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의 보잘 것 없는 내 몸으로 돌아와 있다.
모자와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골목길을 바삐 걷는다.
나는 수배중이다.
정확히 말해 이 몸은 수배중이다.
이 몸은 여자를 죽였다.
작은 중소 기업에 15년을 다닌 착실한 여자다.
20살부터 그 회사를 다녔고 한 번도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는 여자다.
그 여자는 수수한 편이었고 자기만의 라면 레시피를 100가지 쯤 갖고 있다고 했다.
나는 마음이 무거웠다.
나는 왜 하필 그런 착실한 여자를 골랐을까.
히틀러가 나에게 우호적일 가능성이 현저히 낮은 상태였는데.
나는 계획이 없었다.
나는 안일했다.
아니, 안일할 수밖에 없었다.
신탁은 어차피 다 안다.
아무리 철저한 계획을 세워도.
그러므로 신탁과 대응하는 유일한 해법은 이거다.
즉흥적으로 행동할 것.
나도 왜 그런 지 모를 행동을 할 것.
그리고 나는 지금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
왠지 전에 일했던 재즈바 사장을 만나러 가고 싶었다.
매일 유럽 축구만 보고 유럽 축구 얘기만 하던 마르고 키작은 그 남자를.
그 남자는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정말 모르겠다.
"너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잖아.
친구도 변변히 없는 것 같고.
만일 네가 무슨 일인가를 저지르고 도망다녀야 되는 입장이 되면
나를 찾아와.
내가 네 형제 노릇을 해줄게."
어떤 근거로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를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 나는 뭘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 몸에 멋대로 들어온 자들이 꾸민 일일 뿐.
그래도 어쨌든 나는 몸을 숨길 곳이 필요하다.
그리고 숨긴다는 키워드가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
이윽고 가게 앞에 도달한다.
문을 밀고 들어간다.
어, 음악 소리가 들리질 않네.
지금 영업시간인데.
가게 불은 켜져 있다.
거기에 사장은 없다.
다만 가운데에 시커먼 형상이 있다.
천정에서부터 긴 줄이 내려와 있고 거기에 무언가 매달려서 흔들린다.
두 걸음 앞으로 가본다.
여자다.
여자의 시체다.
시체가 천정에 매달려 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선다.
그건 형제다.
천정에 매달려서 흔들리고 있는 검은 옷을 입은 형제다.
사장의 말소리가 다시 떠오른다.
"내가 네 형제 노릇을 해줄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다만, 그 논리는 내가 절대 간파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