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 어쩔거나, 젊은이? 여기서 판을 끝낼까?”
“무슨 아쉬운 소리? 여기 2000아크체 더 겁니다.”
카잘라 마을의 어느 술집 겸 도박판. 술집 전체가 도박과 게임과 내기당구로 가득찼다. 레가츠 역시 이런 분위기를 타고 어떤 대머리 중년남자와 카드도박을 하고 있었다.
“Gray hair... 돈 갚는다는 게 이런 거였냐?”
카드게임에 열중하는 레가츠를 동양인 여자가 못마땅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응, 그럼 무일푼인 내가 무슨 수로 돈 벌어다 갚을 줄 알았어?”
레가츠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천연덕스레 말했다. 좀비병사들에게 구해준 사례로 레가츠는 입장료를 면제받고 카잘라마을에 들어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강물에 던져버린 동양인 여자의 2500아크체를 갚아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도박이다.
“너... 잃기만 해봐라...”
레가츠의 태도를 보고 여자는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걱정마, 나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 그런 거니까.”
찌릿거리는 여자의 눈총을 눈치 챘는지 못 챘는지 레가츠는 다시 카드판에 몰입했다.
“자, 이제 서로 마지막 패만 낼 차례인데. 어쩔거나 회색머리 젊은이? 지금가지 나온 패는 전부 구린데 한 번 물릴 기회를 줄까?”
상대방 대머리 남작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뇨. 남자가 한 번 질렀으면 끝까지 밀어붙여야 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가죠.”
“그래. 난 분명 기회를 줬어. 그럼 어서 마지막 패를 보이자고.”
자신만만하게 거절하는 레가츠. 대머리 남자는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이 어린 놈의 호구자식. 넌 이제 끝났다. 이미 게임 시작 전에 패를 조작해놨다는 말씀. 넌 뭘 해도 못 이긴다. 냠냠 잘 먹겠습니다~
“네, 그럼 동시에 뒤집어 봅시다.”
“좋아. 하나 둘 셋!!”
냠냠. 이왕에 잘 먹을 거 돈 말고 저 옆의 동양인 여자를 걸라 할 걸 그랬나. 오랜만에 보는 새끈한 여잔데....
“아싸 땄다!!!”
레가츠가 환호성을 질렀다.
“........응?”
대머리 남자는 상황을 깨닫는데 딜레이가 걸렸다. 왜 저 녀석이 환호를 지르지? 저 녀석은 질 수 밖에 없는데... 대머리 남자는 테이블에 펼쳐진 카드패들을 보았다.
"...허억...!!"
헐 회색머리 녀석이 역전을 했다. 말도 안 된다. 이런 상황이 절대 나올 수 없도록 조작을 해두었는데!!!
“Look here!! 여기 4000아크체(1아크체 = 약 100원)나 땄어!!”
“세상에 말도 안 돼.... 분명히 지고 있었는데....”
레가츠는 돈다발을 쓸어 모으며 동양인 여자에게 자랑했다. 예상도 못했던 역전승에 이 시크한 동양인 여자도 얼굴에 놀란 기색이 드러났다. 그녀의 그런 생동감 있는 표정을 보자 레가츠는 더욱 들떴다.
“자, 4000아크체 중에서 여기 2500아크체는 먼저 변제할게.”
레가츠는 여자에게 빚진 돈 2500아크체를 먼저 건넸다. 여자는 재빨리 지폐다발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남은 1500아크체로 맥주나 한 잔....”
“서로 계산 끝났으니 난 이만 갈게.”
쑥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레가츠를 깔끔하게 무시하고 동양인 여자는 먼저 술집을 나갔다.
"아... 아, 기, 기다려!!"
순식간에 또 퇴짜를 맞은 레가츠는 멘탈에 크리티컬이 제대로 들어갔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짐을 챙기고는 헐레벌떡 여자를 따라 술집을 나갔다. 쫄래쫄래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의 등짝이 그렇게 구질구질할 수가 없었다.
