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8시 25분, 이 시간은 집에 있는 직딩과 학생에게 밥 한 숟가락씩 떠먹이고 내쫓은 엄마들이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때였다. 하지만 세은이네 집은 그렇지 않았다. 시계는 8시 25분을 지나 8시 30분을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집에선 여전히 뉴스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앞엔 하얀색 런닝차림에 사각팬티만 입은 세은아빠가 작은 개다리소반을 앞에 놓고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 엄마! 지금 깨우면 어떻게 해! 오늘 머리 감아야 되니까 일찍 깨워 달랬잖아.”
앵커의 목소리만 들리던 거실의 평화로움을 깬 건 다름 아닌 세은이었다. 물소마냥 뽀오얀 피부를 뽐내며 방에서 나온 세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뛰어갔다. 방에서 뛰쳐나올 때까지만 해도 바로 씻을 것 같았지만, 세은이 욕실에 들어가고 수 초가 지나도 샤워기 트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빠, 거기 고기 있어?”
욕실로 뛰어가는 그 짧은 순간에 밥상에 놓인 상추를 스캔했던 세은은 욕실문을 열고 조심스레 물었다. 입에 밥을 가득 넣고 있었던 세은아빠는 끄덕임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밥상에 고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은은 씩 웃으며 다시 거실로 나오려고 했다.
“얼른 닦아! 늦었다면서 뭘 꼼지락거리고 있어!”
"아, 알았어!"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날아오는 주황색 광주리를 발견한 세은은 잽싸게 다시 욕실로 들어갔다. 보지도 않았으면서 정확히 광주리를 던지는 엄마의 솜씨나, 그걸 반사적으로 피하는 세은이나 이들의 동작은 마치 숙련된 선수와 코치처럼 보였다.
“아, 개운하다.”
욕실에는 샴푸도 있고, 린스도 있고, 트리트먼트도 있었다. 하지만 마룻바닥에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나오는 세은의 머리에선 물 비린내 밖에 나지 않았다. 큰 소리 내며 엄마한테 자신이 씻었다는 걸 알린 세은은 아빠 앞으로 가 조용히 입을 벌렸다. 그러자 아빠는 상추 두 개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삼겹살, 묵은지, 밥, 마늘과 깻잎을 넣어 쌈을 만들었다. 만들 때에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지만, 동그랗게 말자 어른 주먹만 하게 커진 쌈은 세은을 절로 긴장시켰다. 하지만 세은은 고3이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유달리 소화력이 좋아서 하루에 5끼씩 먹어도 항상 배고픈 새끼 돼지였다. 아빠가 싸준 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세은은 바로 입 안에 집어넣었다.
쏙~
눈으로 봤을 때에는 ‘이걸 어떻게 먹나?’ 싶을 정도로 커보였지만 입술에 닿은 쌈은 블랙홀에 빨려들어가는 행성마냥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입 안에서 상추가 녹아내리면서 그 안에 들어있던 재료들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자 세은은 기분 좋은 신음소리를 내며 맛을 음미했다.
“오세은! 학교 늦는다면서 뭐하고 있어! 학교 안 갈 거야?”
세은이 학교 갈 준비는 하지 않고 또다시 거실에서 밍그적거리고 있자 다시 한 번 주방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욕실로 들어갔던 때였다면 쥐죽은 듯이 방으로 갔겠지만, 이렇게 맛있는 아침상을 아빠만 먹는다고 생각하면서 괜히 억울해진 세은은 대들기 시작했다.
“학교가 문제야? 뛰어가면 5분이면 가는데. 그리고 엄마! 내가 밥 먹을 땐 풀떼기만 내놓으면서 왜 아빠한테만 삼겹살 구워줘?”
“아빠는 아침부터 배달가야 되니까 그러는 거지. 넌 맨날 책상에 앉아있으면서 무슨 고기타령이야?”
“헐...... 엄마! 공부하는 게 칼로리 소모가 얼마나 심한 줄 알아?”
“그래서 성적이 그 모양이야? 먹은 대로 공부했으면 서울대도 가겠다.”
