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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공포물
카산드라
작가 : 건망고
작품등록일 : 2017.11.16

앞날을 훤히 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를 믿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저주.
언어 소통의 종말.
극한의 공포심은 고립감에서 온다.
군중의 한가운데 불통의 무력감이 그를 낭떠러지로 내몬다.

 
이자카야 농부와 상상 공간 체스
작성일 : 24-05-02 15:43     조회 : 73     추천 : 0     분량 :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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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스름한 초저녁.

 골목길을 걷는 여성.

 가까이 보면 왕이다.

 그녀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길을 걷는다.

 그러나 산책 같아 보이진 않는다.

 

 20분 쯤 걸어서 골목 어귀에 있는 이자카야에 들어선다.

 간판엔 두 글자, 농부.

 손님은 세 명.

 남자와 여자 한 테이블.

 또 다른 여성 한 테이블.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왕은 곧바로 여성 혼자 앉은 테이블에 앉는다.

 

 "오랜만."

 왕이 말을 건넨다.

 여성은 고개를 들어 응수한다.

 "응, 오랜만."

 

 왕은 특유의 멜로디 없는 상냥한 말투로 술을 주문한다.

 "레몬 사와 한 잔이요."

 그러곤 앞의 여성을 똑바로 응시한다.

 

 이제 왕의 시선.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은 낯선 얼굴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알아차릴 수 있다.

 그녀는 형제다.

 히틀러와 메신저가 몸을 서로 바꾸듯 누군가와 몸을 바꾼 형제.

 

 둘은 별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저 각자 앞에 놓인 술을 마시며 서로를 응시할 뿐.

 

 

 나는 체스판의 건물에 들어와 있다.

 1층엔 입구가 하나도 없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복도에 우편함이 단 한 개 있다.

 우편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상상 공간 체스.

 

 엘리베이터를 누르고 기다린다.

 금세 문이 열린다.

 들어서자 아무런 표시 없이 단 한 개의 버튼만 있다.

 누른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인다.

 열리자 그 앞에 곧바로 리셉션 데스크가 보인다.

 

 프라모델 같은 여성 두 명.

 그들을 향해 걷는다.

 상냥한 공산품 미소.

 "안녕하세요. 상상 공간 체스입니다. 어떻게 오셨나요?"

 

 나는 머뭇거림 없이 곧바로 말한다.

 "이곳은 히틀러의 공간인가요?"

 

 상대도 거침 없이 말한다.

 "아니요. 이곳은 카산드라의 공간입니다.

 메신저 님께 닿기 위해 히틀러의 이미지를 차용했을 뿐.

 이곳은 카산드라의 공간입니다.

 상상 공간 체스에 잘 오셨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그녀는 데스크에서 일어서서 나를 안내한다.

 안쪽의 사무 공간의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손짓한다.

 나는 홀린 듯 그대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말끔한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이 책상에 앉아 있다.

 책상 맞은 편에 나를 위한 의자가 한 개 놓여 있다.

 "앉으시죠."

 나는 앉는다.

 

 "저는 농부입니다. 카산드라의 집사.

 그녀의 일을 이것저것 돌보는 직책이죠."

 거기까지만 말하고 나를 똑바로 본다.

 한참을 말 없이.

 

 나도 딱히 말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

 기 싸움을 하려는 것도 아니고 기색을 살피는 것도 아니다.

 이쪽 일은 어차피 이렇다.

 내쪽에서 무엇을 해보려 하는 건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나는 그저 적절히 대응하면 된다.

 속 편한 입장이다.

 

 이윽고 농부가 입을 연다.

 "이 장소를 알려드리는 것은 카산드라의 뜻입니다.

 신탁의 뜻도 아니고 히틀러와도 관계 없어요.

 되도록 히틀러는 모르는 편이 낫습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것에 저도 유감입니다.

 

 제가 알기로 히틀러 쪽에서 딜을 걸고 그것에 동의하셨지요?

 카산드라는 그 부분에 대해선 반대하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의중이 무엇이든 그저 듣는 것만으로 무슨 큰일이 날 것도 없으시다고요.

 그리고 신탁의 뜻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무엇인지는 두고 보시겠다고 하십니다."

 

 요컨대, 히틀러 쪽에서 무슨 일을 벌이든 두고 볼 뿐 놀아나지 않겠다는 자신감이다.

 

 농부는 다시 빤히 날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저는 아주 오래 전부터 당신을 봐왔어요.

 카산드라가 특별히 보살피라고 하셨었거든요.

 그립습니다 그때가.

 당신의 최초의 몸이 독일의 어린 아이였을 때가요."

 

 어, 나는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 참, 이번 몸 이전의 기억은 없으시지요?

 이런 저런 말들은 나중에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럴 허락은 받지 못했으니까 저로선 함부로 말할 수는 없거든요."

 

 이미 함부로 몇 마디를 했다.

 궁금하다.

 그러나 더 묻지는 않는다.

 

 "자, 이제 가보세요. 아마 한 동안은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히틀러에게 더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거든요.

 아마 그 일을 다 처리하기 전엔 당신을 그쪽에서 부르는 일 없을 겁니다.

 오늘은 이 공간을 보여주는 게 제 일이었습니다.

 아마 카산드라께서 필요하실 때 다시 부르실 겁니다.

 그때 또 만납시다."

 

 농부는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인다.

 나는 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어차피 신탁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은 신탁의 뜻대로 된다.

 카산드라는 신탁의 뜻을 아는 유일한 인간이다.

 나는 그런 그녀와 양방향 소통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이다.

 다만 어째선지 그녀는 내게 직접 말을 걸어온 적은 없다.

 할 수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나는 언젠가 그녀를 직접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때 해야 할 말들이 많다.

 이미 내 마음을 듣고 있겠지만.

 

 농부의 말대로 한 동안 히틀러는 내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말은 사실과 달랐다.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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