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살기
먼지 냄새와 뒤섞인 서류냄새가 차갑게 느껴졌다. 한 면이 모두 유리창인 사무실의 동쪽에선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왔다. 강한 섬광과 같은 햇살을 실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 햇살을 따라 사무실의 먼지들이 반짝이며 춤을 추었다. 빛이 밝을수록, 따뜻할수록, 먼지들이 반짝일수록 긴장감은 거대해졌다. 다시 빛을 따라 햇빛을 쏘아봤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난 시선을 돌렸다.
“강승주 씨!”
구두 굽 소리의 주인공이었다.
“네!”
나는 놀라 대답했다.
“앉으세요.”
그는 사무실 출입문 옆에 있는 낡은 밤색 가죽소파를 가리키며 내게 말했다.
“음....... 전엔 무슨 일 했어요? 경력이....... 자세히 적혀 있지 않네요.”
그는 내 쪽으로 오지 않고 소파 맞은편에 놓여있는 책상에 걸터앉으며 내게 질문했다. 그의 작업복 왼쪽 가슴에 ‘사무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
난 그의 물음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는 눈을 치켜뜨며 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리고 손에 들려있던 이력서를 다시 살피고는 말했다.
“이런 일은 해 봤어요?”
“네? 아....... 아니요....... 아르바이트는 많이 해 봤습니다.”
난 말했다.
“무슨 아르바이트?”
“어........ 주유소....... 세차장....... 또 중고자동차 매매상.......”
이번엔 제대로 대답하려고 과거의 기억에 집중했다.
“차 좋아하나 봐요? 죄다 차에 관련된 일들이네?”
“아, 어....... 어쩌다보니.......”
난 멋쩍어 두 손을 괜히 비비며 말했다.
“몸은 튼튼하죠? 어디 아픈 덴 없고? 힘 좀 써야할 텐데....... 괜찮겠어요?”
그의 말투는 나를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숨도 가빴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난 절실했다. 이깟 긴장감 따윈 이겨내야 했다.
“네! 괜찮습니다. 건강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난 대답했다.
“흠......... 따라와요!”
그는 양쪽 입 꼬리를 올려 표정을 한 번 정리하고는 내게 말했다. 난 그를 따라갔다.
사무실이 있는 2층짜리 건물을 벗어나 주차장을 지나 작업장으로 그는 나를 데려갔다. 물류창고답게 널따란 내부는 상차를 기다리는 물건들로 가득했고 지게차도 오갔다. 반대편엔 물건 포장을 하는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무장은 날 그 쪽으로 안내했다.
“어이, 김 주임! 와봐!”
사무장은 손짓을 하며 누군가를 불렀다. 아담한 키에 마른 몸의 한 사내가 우릴 향해 다가왔다.
“여기, 오늘부터 같이 일할 강승주 씨. 일 좀 잘 가르쳐주고 시간 배분하는 거랑 작업장 이것저것 좀 일러 줘요.”
사무장은 김 주임이라는 그 사내에게 말했다.
“반가워요!”
손에 끼고 있던 목장갑 한 쪽을 벗으며 김 주임은 내게 악수를 청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강승주입니다.”
난 넙죽 그의 손을 잡으며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승주씨? 음....... 그래요. 열심히 해봐요.”
작은 체구에서 풍기는 이미지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굵고 크면서 왠지 모를 신뢰감을 주었다. 그의 멘트에 조금 전까지 덩어리져 있던 나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수고들 해요.”
사무장이 내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말하고는 자리를 떠났다.
“따라와요......... 야, 원식아!”
김 주임은 나를 데리고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다. 심호흡을 했다. 사무실 냄새보다는 작업장의 쾌쾌함이 오히려 편했다. 천천히 온 몸에 퍼지는 전율과 함께 현실감이 전해졌다.
에라, 모르겠다. 난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삶 속에 던져졌다. 죽는 게 나았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 있는 게 나은 건지는 좀 더 지내보고 판단하기로 했다. 운명에 나를 맡겼다. 난 알 수 있는 것이 없었기에 아직 아무 깨달음도 없었다.
2. 어린 나의 부모
혜주는 꾹 참고 있던 눈물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얼른 허리춤에 올려놓았던 손을 가져와 눈물을 닦았다. 이 모습을 본 승찬은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었다. 그러면서도 꼭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혜주는 입술을 깨물어 더 이상의 눈물을 삼켰다.
“어차피 친부모도 아닌데 뭐!”
혜주는 말했다.
“야........!”