“Wait wait!! 좀만 기다려!!”
레가츠는 인파를 헤치고 술집을 나와 겨우 동양인 여자를 따라 잡았다.
“이제 너랑 볼 일 없어. 네 갈 길이나 가, 회색머리.”
하지만 여자는 싸늘무관심냉담으로 일색이다.
“아니... 그게... 그래!! 2500아크체 말고 더 받을래?”
“No necessary.”
“에이 그러지말고 이자 받는 셈 치고요!”
레가츠가 윙크까지 날리고 지폐다발을 내밀었다.
“계산 복잡해져 귀찮아. 그보다 징그러우니까 그 면상 좀 떨어뜨려 줄래?”
눈치없이 들이대는 레가츠에게 여자는 신경질을 냈다.
“으윽.. 징그럽다니...”
“다 큰 놈이 그러지 좀 말지? 그리고 우리 초면인데 왜 이리 친한 척이야? 우리 서로 이름이나 아는 사이야?”
여자는 발걸음을 멈추고 팔짱을 탁 기고는 레가츠를 돌아보았다. 적의가 풀풀 넘치는 그 눈빛을 정면으로 받자 레가츠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맞다...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지... 내 이름은 레가츠 카시튠이야. 너는?”
“....내가 알려줄 것 같아?”
움츠러든 이유가 이거였냐. 여자는 얼탱이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무슨 이리도 눈치없는 놈이 있나 새삼 실감하는데....
“Hey!!!”
레가츠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여자의 양어깨에 손을 뻗었다. 너무나도 뜬금없고 과감한 동작에 여자는 미쳐 대응하지 못했다.
“What’s this!! 이게 무슨 짓...”
“Danger!! 숙여!!”
레가츠는 여자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억센 그의 팔에 동양인 여자의 가녀린 몸이 힘없이 끌려 들어왔다. 그리고
휘슝 쿠당당
여자가 방금까지 있던 자리에 커다란 의자가 굴러 떨어졌다.
“이 미친 주인장이 어디서 손님을 때려!”
“한량놈들아, 외상이나 갚고 손님대접을 바라라!”
“노친네가 보자보자하니까!! 야, 좀 족쳐주자.”
“니네만 쪽수 있는 줄 알아? 우리 종업원들아 다 나와라. 돈 떼먹는 손님은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가르쳐 줘라.”
“네 사장님!”
골목 반대편의 다른 술집에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다. 십 여명의 남정네들이 주먹을 날리고 물건을 집어 던지고 아주 난리가 났다.
“...진상 손님 못지 않은 진상 주인이네..”
그 장면을 보는 여자는 어이가 없다는 인상을 썼다. 외상값을 둔 손님과 주인의 싸움의 언제 어디서나 흔한 일이었지만 저렇게 패싸움으로 치닫는 건 처음 본다.
“패싸움 정도면 양반인데? 당장 보이는 것만 해도 저거보다 진상인 거 많아.”
레가츠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손가락으로 골목가 다른 곳들을 가리켰다.
술 취한 채로 골목길을 가로막고 통행세를 요구하다가 몰매를 맞는 주정뱅이나, 알몸인채로 건물에서 뛰쳐나오는 남자랑 또 역시 알몸에 손에는 칼을 들고 남자를 쫓는 여자.
좌판을 깐 상인이 잠시 졸고 있는 사이에 스으으윽 들어와서 바겐세일 한다고 소리치는 사기꾼, 또 그걸 사러 득달같이 달려드는 인파들, 그 인파 속에서 돈 안 내고 스윽 물건을 가져가는 좀도둑, 그 좀도둑을 잡고 주인 상인한테 바가지로 대가를 요구하는 깡패, 그 깡패한테 총을 들이밀고 좋은 말할 때 꺼지라는 상인, 거기에 역시 총을 들고 응수하는 깡패. 그걸 제지하러 달려오는게 아니라 와서 구경하는 셰하군 헌병들.