엄마 말에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답하던 세은이었지만 성적 앞에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던 세은은 몇 백 년 전부터 금기시 된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난 열심히 하는데 엄마 닮아서 멍청한 걸 어떻게 하라고.”
“뭐?????????????”
세상 모든 엄마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리를 들은 세은엄마는 손질하고 있던 무를 들고 거실로 달려갔다. 순간 엄마가 들고 있는 무가 무중력 상태로 날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세은은 잽싸게 방으로 들어가 버텼다. 마음만 먹는다면 문 따위 여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가정의 가계를 담당하는 책임장이었다. 일시적인 분노 때문에 쓸데없는 지출을 늘릴 수 없었던 엄마는 거칠게 마룻바닥에 앉으며 화를 삭혔다.
“비켜봐. 뉴스 안 보이잖아.”
세은엄마를 발로 밀어낸 세은아빠는 다시 뉴스에 집중했다. 마음 같아선 무로 대가리를 후려치고 싶었지만, 오늘은 배달건이 8건이나 있는 날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일꾼을 제 손으로 병원에 보내고 싶지 않았던 세은엄마는 화를 다스리기 위해 눈을 감고 명상에 빠졌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된 세은엄마는 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에는 고기 없이 상추와 쌈에 싸먹을 야채밖에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먹어야하는 것마저 세은이에게 줘버리는 세은아빠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세은엄마는 비꼬며 말했다.
“고기 없이 먹으니까 쌈이 참 맛있죠?”
“그러게, 이것도 먹을만 하네.”
세은엄마는 잔뜩 감정을 실어 말했지만, 세은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해버렸다. 세은아빠는 마치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분노라는 감정을 초월한 절대자 같았다. 그러면서 세은엄마는 별 것도 아닌 일로 아침부터 짜증내고, 버럭하고, 화내는 자신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잠시만이라도 초라한 자신을 잊고 싶었던 세은엄마는 상추 옆에 있던 고추를 집어들고 신경질적으로 씹어 먹었다.
‘와,, 더럽게 맵네, 이거.’
입 안에서 맴돌고 있던 고추향이 코로 넘어가면서 세은엄마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좀 전까지 화내지만 않았더라면 지금 당장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세은엄마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세은아빠에게 또다시 우스운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세은엄마는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입 안에 돌고 있는 매운맛을 다스렸다.
“매워서 빼놓은 걸 왜 먹고 그래.”
세은엄마가 먹은 고추가 매운 고추라는 걸 알고 있었던 세은아빠는 무심하게 물 잔을 건넸다. 여기서 물잔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이 상했지만, 더이상 버틸 수 없었던 세은엄마는 눈 딱 감고 물잔을 받았다. 그리고 몇 분 전 영화가 쌈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물 잔에 들어있던 물을 한 번에 목구멍 안으로 집어넣었다.
“악!!!!!!!!!!!!!”
매운맛에 들어있는 캡사이신성분은 대부분 기름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물을 아무리 마신다고 해도 매운맛을 가시게 할 순 없었다. 오히려 입 안에 찬 기운이 들어가면서 매운맛을 더욱 증폭시키는 역할만 할 뿐이었다. 매운맛이 더욱 강렬해지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세은엄마는 바로 냉장고로 달려갔다. 그리고 1리터짜리 우유를 컵에 따르지도 않은 채 꿀떡꿀떡 목구멍으로 넘겼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교복을 입고 방에서 나온 세은은 아빠에게 인사한 뒤, 엄마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엄마는 찌그러진 우유팩마냥 식탁 위에 널브러져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엄마의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세은은 천천히 다가갔다. 하지만 세은의 시선따위는 의식할 여력조차 남지 않았던 엄마는 귀찮은 듯 손을 밖으로 흔들며 ‘아무 말도 하지 말고 학교나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강하게 등짝 몇 대.’ 정도 각오하고 방에서 나온 세은에게는 뜻하지 않은 행운을 맛보게 된 거였다. 이대로 학교에 갈 수도 있었지만 한 번 맛본 행운의 기운이 너무 달콤했던 세은은 또다시 행운이 찾아오길 기도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