뭔가 말하려다 급히 멈추고 승찬은 고개를 숙이고 계속 걸었다.
조금 전 우리는 혜주의 부모님을 방문했었다.
“아....... 안녕하세요. 어머님, 아버님. 저희....... 그냥 잘 지내고 있다고 보여드리러 왔어요. 한 번만 뵙고 갈게요. 염치없지만....... 그냥 뵙고만 갈게요!”
승찬은 대문 앞에서 외쳤다. 매미소리에 묻혀 혹시 자신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더 크게 외쳐 보았다. 대문을 두드려도 보았다. 한 여름의 열기에 철문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아이 씨....... 가자, 그냥! 내가 뭐랬어........”
혜주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하필이면 이토록 뜨거운 여름날, 승찬은 자신의 고집으로 무거운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문전박대 당하게 된 혜주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곧 나오게 될 아기를 위해서라도 혜주의 부모님을 한 번쯤은 뵈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하얗게 질려 땀을 쏟고 있는 혜주의 얼굴을 보고 승찬은 할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혜주야!”
그 때, 대문 안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매미소리에 묻어 들려왔다. 혜주의 어머니였다. 두 사람은 얼른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이고....... 아이고....... 혜주야, 어떡하니....... 아이고.......”
그녀의 어머니는 대문을 나와 그녀의 배를 바라보며 연실 아이고 소리만 반복하며 흐느꼈다. 딸의 손을 꼭 잡고는 목소리를 낮춰 울먹였다.
“엄마, 울지 마! 꼭 울 일은 아니잖아. 이것 봐, 신기하지? 곧 나올 거래, 애기........”
그제야 혜주는 밝게 웃으며 엄마의 손을 잡았다.
“어....... 어머님....... 아........ 안녕하세요.......”
승찬은 혜주의 말이 끝나자 넙죽 인사했다. 승찬의 인사에도 혜주의 어머니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허이고.......’ 소리를 반복하며 혜주의 배를 쓰다듬기만 했다.
“거, 안 들어와!”
그 때 집 안에서 호통이 들려왔다. 혜주의 아버지였다.
“어여 가! 더워. 힘들어....... 어여 가! 엄마가 나중에 연락할게.......”
아버지의 호통소리에 그녀의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며 혜주를 떠밀었다.
“엄마........”
혜주는 아쉬워했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손을 흔들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 안녕히 계세요. 또 찾아뵙겠습니다!”
승찬은 대문을 향해 또 외쳤다.
혜주와 승찬은 그녀의 집을 뒤로 하고 골목을 내려오고 있었다. 매미는 떼를 지어 울어대는 것 같았다. 오전시간임에도 햇볕은 야속하리만치 거세게 그들이 걷고 있는 골목길을 내리쬐고 있었다. 뜨거웠다. 혜주가 힘이 들까 승찬은 잡은 그녀의 손을 양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는 울분을 참는 그녀가 안타까웠다.
“아............”
겨우 버스정류장까지 걸어 내려왔을 때였다. 혜주는 승찬의 손을 잡고 있던 손에 갑자기 힘을 주며 허리를 재꼈다.
“왜, 왜 그래?”
승찬이 물었다.
“배가....... 아픈 것 같아.......”
혜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정말? 어....... 어떡하지? 병원........ 갈까?”
“잠깐만......... 으......... 아.....!”
혜주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안되겠다. 병원 가자!”
승찬은 혜주를 부축한 채 골목을 나와 택시를 불렀다. 곧 두 사람 앞에 도착한 택시 안으로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승찬은 내내 안절부절 했다.
“야........ 네가 왜 떨어....... 좀 괜찮은 거 같기도 하니까 그렇게 떨지 마!”
혜주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양수가 흐르네요. 병원 먼저 와서 다행이에요. 아직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까 너무 긴장하진 말아요, 두 사람 다.”
혜주의 상태를 살핀 담당의사는 말했다.
“출근해. 얼른. 걱정 말고. 이러다 늦으면 잘려, 얼른 가!”
혜주가 우물쭈물하고 있는 승찬에게 말했다.
“알았어....... 혹시 모르니까, 가서 얘기해 볼게. 조퇴라도.......”
“그러다 잘리면 애기 어떻게 키우려고! 병원에서 알아서 연락해 줄 거니까 가서 일이나 해!”
혜주의 말에 승찬은 쭈뼛거리며 병실을 나섰다.
승찬은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날씨 탓인지 다행히도 카센타는 평소보다 한가한 편이었다. 어쩌면 그 한가로움이 승찬에게는 더 고역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점심도 걸러 가며 그는 닦은 차를 닦고 또 닦으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승찬아, 전화 받아!”
