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색 기내용 캐리어에 트럼펫 케이스를 얹고 끈다.
내가 가진 물건은 이게 전부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완전무결한 소지품.
페이가 적당한 가게를 하나 골라 정기적으로 연주를 한다.
음악은 사장 맘대로. 재즈도 좋고 팝도 좋고 뽕짝도 좋다.
거기 손님 중에 적당한 여자를 골라 꼬신다.
혼자 살 것. 무얼 하든 돈이 꽤 있을 것. 이게 조건이다.
그 여자 집에 들어가 산다.
내 돈은 거의 안 쓰기 때문에 통장엔 어찌됐든 돈이 모인다.
그렇게 몇 달 살다 보면 여자가 달라진다.
아기 얘기를 슬쩍 꺼낸다든가 결혼한 친구 얘기를 한다든가.
그때 발을 뺀다.
최대한 쿨하게 이별통보를 하고 지체없이 집에서 나온다.
그길로 가게로 가 정산을 받고 사라져 버린다.
SNS는 전혀 하지 않는다.
이메일도 거의 쓰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새로 만든다.
그러니 휴대폰만 바꿔 버리면 내게 연락할 방법은 없다.
다른 지역으로 옮겨서 이 짓을 되풀이한다.
딱 한 번 같이 살던 여자와 다시 마주친 적이 있다.
유난히 집착이 심하던 여자라 순간 무서웠다.
그런데 의외로 잘 지내냐며 안부만 묻더니 가버렸다.
시간이 약인 것이다.
나에겐 부모가 없다.
형제도 없다.
뻔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친구도 없다.
여자를 사랑한 적은 있다. 여러 번.
사실 같이 살았던 여자 대부분 진심으로 사랑했다.
짐을 싸서 집을 나올 때마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그녀들이 아팠을 만큼 나도 아팠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 수밖에는 없다.
내게는 숙명이 있다.
신탁을 듣고 신탁을 전달해야만 하는.
방금 도착한 이 도시에는 한 번 왔던 적이 있다.
나보다 열 살 위인 화가하고 두어 달 살았었다.
그녀는 이 지역의 유지라 할 만한 회장님의 애인이었다.
당시는 선거철이었고 그 회장님이 마침 지역구에 출마했었다.
당연히 몸 사리느라 애인은 못 만났던 것이다.
선거가 끝날 쯤 자연스레 헤어지게 되었다.
그 회장님이 당선되었는지 어떤지는 모른다.
어쨌든 이 도시에 만날 사람이 있다.
신탁이 전해준 대로 행해야 한다.
"신탁은 틀림없이 이루어진다."
망령이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