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목은 국어.영어,수학이었다. 그래서 일주일에 가장 많은 시간을 국영수에 투자했으며, 대입을 결정짓는 수학능력평가시험에서도 국어, 영어, 수학이 전체 성적의 66%를 넘게 차지할 만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졸업한 뒤 사회에 나오게 되면 가장 먼저 잊게 되는 과목이 국영수였다. 그리고 사회인이 된 뒤, 수업에 집중하지 않은 걸 후회하는 과목은 다름 아닌 예체능이었다. 이 사실을 알려줘야 했지만, 대입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진 고3 학생들에게 그 뒤의 일까지 말해주려는 용감한 어른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도 미술수업을 맞이한 학생들은 책상 위에 엎드려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워나갔다.
“오늘도 결이만 살아있네.”
모든 학생들이 잔다면 미술선생님도 편히 쉬겠지만, 단 한 명이 북극성처럼 찬란한 빛을 내며 수업에 집중했다. 이쯤되면 혼자 눈 뜨고 있는 학생이 원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그 학생은 다름 아닌 한결이었다. 훌륭한 집안, 뛰어난 성적, 그리고 준수한 외모까지 한결은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도 인정하는 엄친아였다. 그래서 마침 한결과 비슷한 또래의 딸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선생님은 마치 과외하듯 한결만 바라보며 수업에 임했다. 흑심(?)도 품고 있긴 했지만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미술사에 관심을 보이는 한결의 모습은 미술선생님을 절로 웃게 만들었다.
“결이 부모님은 진짜 행복하시겠다. 이렇게 공부도 잘하고, 착하고, 예의바르고, 잘 생긴 아들을 둬서.”
"아니에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듣던 칭찬이 지겨울 법도 했지만, 한결은 겸손한 미소로 자신의 인기를 만끽했다.
“근데 결이는 여자친구 없어? 여자친구 있으면 소문이라도 날 텐데 3년 내내 조용하네?”
미술선생님의 말에 자는 척하고 있던 학생들은 일제히 몸을 들썩였다. 한결의 이성관계는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학생들도 궁금해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결에게 직접적으로 이성관계에 대해 물어볼 정도로 친한 학생이 없었다. 그래서 없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없어요.”
“결이정도면 여학생들이 사귀자고 줄을 설 텐데, 눈이 높은가보구나?”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왜 없는데? 교과서적인 이야기말고 실제로 왜 없는지 얘기해봐.”
여자친구가 없다는 말에 희망을 얻은 미술선생님은 칼을 깊게 찔러 넣었다. 한결한테 여자친구가 없는 이유는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학교에서, 학원에서, 심지어는 단골 분식집에서도 사랑받는 한결에게 아직까진 자신이 사랑해줘야 하는 불편한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하는 건 한결스럽지가 않았다. 잘 났지만, 절대 자기 입으로 잘난 척하지 않았던 한결은 선생님이, 그리고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대답을 찾기 시작했다.
“사랑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아직 몰라서요.”
“오~”
한결의 대답에 여학생들은 나지막하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단순하게 호기심으로, 아니면 다른 친구에게 과시하기 위해 여자친구를 만드는 학생들 사이에서, 사랑을 이야기하는 한결의 모습은 고고한 백조처럼 보였다. 한결의 대답에 만족한 미술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상형은 있을 거 아니야? 이상형은 어떻게 되는데?”
이상형이란 소리에 이번엔 여학생들만 몸을 들썩거렸다. 이상형을 안다고 해도 한결과 사귈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은 반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같은 학년뿐만이 아니라, 학교에서 주목받는 한결의 이상형을 알고 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여자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한결은 이상형이란 말에 다시 한 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떼레떼레 떼레레레렝~”
역시 되는 놈은 되는 놈일걸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던 한결은 수업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면서 대답해야하는 의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결의 이상형을 듣지 못한 게 아쉽기는 했지만, 황금 같은 쉬는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던 선생님과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줄 공간으로 향했다.
“수능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치지 말고, 놀아라.”
미술시간에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책상 위에 엎어져있던 학생들이 체육시간이 남녀할 것 없이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한결이었다. 압도적으로 운동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원체 길쭉길쭉하고 도자기마냥 뽀얗게 빛이 나는 피부로 운동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한결의 모습은 사람이 아닌, 게임 속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보였다.
“결이는 진짜 사기캐 아니냐? 집안도 좋아, 공부도 잘해. 성격도 좋아. 게다가 얼굴도 잘 생겼어.”
“사기캐면 뭐하냐, 어차피 우리랑은 다른 인종인데.”
“왜 노력하면 내 걸로 만들 수도 있지.”
하나의 말에 세은은 절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등장할 때면 빼먹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노력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선 반드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장치에 불과했다. 반드시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지만, 노력만 한다고 성공하는 건 아니었다. 성공하기 위해선 운과 흐름이 노력보다 많이 필요했다.
“세상일은 운칠기삼이라고 실력보다 운이 중요할 때가 많으니까 너무 노력하지마. 즐길 수 있을 때에는 즐기고, 놀고 싶을 때는 놀아. 시간만큼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세은이 유치원 다닐 때쯤,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면서 세은이네 가족들은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재개발이라는 달콤한 사탕에 푹 빠진 세은아빠의 생각은 달랐다. 재개발이 얼마나 큰 물질적 혜택을 주는지 알게 된 세은아빠는 그 날 부로 회사를 그만두고, 재개발될 만한 곳을 보고 다녔다. 그러면서 아파트 대신 시장통 한 가운데 있는 허름한 2층짜리 상가주택에 들어갔다. 들어갈 때만 해도 세은아빠는 몇 년 안에 재개발될 거라며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집 살 때 생긴 대출이자만 계속해서 나올 뿐, 재개발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아빠의 모습을 반면교사 삼던 세은한테 하나의 모습은 철없는 어린아이같이 느껴졌다.
“너희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닌자마냥 벤치 앞에 앉지 않고, 뒤에 숨어 간식을 먹고 있던 세은과 하나는 체육선생님에게 걸리고 말았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숨어있던 걸 걸린 적이 없었던 세은과 하나는 어쩔 줄 몰랐다. 세은과 하나가 움직일 수 없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가만히 있자 체육선생님은 이들 손에 들려있던 검은색 비닐봉지를 뺏더니 내용물을 확인했다.
빈 빵 봉지 3개, 빈 우유팩 2개, 과자 껍데기 2개, 빈 카랴멜 봉지 수 개........
검은색 비닐봉지 안을 확인한 체육선생님은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 시작 후 9분 뒤였다. 9분 만에 이 많은 간식을 먹었을 리 없다고 생각한 체육선생님은 추긍하듯 물었다.
“너희 언제부터 여기 숨어 있었어?”
“5분 됐어요.”
“거짓말하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 안 그러면 벌점 나간다.”
“진짜 5분 밖에 안 됐어요.”
기적이 생기지 않는 이상 수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을 수 없었던 세은에게 내신성적은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설득력 넘치는 표정과 어투로 체육선생님을 구워삶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