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자들이 세계를 운영하고 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내 몸은, 분명 수배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혐의를 완벽히 벗었다.
갑자기 새로운 용의자가 대두되었고 금세 잡혔으며 바로 자백했다.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른 속도로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마치 누군가 짜놓은 시나리오대로 연기만 하듯.
그래서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다시 마음껏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되었다.
너무 쉽다.
뭔가가 너무 쉽다.
이들은 이토록 쉽게 세계를 운영하고 있었다는 거다.
어쨌든 나는 딱히 할 일도 없어졌다.
아직 히틀러는 나에게 카산드라에게 전할 메시지를 알려주지 않았고 나를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그저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할 일이다.
그러다 나는 봐야만 했던 표식을 기어이 마주하게 된다.
참 웃기는 게 이런 거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보일 때가 있다.
자전거를 한 대 사야지 마음 먹은 다음에야 늘 다니던 길에 자전거 샵이 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된다.
지금 내가 선 이 길은 몇 번이고 이미 지나갔던 길이다.
낮에도 지나간 적이 있고 밤에도 지나간 적이 있다.
이 건물 앞을 지난 것만 20번은 넘을 거다.
그런데 이제야 보인다.
표지가.
이 건물 오른쪽 벽에 아무런 글자도 없이 검은색과 흰색의 정사각형이 번갈아 놓여있음이.
체스판.
표지다.
이 건물은 내게 손짓을 한다.
들어오라고.
그리고 나는 그에 응한다. 주저 없이.
어차피 신탁은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은 그의 뜻대로 된다.
신탁은 표지와 상징으로, 때로는 환영으로 우리들을 이끈다.
나는 42명의 보육원 출신 중 한 명이고 신탁을 전하는 메신저다.
그로부터 벗어나려면 히틀러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히틀러가 나를 가둔 방에 있던 체스판.
그게 이 건물의 외벽에 있다.
이것은 신탁이 내게, 즉 카산드라가 내게 보내는 메시지다.
히틀러가 내 편인지, 카산드라가 내 편인지 모른다.
아니 결국 둘 다 내 편은 아니다.
나는 태생적으로 외로운 자다.
겨우 찾은 형제는 살해당했고 왕은 행방을 모른다.
나는 저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렇게 움직이는 자들이다.
형제도 그렇게 하다 죽었을 거고 왕도 그렇게 하고 있을 거다.
히틀러는 그것에 저항하려고 하고 카산드라는 그에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응의 한 수가 나라는 말을 움직이는 거라면 나는 따를 수밖에 없다.
나는 반 정도는 자유의지를 박탈 당한 체스판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