사무실에서 동료가 그를 불렀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걸레를 차 위에 올려놓은 채 장갑을 벗어 던지고는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강승찬씨? 이혜주 산모 보호자시죠?]
“네!”
[지금 오셔야겠는데요.]
승찬은 전화를 얼른 끊고 부산스럽게 동료를 찾았다.
“형! 형........ 나, 병원 가요! 애기가 나왔나봐........ 사장님한테 말 좀 해줘요!”
그는 땀에 젖은 작업복 차림으로 택시를 잡아탔다. 오전, 병원에 혜주를 데려다 주고는 대여섯 시간 정도 흘렀을 때였다. 그는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그는 날아가 듯 혜주가 있는 병실로 뛰어 들어갔다. 침대는 비어 있었고 간호사가 새 시트로 침대를 정리하고 있었다. 승찬은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여....... 여기....... 이혜주...........”
승찬은 병실 입구에 적혀 있는 산모의 이름을 재차 확인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이혜주 산모, 분만실에 들어가셨어요. 복도 나가셔서 왼쪽으로 가시면.........”
간호사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승찬은 분만실로 향했다. 분만실 입구에 이르자 간호사 한 명과 담당 의사가 나오고 있었다.
“이혜주 산모 보호자인데요........”
“방금 출산하셨어요. 아들입니다. 병실로 옮기거든 보세요.”
간호사가 그에게 설명한 후 자리를 떠나자 잠시 후 다른 두 명의 간호사가 혜주의 침대를 끌고 분만실에서 나왔다.
“아기 아빠.........”
“네!”
“7월 18일 오후 4시 07분, 아들 출산하셨고 산모는 건강하십니다. 아기는 신생아실에서 보시면 되고요.”
간호사들은 그에게 차분한 말투로 얘기해 주었다. 혜주의 이마엔 땀이 맺혀 흐르고 있었고 두 눈 동자는 벌겋게 피가 맺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승찬을 보자 그런 그녀의 얼굴에선 엷은 미소가 힘겹게 베어 나왔다.
“괜찮아? 안 아팠어? 후........ 가지 말 걸....... 가지 말 걸........ 너무 늦게 왔잖아.........”
승찬은 울먹였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팠어........”
혜주는 웃으며 말했다. 승찬은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부 강승찬(만 17세), 모 이혜주(만 17세)>
아기 수첩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생아실의 간호사는 꽁꽁 싸맨 작은 아기를 승찬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아기를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다. 인형같이 작고 피부는 불그스름했다. 눈은 감겨있고 눈썹도 없었다. 꼭 다문 입술이 혜주의 입과 닮은 것도 같았다. 아기가 아니라, 승찬은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흘 후, 혜주와 아기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제 서야 승찬은 혜주의 부모님에게 그녀의 출산 소식을 전했다. 수화기 넘어 혜주의 엄마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혜주는 우는 엄마를 달랬지만 그녀의 엄마는 달래지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들은 건 엄마의 울음이 전부였다. 그렇게 전화는 끊기고 다시 연락이 오지는 않았다.
승찬은 혜주를 위로했다. 아기를 낳은 사람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그가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그래서 그는 혜주의 곁에 더 있어주려 노력했다. 그녀 역시 몸을 푸는 동안은 아기 이외의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두 사람은 아기의 이름을 ‘승주’라고 지었다.
승주는 하루가 다르게 커 갔다. 승찬은 좀 더 오래 혜주와 승주의 곁을 지켜 주지 못하는 것에 대해 못내 안타깝게 느끼고 있었지만, 초보 엄마인 혜주는 의연하게 상황에 적응하고 있었다.
승주가 자랄수록 승찬은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월세를 내고 기본적인 생활비를 쓰고, 혜주의 회복을 위해, 승주의 육아를 위해 시간과 돈이 이전의 두 배는 들었다. 정비소 월급만으로는 부족했다. 승찬은 퇴근 후, 재래시장의 한 야채 도매상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적어도 주말만큼은 혜주랑 승주와 함께 하려는 의도였지만 야채 도매상의 고용계약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엔 쉬었잖아! 오늘은 왜 가야되는데?”
혜주가 물었다.
“말했잖아, 거래처가 늘어났다고. 요즘 시장 사람들 너도 나도 주말 장사하느라 그래. 제 때 신선한 걸로 대주지 않으면 거래 끊는다잖아. 어쩌겠어.......”
