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6면이 체스판 문양인 방안에 검은색 의자에 앉아 있다.
맞은 편에는 아이돌 노릇을 하고 있는 세계의 왕 히틀러가 흰색 의자에 앉아 있다.
방 안에는 그 외에 아무런 가구도 장식도 없다.
나와 히틀러만이 모든 말을 잃은 양측의 왕들처럼 덩그러니 앉아 있다.
안내자의 차에 타서 눈을 가리고 잠든 채로 이 방까지 왔다.
그러므로 이곳이 지구 상에 어디에 있는 곳인지 그 자체를 모른다.
히틀러가 입을 연다.
"고생했어. 좀 더 자주 만나고 싶지만 알다시피 내가 이제 꽤 바쁜 몸이 되어서."
나는 옛 친구에게 말을 건네듯 가볍에 묻는다.
"그러게, 춤은 언제 배웠대?"
"춤? 그런 거 몰라. 그저 자네와 했듯 몸을 바꾸고 있을 뿐이야.
공연을 하거나 할 땐 전문 댄서가 이 몸에 들어오고 그러는 사이 나는 그 몸으로 일을 보지.
인터뷰 같은 게 잡혔을 땐 전문 인터뷰이가 이 몸을 차지하고 나는 그 몸으로 일을 보고.
나름 바쁘다고. 거울 볼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
"그런 귀찮은 일을 해가면서 뭘 하려는 거지?"
"귀찮긴 하지. 그래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야.
내 오랜 숙원이랄까.
원래는 눈에 안 띄는 곳에서 해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점점 세상이 그런 세상이 아니게 되어 가.
눈에 안 띄고 뭘 하는 게 더 힘들어.
차라리 눈에 제일 잘 띄게 만들어 놓고 일을 벌려 나가는 게 편하더라고.
내가 뭘 하려 하는지는 점차 알게 될 거야. 미리 알면 뭔 재미?"
"그럼 나를 부른 이유는? 메시지가 있나?"
"아니, 메시지 전달 정도라면 굳이 만나지 않고도 전할 방법이 많잖아.
부른 건 일단 보고 싶어서야.
오랜 내 친구를.
줄 선물도 하나 있고."
"선물?"
"그건 우리 직원들이 설명해 줄 거야.
내가 약속했었잖아.
신탁의 참견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그 방법을 내가 안다고.
나야 신탁의 명령을 듣는 쪽을 내 자유 의지로 선택한 쪽이지만.
우리 메신저 님께서는 오랫동안 궁금해 했잖아, 왜 이런 신세인 건지를."
그렇긴 하다.
오랫동안 궁금해 했다.
너무 오래 되어서 이젠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을 지경이 됐다.
그런데 이제야 그걸 알게 되게 생겼다.
히틀러는 쓸 데 없는 말들을 약 20분 정도 더 하더니 인사도 없이 나가 버렸다.
그리고 여러 명의 직원들이 와서 나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그들은 내게 이렇게 짧은 한 마디로 설명했다.
"자고 일어나시면 다 기억나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