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주신이라는 단어가 있다.
만물의 형체로 나타나는 신.
세상에 구체화된 형태를 지닌 신.
특정한 물체에 깃들어 있는 신,
우리가 익숙해 하는 대부분의 신들이 이런 물주신이다.
그러니 '그렇지. 신은 저런 모습일거야.' 하고 어떠한 형체를 떠올릴 수 있다.
그럼 생각해보길. 물주신과는 다른 신도 있기때문에, 물주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렇다. 있다.
물주신들은 실체화된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데 반해,
반대편의 그 신들은 형태도 없고 이름도 없고 어떨 땐 존재 자체의 개념마저도 흐릿하다.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지말자.
신의 입장에서는 굳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할 의무도 없고
애초에 인간이라는 것들에 대해서 한오라기만큼의 관심도 가지지않는 신이 대부분이다.
그 신들은 거진 과학으로 자연법칙으로 알려져있고, 강하며 거부할 수 없다.
흔히 말하는 기적이란, 이따금 이러한 존재들이 변덕을 부려 자신의 의지를 드러냈을 때다.
인간으로 형상화할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이 많은 몇몇 신과 달리
이러한 대부분의 비물주신들은 논리며, 정의며, 선악에서 벗어나 있다.
근래에 들어, 인간에게 관심을 보이며 비물주신에서 물주신으로 변모 중인 신들도 있다.
틈의 신과 떨어지는 신이 그러하다.
간혹 어떤 틈, 문틈이나 벽틈 따위에서 끈덕지는 미묘한 시선을 느껴 본 적 있는가.
그 시선의 주인은 틈의 신이다.
틈의 신은 세상 모든 비밀누설과 발각의 신이며, 고양이와 집벌레의 신이고, 은밀함과 변태적 시선의 신이다.
균열의 신이며 붕괴의 신이기도 하고 이따금 기회의 신, 보물의 신, 악행시작의 신이다.
틈의 신은 형체가 없다.
그보다, 틈의 신이 형체가 있다해도 볼 수가 없다.
비밀누설과 발각의 신이기에 역설적으로 어떠한 시선에서도 자유롭고
자기 스스로 드러내지않는 이상 절대로 볼 수 없다.
게다가 고양이와 집벌레의 신이니, 그 성격에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낼리 만무하다.
예상하기로는 딱히 인간이 좋아할만한 모습은 아닐 듯 하다.
틈의 신도 가끔 은로의 집을 방문한다.
세상 모든 비밀을 지닌 그가 인간을 찾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세상이 너무나 완벽하게 돌아가면, 심술이 나서 찾아오곤 한다.
틈이 없다.
서로를 속이는 비밀이 없고, 화합을 이뤄 분열이 없고, 숨겨둔 보물이 드러나고 변태적 시선이 정의 앞에 거두어지면 틈의 신은 투정을 부린다.
그런데 그렇게 완벽한 세상일리 없지않나.
틈의 신이 찾아온 이유는 이 진귀한 상황을 즐기고, 음란한 시선으로 지켜보기 위해서다.
망각의 장막이라니, 스스로에 대한 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완전한 신뢰에 대한 불신의 시작이다.
어째서 지워진 기억이 있는걸까.
끝일까? 잊어버린 기억이 더 있는데도 모르는 것이라면,
왜 신이 직접 그 기억을 막고 있었나.
은로는 서재에 앉아있다.
먼지가 한움큼 덮힌 나무상자가 책상 위에 올려져있다.
나무상자 속에서 일기장, 빛바랜 신문지뭉치, 누군가 정리해둔 듯한 자료집 등이 빼곡히 꽂혀있다.
틈의 신이 책장과 책장 사이 틈으로 빼꼼 편지지를 건낸다.
신과 싸울 여력은 없다.
은로는 책장으로 가 편지지를 뽑아든다.
편지지에는 인터넷 용어와 이모티콘으로 가득한 조롱과 놀림이 가득하다.
그 편지를 손에 쥐고 서적 틈 사이로 흘러가는 어두운 형체를 바라본다.
틈의 신은 비열한 구석이 있다.
누군가와 동행한 것 이다.
책 한 권이 툭 떨어진다.
혐오도 최고치를 기록하는 신이 등장한 것.
한 권의 책이 서재 바닥 카펫을 친다.