정말 말도 안 되는 마을이었다.
“................이 동네 왜 이래?”
말 그대로 난장판. 질서가 없는 아수라. 훌리건으로만 가득 찬 축구장도 이 정도는 아니겠다. 이 개념없는 동네의 모습을 보고 여자는 혀를 내둘렀다.
“하하하, 문명국가에서 살다 온 사람은 그렇게 느끼겠지. 하지만 여기 와일드 센트럴(Wild Central)에선 이게 자연스런 모습이야.”
레가츠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셰하의 핵무기와 친의 마력병기가 격돌했던 전장 중앙아시아. 전쟁이 끝난지 50년이 넘었지만 방사능과 마력에 오염되었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발탄이 여기저기 묻혀 있으며 좀비병사 같은 잔재가 남은 이 땅은 사람이 살기에는 너무 열악한 땅이다. 이런 알맹이도 없는 데가 지정학적으로 이해관계가 골치 아픈 이 땅을 차지하려는 나라가 있을 리 만무. 그렇게 중앙아시아는 무주공산의 땅이 되었다.
이렇게 국가의 행정력이 미치지 않으니 자연스레 문명국아에서 환영받지 못한 이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범죄자, 정치범, 용병, 몰락 하층민 등등. 가뜩이나 살기 힘든 땅에 이렇게 거친 사람들이 모여들다 보니 중앙아시아는 무법천지 야차의 땅이 되어버렸고 문명국가 사람들은 이곳을 경멸의 의미를 담아 이런 별칭으로 부른다.
와일드 센트럴(Wild Central)
“네가 어떤 곳에서 왔는지 모르지만 이 야차의 땅에서 지내려면 좀 더 거칠어질 필요가 있어. 물론 지금도 충분히 거칠... 아니, 강하다고 생각하지만...”
여자의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레가츠가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여자는 한동안 계속 쏘아보다가 그냥 한숨만 쉬었다.
“정말 오래 지내고 싶지 않은 땅이네. 넌 와일드 센트럴 출신이야?”
여자가 화제를 바꿨다.
“응, 이 마을은 아니고 조금 더 북쪽의 칼르파프 마을 출신이야.”
레가츠가 답했다.
“어쩐지. 낯짝 두껍고 도박 잘 하는 게 이런 곳에 어울린다 생각했어.”
여자가 무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농담조의 시비를 걸었다.
“당연하지. 내 고향은 여기보다 훨씬 더 심각했으니까.”
레가츠가 해맑게 답했다. 그걸 듣고 굳어버리는 여자.
“......방금 뭐라고 했어? 여기보다 심하다고?”
“응. 여기 카잘라는 최소한의 치안을 지켜주는 셰하군이라도 주둔해 있잖아.”
레가츠가 손가락으로 또 어딘가를 가리켰다. 골목교차로 한 가운데에 한 무리의 군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이 가난한 마을풍경과 어울리지 않게 최신식 방탄장비와 자동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헬멧과 전투복 어깨에는 문양 하나가 수놓아져 있었다.
코뿔소 머리와 도끼가 교차된 문양. 지구 최강 셰하 제국 육군의 문양이었다.
“내 고향 칼르파프는 그딴 거 없어. 진짜로 약육강식의 땅이야.”
레가츠가 셰하군을 보며 말했다. 완전무장한 셰하군을 보고 여자는 무슨 생각에 잠겼는지 추리하는 탐정처럼 턱에다 손을 올렸다.
“음... 그런데 여기 마을 사람들은 왜 셰하군을 주둔시키는 거야? 국가의 통제를 피해서 떠나온 사람들이?”
여자가 궁금증이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레가츠는 고민 좀 하더니 천천히 머리를 굴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기 중앙아시아는 셰하, 친, 맥고려, 탄트라라는 세계최강대국 4개가 맞물려 있는 요충지잖아. 군사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나 엄청 중요하다고. 그니까 각 나라들은 이 피폐한 땅을 영토로 삼아 관리하기는 싫어도 군대는 배치하고 싶어 해. 그래서 와일드 센트럴의 마을들은 저 마다 각 나라들과 조약을 체결해서 군대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아. 여기 카잘라는 셰하와 조약을 맺은 케이스고.”