승찬은 다시 차분히 설명했다.
“사장은 쉰다며? 사장이 해도 되잖아. 왜 꼭 네가 해야 돼?”
혜주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미안해........ 근데 사장이 나한테 시키는데 어떻게 안 된다고 해? 주말엔 수당도 준다고 했고........ 급여가 세서 다들 노리는 일인데, 내가 잘리면 안 되잖아. 빨리 끝내고 올게. 화내지마, 응?”
승찬은 조금 화난 듯 보이는 혜주를 달래듯 말했다.
“빨리 온다는 말은 하지도 마! 한두 번 속아? 점점........ 너....... 나랑 승주가 핑계인거지? 이젠 돈이 더 중요한 거 아냐? 나쁜 놈..........”
혜주는 울음을 터뜨렸다.
“야!”
혜주의 말끝에 승찬은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옆에서 자고 있던 승주가 깨어 울기 시작했다.
“어........ 괜찮아, 승주야........ 미안, 미안........”
혜주는 승주를 들어 올려 가슴에 붙이고는 토닥거렸다.
“너 때문에 승주 놀랬잖아! 나쁜 놈!”
혜주의 목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미....... 미안! 벼....... 병원 가자! 얼른!”
승찬은 몹시 당황하며 말했다. 혜주는 그런 그를 외면하며 집을 나섰고 승찬은 멍한 채로 그녀를 따라 나섰다. 그들은 서로 다른 발걸음으로 근처 약국으로 향했다.
“정말 미안해....... 승주 데리고 들어가서 쉬어! 정말 빨리 끝내고 올게.........”
승찬은 여전히 눈물을 훔치고 있는 혜주를 안아주었다. 승주의 울음은 잦아들었다.
“아빠, 얼른 다녀올게, 승주야! 아빠가 미안........ 들어가, 추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는 승주의 볼에 승찬은 살짝 입을 맞추고는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멀어져 가고 혜주의 눈물은 다시 뺨 위로 흘렀다.
1989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승찬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육점에 들러 소고기 한 근을 샀다. 월급을 받은 날이기도 했지만 정비소에서 일 한지 열년 반 만에 최연소 주임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였고 풍부한 경력도 아니었으나 순전히 성실함과 열정으로 얻는 결과였기에 그는 더욱 기뻤다.
“승주야! 아빠 왔어!”
승찬은 들뜬 마음으로 집에 들어섰다. 단칸방에 찬바람이라도 새어 들어갈까 얼른 문을 닫고 들어와 언 손을 비비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승주는 방 한가운데에 엎드려 손수건을 물며 놀고 있었고 혜주는 장롱에 기대어 노는 승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나 일찍 왔지? 좋은 소식이 있는데....... 여기! 소고기 사왔어. 구워먹자! 승주도 주고.”
승찬이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혜주는 그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왜 그래? 아직 화났어?”
승찬이 물었다.
“승주랑 먹어. 난 갈 데가 있어.”
혜주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 어딜? 좀 있으면 어두워져.”
승찬은 옷을 갈아입으려는 혜주를 붙잡았다. 승찬의 손을 거세게 뿌리치는 그녀를 보고 그는 깜짝 놀랐다.
“엄마....... 오실거야. 이거 놔.”
승찬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렸다. 순간 그녀의 브레지어 끈이 그의 손에 딸려 내려갔다. 그러자 혜주의 가슴이 반쯤 드러났다. 승찬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퍼렇고 붉은 멍과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혜주는 말없이 옷을 가다듬고 들고 있던 스웨터를 입었다. 외투를 입고 목도리도 둘렀다. 그녀는 장롱 문을 열고 커다란 가방을 하나 꺼내고는 방바닥에서 놀고 있는 승주를 한참 바라보았다.
“혜주야..........!”
승찬이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승주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은 젖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승찬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고 그대로 집을 나섰다. 승찬은 생각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를 잡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얼른 판단이 되지 않아 머뭇거리고만 있을 뿐이었다.
3. 새로움과 지지부진함
“안녕하세요.”
나는 김 주임에게 인사를 했다.
“......... 아침 먹었니?”
김 주임은 내 인사를 받는 대신 나를 한 번 힐끗 보고는 장부를 건네며 말했다.
“...............”
대답 없는 내게 김 주임은 두유음료 하나를 쥐어 주었다.
“따뜻하네요....... 고맙습니다........”
나는 그에게 다시 인사했다.
“내일, 쉬지? 처음이라 힘들었을 텐데 푹 쉬어. 월요일에 봐요!”
