보루빵은 세은도 좋아하는 빵이었다. 하지만 소보루빵은 이미 세은의 배 안에서 소화되는 중이었다. 몇 분 전에 먹었던 빵을 다시 먹고 싶지 않았던 세은은 크림빵을 고집했다. 그러자 하나는 화난 듯 소보루빵을 집더니 세은의 품 안에 거칠게 넣어버렸다. 하나의 행동은 크림빵을 내려놓으라는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런 행동에 겁먹을 세은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크림빵을 먹어야했던 세은은 초코우유까지 품에 넣으며 하나에게 소보루빵을 포기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날렸다.
“너만 입이냐?”
역시 하나는 세은과 친구였다. 남의 돈으로 생색내는 세은을 말릴 법도 했지만, 하나는 소보루빵에 흰우유까지 더하며 불씨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이때를 놓칠 수 없었던 세은은 몇 분 전 돈이 없어서 아까 사지 못했던 과자와 캬라멜까지 사며 선생님이 준 10,000원은 0원에 한없이 수렴하게 되었다.
“선생님, 드세요.”
“어. 그래. 고마워.”
세은이 빵봉지를 건네자 체육선생님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빵봉지를 건네받았다. 묵직했다. 빵 한 개, 아니면 빵 두 개 정도 들어있는 빵봉지라 하기에는 봉지가 너무 무거웠다. 스멀스멀 불길한 생각이 든 체육선생님은 책상 위에 봉지를 올려놓고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빵 3개, 우유 2개, 과자2개, 캬라멜 1개, 초콜렛 1개, 사탕 2개....... 빵 한 개만 주문했던 체육선생님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세은을 바라봤다. 그러자 세은은 당황한 듯 더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그게. 원래는 선생님 것만 사려고 했는데, 너무 배가 고파서요........ 다음 달에 제가 용돈 받으면 바로 드릴게요,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순식간에 1만원이 사라진 건 어이없었지만, 말까지 더듬어가며 사죄하는 세은이를 몰아붙일 만큼 체육선생님은 몰상식하지 않았다.
“아냐. 그냥 먹어.”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90도 인사로 고마움을 표현한 세은과 하나는 재빨리 매점에서 자기가 골랐던 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상엔 맛없어 보이는 단팥빵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적어도 빵이랑 우유까지, 아니면 초콜렛까지는 자기 몫일거라고 생각했던 체육선생님은 단팥빵 밖에 없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체육선생님의 이런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세은과 하나는 최대한 맛있게 먹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아......... 왜 이렇게 배가 아프지?’
체육시간 내내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기만 하던 세은은 3교시 수학시간이 시작되자마자 탈이 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