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공간 체스의 농부의 방.
메신저가 앉았던 자리에 이번에는 왕이 앉아 있다.
농부는 자기 책상에 놓인 서류를 들여다 보고 있다.
잠시 동안 에어컨의 윙 하는 소리만 들린다.
농부가 입을 연다.
"가장 최근에 맡았던 업무는 무엇이었나요?"
왕은 특유의 느릿하고 상냥한 말투로 대답한다.
"대교에서 뛰어내리려고 하는 고3 학생에게 메시지가 담긴 USB를 전달한 일입니다."
간결하게 사실만을 전달한 지극히 사무적인 대답인데 어쩐지 상냥하게 들린다.
농부는 돋보기 안경을 벗으며 왕을 정면으로 본다.
유심히 본다.
"메신저가 독일의 아이였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아니요, 저는 이번 몸 이전의 기억은 아예 없습니다.
듣기론 제 스스로가 선택한 일이었다고 하더군요.
메신저의 경우와는 달리요."
"아, 그건 그렇죠. 알고는 있었습니다.
다만, 유난히 메신저의 일에 여러 차례 엮여 있었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서류상으로요."
"그건 몇 해 전 메신저와 우연히 겹치는 업무를 한 이후의 일입니다.
그 이후 카산드라를 만났고 카산드라가 직접 제게 귀띔을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내 업무는 거의 메신저의 업무와 직간접적으로 겹칠 거라고요."
"그럼 히틀러가 메신저의 몸을 갖고 한 일도 목격했나요?"
"내 전부 봤습니다. 그게 한 동안 제 주 업무였습니다."
"히틀러가 형제를 죽일 때 어째서 나서지 않았나요?"
"그것까지 카산드라가 미리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미리 손을 써두었으니 관여하지 말라고요."
농부는 의외라는 표정을 잠시 짓는다.
농부는 카산드라의 집사다.
그는 웬만한 중요한 일은 다 안다.
카산드라는 보통은 중요한 일 만큼은 농부와 꼭 상의를 한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일을 단독으로 처리했다?
뭔가 패턴에 어긋난다.
농부는 패턴이 어긋나는 일이 무척 싫다.
"달리 메신저에 대해 할 말이 있으신가요?"
"딱히 없습니다.
아, 메신저의 연주를 직접 들어본 건 아마 저뿐이지 싶은데.
그게 꽤 괜찮습니다.
밤이 새도록 듣고 싶은 편안하고 창의적인 솔로를 해요.
기회가 되시면 한 번 직접 들어보세요.
재즈 팬이시라면."
"재즈요? 저는 음악은 잘 모릅니다."
하면서 서류를 닫는다.
서류를 닫는 순간 내 눈이 떠진다.
번쩍하고.
나는 체스판 문양의 천정을 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독일. 독일의 소년. 그 보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