김 주임은 퇴근하는 내 등을 툭 치며 말하고 작업장을 나섰다.
“네........”
난 얼른 대답했지만 내 목소리가 그에게 들렸을지는 모르겠다. 버스를 타면 여섯 정거장. 피곤했지만 내일이 쉬는 날이기 때문이었을까, 걷고 싶었다. 내게는 낯선 동네였기 때문에 주변을 구경하며 걸을 만 했다. 버스를 타고 갈 때 스치듯 보이는 풍경과 분명 같은 곳임에도 다르게 보였다. 천천히 걸으면 십여 분쯤. 늘 하차하던 버스정류장까지의 거리이다. 그 버스 정류장에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골목라면’이라는 작은 라면가게가 보였다. 실은 몇 미터 전부터 솔솔 흘러나오는 냄새가 나를 자극하고 있었고 그 냄새에 반응이라도 하듯 내 뱃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혀 아래 군침도 베어 나왔다. 열 걸음 전부터 냄새를 따라와 난 ‘골목라면’ 간판 아래에 멈춰 섰다. 잠시 서 있다가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님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야 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으로 보이는 분이 내게 인사했다.
“아, 네........ 지금....... 라면 되나요?”
난 무언가 낯설고 쑥스러웠다.
“네, 됩니다. 뭐 드릴까요?”
사장님은 표정이 없었지만 말투는 따뜻하게 들렸다.
“아, 그럼....... 그냥 라면 하나 주세요.”
벽에 문패처럼 메뉴판들이 나란히 줄지어 걸려 있었고 난 그것을 한 번 훑어보다가 ‘그냥 라면’이라고 말해 버렸다. 사실 ‘그냥 라면’이라는 메뉴는 없었다. 모두 열 개 남짓 되어 보이는 메뉴들에는 모두 이름이 붙어져 있었지만 난 신중하게 고르려 하지 않고 대충 주문하려 했다. 주문을 해 놓고 난 사장님을 힐끗 보았다.
“예에.”
사장님은 성의 없는 내 주문을 받으셨다. 그는 영업 준비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난 다시 전부 열 평도 안 되어 보이는 가게를 훑어보고는 사장님이 계신 주방 쪽 측면 구석자리에 앉았다. 국물을 끓이고 재료를 손질하느라 나 따위에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을 사장님 말고는 분명 아무도 없었지만 난 낯선 곳에 혼자 앉아 있는 것이 이내 뻘쭘했다.
“면을 조금 더 넣었어요. 맛있게 드세요.”
잠시 후 사장님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그릇을 내 앞에 놓으시며 말했다. 내게 눈을 마주치지 않고 그 또한 툭 던지듯 대충 말했다.
“어, 감사합니다.”
난 말했다. 황급히 몸을 돌리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뽀얀 국물에 소복이 감겨 올라온 노란 빛깔의 면발과 그 위에 올려 진 달걀노른자와 숙주나물, 파, 그리고 고추와 고춧가루도 살짝 얹어져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비주얼이었다.
‘아빠.............’
아빠의 얼굴이 떠올랐다. 눈앞이 흐려졌다. 정신을 가다듬고 젓가락을 들어 면을 휘저었다. 진하고 구수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난 라면을 집어 들기 전에 사장님을 한 번 쳐다보았다. 사장님이 계신 입구 쪽에 붙어있는 소주 광고가 눈에 띄었다.
“저기....... 사장님.”
난 사장님을 불렀다. 아, 이번엔 들렸을까? 의심하는 순간 사장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셨다.
“예에.”
“저기........ 저, 소주 한 병만 주시겠어요........?”
난 소주를 주문했다. 다시 재료준비를 하고 있던 사장님은 대답 없이 냉장고에서 소주 한 병을 잔과 함께 내게 가져다 주셨다.
“감사합니다.”
난 인사했다. 그는 역시 대꾸하지 않고 돌아섰다. 라면을 먹기 전에 소주 반잔을 따라 입에 털어 넣었다. 아주 썼다. 얼굴이 저절로 찡그려졌다. 차가운 소주는 목구멍을 타고 식도로 배 아래로 점점 흘러 내려갔다. 그러고 나서 난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이번엔 소주잔을 한 잔 가득 채웠다. 갑자기 온 몸에 근육이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주 한 잔을 더 마시고 난 라면을 먹었다. 내 몸속에 들어간 소주 한 잔 반과 라면이 어떤 기억으로 날 안내했다. 겨우 삼켰었던 눈물이 다시 눈앞을 가렸다.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