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호텔의 주차공간을 지나 건물 뒤편으로 돌아 출입구를 찾아낸다.
출입문은 계단을 여덟 개 쯤 올라야 들어갈 수 있다.
말이 호텔이지 이곳에 여행 캐리어를 들고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막 계단을 오르려던 참에 문이 열리고 한 여자가 나타난다.
이런 대도시의 러브 호텔에서 허리까지 오는 특대형 캐리어를 들고 나온다.
'외국인이라면 더 저렴한 비즈니스 호텔을 이용할 텐데.'
나는 그 여자가 계단을 내려오길 기다린다.
가방 자체도 무지막지하게 크지만 내용물도 만만찮게 무거운 모양이다.
호리호리한 여자가 쩔쩔매며 한 계단 씩 짐을 끌고 내려온다.
잠시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잠자코 기다린다.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니 제법 미인이다.
계단을 다 내려온 여자가 나에게 시선을 던진다.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캐리어를 끌고 하얀 세단을 향해 간다.
벤츠. 차종은 모른다.
하여튼 어울리지 않게 큰 캐리어만큼이나 어울리지 않게 큰 차다.
여러모로 이 장소엔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다.
익명의 대도시, 익명의 러브 호텔, 익명의 여인, 크나큰 여행 가방, 크나큰 독일 세단.
나는 계단을 가볍게 오른다.
나의 캐리어는 크기도 작고 내용물도 가볍다.
나는 여러모로 이런 장소에 어울리는 인간이다.
익명의 대도시, 익명의 러브 호텔, 익명의 여인과 우연히 스쳐 지나는 남자.
이런 게 내게 어울리는 역할이다.
아무 바에서 아무 곡이나 연주한다.
아무 여자와 자고 아무 때고 떠난다.
이 도시에서 나는 아주 잠시 머무를 것이다.
연주할 바를 찾을 필요도 없다.
이 도시, 이 러브 호텔에서 잠시 기다린다.
그러면 '형제'가 나를 찾아온다.
'형제'는 왕을 만나고 싶다고 할 것이다.
그럼 나는 그를 왕에게 데려다 준다.
그게 이번 신탁의 내용이다.
그러나 나는 한낱 메신저일 뿐 형제가 누군지 왕이 누군지 알지 못한다.
이제껏 수많은 신탁을 전달해 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전달이었지 이렇게 누군가를 누군가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해본 적은 없다.
'신탁 전달자에서 신탁 안내자로 승진이라도 한 걸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알 방도가 없다.
나는 내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신탁이 있기에 생명을 얻었고 신탁이 있기에 생명을 이어갈 뿐.
신탁이 끊어지면 나의 생명도 끊어진다.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로 향한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나는 특대형 캐리어를 든 여자의 환영을 본다.
그 여자는 입을 열고 내게 말한다.
"이 가방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아세요?"
"아!" 순간 나는 몸을 돌려 뛰어 나간다.
나는 이미 형제를 만난 것이다.
밖으로 뛰어 나가자 눈처럼 하얀 독일 세단이 계단 옆에 서있다.
내가 다가서자 조수석 창문이 내려간다. 조수석에 그 여자가 앉아 있다.
"타세요. 운전석에. 나를 안내해야죠. 왕께." 여자가 뚝뚝 끊어지는 말투로 말한다.
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인 뒤 내 짐을 슬쩍 보고 차 뒤쪽를 가리킨다.
트렁크가 열린다.
나는 내 작은 캐리어와 트럼펫을 끌고 차 트렁크 쪽으로 간다.
'그 캐리어다.'
나는 두툼한 그녀의 캐리어 위에 내 짐을 포갠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 트렁크를 닫는다.
내가 운전석에 타자 그녀가 말한다.
"반가워요. 형제에요. 당신은 메신저죠? 왕한테 가기 전에 들를 데가 있어요."
형제는 차량 내비게이션을 조작한다.
목적지가 정해졌다.
나는 메신저일 뿐 신탁의 의도는 알지 못한다.
형제의 캐리어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알지 못한다.
내가 앞으로 가야할 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한다.
딱 한 가지만을 알 뿐이다.
"어차피 신탁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망령이 또 다시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