똑같은 둔탁음이 수 차례 더 떨어진다.
떨어지는 신이 왔다.
모든 떨어지는 것들의 신, 과학발전의 신, 번영의 신. 깨닫는 것들의 신.
상상이 가는가.
뉴턴의 눈 앞으로 사과가 되어 떨어지기 전 까지 세상의 모든 중력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였다.
그의 관심을 끈 건 무엇이였을까.
깨달음과 완성의 신이자 끝의 신이다.
그의 진면목은 꽤나 근현대에 들어서야 드러났다.
고층빌딩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그 위에서 목숨을 던지며 그가 스스로 지은 마지막 이름은 자멸의 신이다.
이전까지는 관할 구역이라는 게 있었다.
스스로 죽음을 택하며 산벼랑이나 해안가절벽에서 몸을 투신하면,
그 죽음은 바다신이나 산신에게로 귀의되었다.
일종의 자연사로 취급되어왔다.
그러한데 인류 스스로 쌓아올린 천마루에서 인간 스스로 뛰어내림은 모두 떨어지는 것들의 신이 가진다.
빠르게 성장하는 인류문명이 자멸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살하는 모든 것들에게 박수를!
떨어진 책은 바닥에 올곧게 펴져서 책장이 드러난다.
죽음의 신으로 착각되어 망각의 신이 그려진 저승사자 그림,
색정소설의 한 페이지, 떨어진 충격에 찢어진 동화책까지.
신들은 이런 식이다.
그냥 인간으로 변해서 혀를 굴려 말로 전달해도 충분한 의사소통을,
이런 기괴한 방법을 총동원하여 번거롭게한다.
신들이 인간형태가 되야할 이유는 없다. 근거도 없다.
왜 그러냐. 묻지마라. 신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건 결과임과 동시에 원인임을 알아야한다.
방금까지 통하지 않던 세상논리라도 신이 그렇게 한다면 지금부터라도 우주법칙인 셈이다.
은로가 주섬주섬 책을 주워 책장에 꽂으면 또 다시 후두둑 책이 쏟아진다.
떨어지는 신이 혐오도 최고인 이유가 이 것이다.
떨어지는 신은 상대를 이해하지않고, 왜 자신이 알려주었는데 알려하지않느냐. 식으로
당하는 사람이 떨어진 책들로 모든 정황을 이해하고 깨달을 때까지 이 멍청한 짓을 반복하게 된다.
벌써부터 느껴지는 뻐근함을 견디며, 떨어지는 책들을 줏어올린다.
무시해버리고 책을 놔둬도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책을 떨어뜨리지않는데,
그러나 그 다음날 집안의 모든 물건들이 땅바닥과 키스하고있는 광경을 보고 말 것이다.
이럴 때는 둘 중 하나다.
수수께끼를 풀어, 떨어지는 신을 만족시켜주던가.
거울너머 존재를 찾던가.
거울너머 존재는 신이라 부르기 애매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새삼 더 없이 무능력하기 때문이다.
영원히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처럼, 거울 뒷편에서 보이는 거울면 바로 옆 안 쪽에 찰싹 둘러붙어
그 거울을 보며 자신을 가다듬는 인간을 비웃는 낙으로 산다.
은로는 서재를 나와 자물쇠로 문을 잠근 후, 하얀 고무장갑을 낀다.
오래 방치해두어 고무장갑에서는 물냄새가 난다.
고역이지만 바닥에 떨어져 박살 날 가재도구를 다시 사드리는 일보다는 덜 번거롭다 위로한다.
은로는 옷방의 거대한 전신거울 앞에 선다.
고풍스럽고 오래된 거울이라면 거울너머의 존재가 드글드글하다.
미끌거림의 신이 준 고무장갑은 유용하다.
은로는 하얀 고무장갑 낀 팔을 거울 속에 밀어넣는다.
거울 속을 뒤적이다보면,
현실에서는 나무로 만든 옷걸이가 거울너머에서 집어보니 물컹물컹한 느낌이 든다.
거울너머의 존재다.
나무옷걸이 모양새의 젤리, 거울너머의 존재, 이 물체인지 신인지 뭔지를 들고 서재로 향한다.
걸쇄를 풀고 서재문을 연다.
