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신탁은 꽤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우선 나는 이 숙소 근처 어딘가에서 왕을 만나야 한다.
왕을 만나면 즉시 형제를 불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야 한다.
한편 나는 대장장이를 찾아가야 한다.
그러고 나서 그와 함께 대연회장이라는 곳에 가야만 한다.
왕과 나는 한 차례 인연이 있다.
익명의 도시의, 익명의 코인로커를 매개로 쪽지를 주고 받았었다.
직접 만난 건 아니었지만 아마 여자일 것이다.
쪽지에 쓰여진 글씨가 무척 여성스러웠으니까.
일단 나는 숙소 주변을 탐색해보기로 마음 먹는다.
숙소로부터 임의의 원을 그리고 그 안을 샅샅이 돌아다닌다.
흐릿한 족적도 미묘한 냄새도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
특히 사람이 드나드는 건물이 보이면 시간을 들여 관찰한다.
그리고 원을 넓혀 나간다.
오늘 하루만 숙소로부터 거진 3 킬로미터 범위를 일일이 확인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리고 새로 약 1 킬로미터 정도를 넓혀서 지도에 체크한 뒤 첫번째 관찰지에 도착했다.
대로변에 위치한 카페다.
일하는 사람은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알바로 보이는 여자 이렇게 둘.
둘 다 유니폼 착용.
남자는 안경, 콧수염, 귀걸이, 상냥한 표정.
여자는 갈색 염색 머리, 다소 무뚝뚝한 인상, 앞치마의 왼쪽 하단에 불에 그을린 자국.
손님은 나 외에 한 남성.
인상을 찌푸리고 큼지막한 수첩에 무언가를 적고 있다.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그 남자를 더 관찰한다.
흰 드래스셔츠에 네이비 정장 바지, 검은 양말, 검은 구두.
전형적인 회사원의 차림이지만 헤어스타일은 컬이 제멋대로인 펌 헤어.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거래처를 도는 게 주업무인 영업사원의 분위기다.
나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이 남자에게 이상하게 관심이 간다.
나이는 나랑 비슷한 정도.
결혼은 했을까.
직장을 갖고 결혼을 하고 어느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것.
나는 궁금하다.
나도 그런 삶을 산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 나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향을 느낀다.
그리고 그때 왕이 내게로 다가온다.
"잠깐 앉아도 될까요?"
알바생 여자가 내 앞에 앉는다.
"왕?"
내 물음에 왕은 대충 고개로 대답한다.
그러곤 앞치마 주머니에서 메모지를 꺼내서 이렇게 적어 보여준다.
'우리 만난 적 있잖아요.'
나는 슬쩍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글씨다.
무척 여성스러운 글씨.
정교하지만 사려깊은 모양새의 글씨.
글씨만으로도 벌써 사랑에 빠질 지경이다.
"자, 그럼 형제를 부르겠습니다."
나는 그 즉시 형제에게 연락을 한다.
형제는 곧 오겠다고 한다.
나는 왕에게 그렇게 전하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어차피 우리 사이엔 할 말이 없다.
피차 알고 싶은 것은 있겠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순간 나는 왜인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섬과 같은 나의 삶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꺼낸다.
나의 음악과 나의 여자들과 나의 여정에 관하여.
왕은 말하지 않고 경청한다.
무뚝뚝한 표정에 아무런 변화도 없다.
그 표정이 마음에 든다.
나는 더더욱 열의를 다해 나에 대해 얘기한다.
심지어 사랑에 관해서까지 지껄인다.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나의 잘못과 나의 욕망에 대해 지껄인다.
정치인의 정부였던 여자에 대해 말하던 대목에서 형제가 도착한다.
형제는 말없이 내 옆자리에 앉는다.
나는 말을 멈추고 왕과 형제를 한 번 씩 쳐다본다.
그녀들도 한 번 씩 나와 눈을 맞춘다.
이윽고 나는 일어선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카페를 나선다.
그길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긴다.
세안을 하고 면도를 한 뒤 캐리어와 트럼펫을 끌고 나간다.
한 가지 신탁을 마쳤다.
이제 남은 신탁을 완수해야 한다.
"대장장이를 만나라. 시험이 시작되었다."
나는 스스로 소리내어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나는 왕의 무뚝뚝한 얼굴을 떠올린다.
그녀의 상냥한 글씨도 떠올린다.
형제는 우리가 친구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비로소 미소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