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눈을 떴을 때도 천정이 체스판 패턴이었다.
다만 먼저 방과 다른 것이 있다면 천정뿐 아니라 벽도 이번엔 체스판이었다.
바닥도 체스판인지 몹시 보고 싶다.
그러나 나는 온몸이 결박된 상태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므로 확인불가다.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 히틀러의 몸에 있다.
이들은 이 몸에 진정제를 투여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여러 검사를 한 뒤 여기 눕혀두었을 거다.
몸에 여러 가지 의료 장비들이 내 생체 신호들을 수집하고 있다.
이로서 확실해진 것은 이들에게 히틀러의 몸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 몸을 망가뜨릴까봐 매우 기민하게 대응했다.
지금도 나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결박해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역시 더 중요한 쪽은 히틀러의 의식 쪽인 모양이다.
히틀러의 의식은 벌써 며칠 동안 여기로 돌아오지 않고 내 몸을 쓰고 있다.
아니 어쩌면 내 몸과 다른 몸 사이에서 체스를 두고 있다는 가정도 해볼 수 있다.
어쨌든 나는 이 침대에 꼼짝 없이 누워 체스판 천정만 바라보고 있다.
이참에 상상 체스라도 둬볼까 태평한 생각이 들 때 쯤 천정이 열렸다.
역시 이 방도 거대한 택배상자다.
천정이 열리고 사다리차 같은 데 달린 것 비슷한 장치가 내 몸을 실어 온다.
내 몸이다.
지금 이 모델 같은 몸에 비해 한없이 보잘 것 없는 몸.
아예 버리고 이 몸을 준다고 하면 기꺼이 그렇게 할 만한 몸.
그렇지만 싫어도 나의 삶 자체를 겪어온 진짜 내 몸.
그 몸이 실려 온다.
그 몸은 장치에서 내려서 내게 다가온다.
나야 히틀러, 라고 그는 말한다.
마치 원래 잘 알고 있는 사이라도 되듯이.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럼 알지.
카산드라를.
내 아내인걸.
내가 이 세계의 왕이고 그녀는 왕비야.
이 세계의 진짜 왕과 왕비."
나는 입을 열어 응수한다.
"모델 몸을 가진 왕이라니 부럽군.
그런데 그 왕이란 분이 하는 일이 대체 뭐지?
세계를 파괴하는 일인가?"
히틀러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입을 연다.
"우리는 밸런스를 맞추는 작업을 해.
인간들이 완성의 길로 가려하면 그러지 못하게 막고.
인간들이 파멸의 길로 가려하면 그러지 못하게 막고.
왕비는 신탁을 듣고 나는 판단을 하지.
알다시피 필요한 행동은 너희가 하고.
그런데 가끔 유희 삼아서 내가 직접 나설 때도 있어.
워낙 성가신 일이라 여러 가지 안전 장치가 필요하긴 하지만."
나는 웃는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가 없다.
너희가 뭐라고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가.
완성의 길은 뭐고 파멸의 길은 뭔가.
어차피 세계는 무작위의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연 선택과 경제 논리 등이 뒤섞여 사회가 전개되는 게 아닌가.
무슨 균형을 맞출 일이 있는가.
내가 비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자 히틀러가 말한다.
"메신저 너는 보육원 시절부터 남달랐어.
다른 녀석들과는 아예 달라.
의외성이 있어.
응당 물어야 할 것은 묻질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리지.
다 안다는 듯한 표정.
아니 알 필요 없다는 그 표정.
그게 나는 참 싫어.
좋아, 그럼 내쪽에서 질문을 하지.
너는 내가 너를 왜 살려둔다고 생각해?
너에게 무슨 가치가 있어서?
얼마든지 이 자리에서 끝내버릴 수 있는데."
나는 가만히 생각한다.
그리고 내 마음에 떠오른 그 말을 기어이 한다.
"내가 카산드라에게 발신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히틀러는 씨익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