거울너머의 존재를 서재 안으로 던져 넣고 재빠르게 문을 닫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않지만, 등을 대고 있는 문으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얼마 안가 모든 진동이 그치자 서재 문을 열어본다.
백과사전 칸에 꽂혀있는 틈신의 편지,
책장 아래 쏟아져 펼쳐진 책들, 거울너머의 존재는 모습을 숨긴 뒤다.
거울너머의 존재와 신들 간의 관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거울머너의 존재와 신들을 함께 두면, 반응이 일어난다.
신들이 거울너머의 존재를 두려워해 떠나간건지,
거울너머의 존재로 인해 만족하고 떠나간건지.
어찌되었건 무슨 상관일까. 은로는 난장판을 정리하고 잠을 좀 잘 생각이다.
새소리가 들려온다.
어느새 잠들었던걸까.
은로는 카펫 위에서 눈을 뜬다. 서재다.
떨어진 책을 정리하려던 차에 넘겨 읽은 책을 보다가
그대로 잠든 모양이다.
은로가 독서를 즐기진 않는다.
읽는 걸 좋아하기보다 책냄새가 좋아 책을 산다.
아니면 언젠간 필요할거란 믿음으로 한 권 두 권 사모으던 책이 서재를 꽉 채워놓았다.
서점을 빙글빙글 돌며 이 책 저 책 의미도 없이 들추다가 충동적으로 한 아름씩 사온 것들이다.
잠들기 직전에 읽던 책을 들어본다.
금방이라도 부숴질 듯한 고서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을 법한 그 낡음.
살짝만 건드려도 먼지가 풀풀 일어난다.
'언제 손에 넣은거더라..'
은로는 손으로 눈을 눌러 마사지하고서 서재 풍경을 살핀다.
어젯밤 그대로 엉망진창이다.
은로는 손에 들린 책을 카펫 위에 털썩 내려놓고 일어선다.
언제 치워도 상관없다.
떨어진 책의 표지에는 채가비망록이라 적혀있다.
은로는 검은 책 한권을 안고서 터덜터덜 걸어 복도로 나선다.
늦은 밤일까. 새벽일까. 창 밖을 본다.
검다. 저 멀리 도시의 전기빛이 희미하게 비친다.
새벽인 듯 하다.
은로는 거실에 다다른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침실로 갈 수 있지만 소파가 너무도 포근해 보인다.
은로는 소파 위에 몸을 던져 눕는다.
푸근하다.
거실의 유리창문 밖으로 달빛이 비친다.
은로는 리모컨을 들어 티비를 튼다.
화면에 여배우들의 얼굴이 지나간다.
케이블방송의 연예가소식 프로그램이다.
평소라면 무시하고 지나칠 방송, 은로는 눈을 반 쯤 감은 채 그 방송을 본다.
차라리가 나올까.
은로는 차라리를 알고 있었다.
담요 속에서 검은 책을 꺼내든다.
'중앙고등학교 99회 졸업앨범.'
은로가 졸업앨범의 중간 부분을 펼친다.
모서리가 접힌 페이지다.
은로는 손가락으로 앨범을 훑어내린다.
졸업생의 사진을 지나고 지나 어느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손가락에 얼굴이 가려져있지만, 아래의 이름은 보인다.
차라리.
은로는 손가락을 슬며시 치워 차라리의 사진을 본다.
수수한 모습이지만, 지금의 얼굴이 그대로있다.
가벼운 미소가 은로의 입가에 번진다.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그 미소를 거둔다.
은로는 눈썹을 살짝 내렸다가 올린다.
은로는 거칠게 다음장으로 앨범을 넘긴다.
서른 명 가량이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다.
단체사진 위로 은로의 손가락이 빙빙 돌다가 멈춘다.
사진 속에서 차라리가 활짝 웃고있다.
은로의 입가에 다시 웃음이 번진다.
은로는 입을 꽉 다물며 평정심을 찾는다.
은로의 손가락이 옆으로 조금 더 움직인다.
손가락은 뒷 열의 남학생의 얼굴 앞에서 멈춘다.
지금과는 많이 다른 헤어스타일이지만,
확실하다.
고등학교 시절의 은로다.
티비화면이 번쩍거리며 졸업앨범을 비춘다.
차라리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차라리에요. 차라리. 진짜 모르는거.. 아니죠?'
"그러는 넌..왜 기억 못하는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