“그래도 이해가 안 가네. 그렇게 해서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이점을 얻는데?”
“군대 주둔을 허락한 대가로 각종 물자랑 자금을 지원받지. 그리고 강대국의 군대가 주둔하는 것만으로도 보호효과를 누릴 수도 있고.”
“보호? 방금 전 우리를 습격한 좀비병사 말야? 하지만 그 정도는 제대로 훈련받은 민병대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좀비병사 정도야 자체방어가 가능하지. 하지만 일개마을 단위로는 어찌하지 못하는 것들도 많아. 가령 적대관계에 있는 마을의 민병대나 아니면...... 바로 저런 거.”
길 가를 몇 번 돌아보던 레가츠는 마침 딱 좋은 예시를 발견했다. 여러 골목길이 만나 합쳐진 거대한 광장이 전방에 있었고 그 광장 한 가운데는 오래된 동양식 갑옷이 앉은 자세로 전시되어 있었다. 20m나 되는 거대한 갑옷이 말이다.
“Titan....<거신>...”
여자가 갑옷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거신(Titan).
과거 대전쟁에서 셰하의 압도적 화력에 대응하기 위해 친 제국이 사용한 인간형 거대마력 병기다. 전쟁이 절정에 치달았을 때 친은 이 거신을 소환하는 마법진을 중앙아시아 곳곳에 살포했는데 당시 너무 마구잡이로 살포한 탓에 종전 후에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다. 그렇게 회수되지 못한 마법진들이 50년이 지금에도 발현되어 거신들을 소환시키고 있고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난 거신들은 와일드 센트럴을 마구잡이로 휩쓸고 다니고 있다.
“확실히 거신 정도나 되면 강대국의 힘을 빌려야 막을 수 있겠네.”
레가츠의 설명을 듣고 여자는 완벽히 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궁금한 거 다 풀렸어?”
“Yes. 나 원래 궁금한 거 있으면 못참는 성격인데. 도움 좀 됐어 회색머리.”
동양인 여자는 레가츠를 올려다보며 담백하게 미소지었다.
“.......!!”
의외의 기습을 당한 레가츠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어떡해, 못 버티겠어, 얼굴도 새빨질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나름 19세(한국식나이 21세). 여자를 처음 경험하는 꼬맹이가 아니다. 심장이 뜨거워진 만큼 머리를 차분하게 식혀야 한다. 어떻게 해야 이 기회를 관계 진전의 계기로 발전시킬 수 있을까.
“하하하, your welcome.... 그럼 답례로 이름 알려줄 수 있어?”
레가츠는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러자 여자의 인상이 다시 찌그러졌다. 레가츠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듯 했지만 흔들리지 않는다. 괜찮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범위다.
“하......너 진짜 끈찔기구나...”
“내가 너 의자에 맞을 뻔한 것고 구해주고 궁금한 것도 풀어줬잖아. 너 궁금한 거 있으면 답답해 죽는 성격이라며. 이 정도면 생명의 은인 아니야?”
레가츠는 째째하게 give and take를 요구했다. 정말 찌찔함의 극치였지만 그게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이 동양인 여자처럼 칼같은 성격한테는 오히려 더 성과를 볼 수 도 있다. 돈을 빚지고 못 넘어가는 성격이면 마음의 빚도 절대 못 질 것이다.
이런 레가츠의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
동양인 여자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일어났다. 그리고 작고 귀여운 입술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았다 하더니, 마지막으로 인상을 한 번쓰고는 땅바닥을 내려다보며 들릴 듯 말듯하게 말한다.
“............S...........”
“응? 뭐라고?”
“Serim............”
“진짜로 안 들려. 좀 더 제대로 말해 줘.”
레가츠가 귓바퀴를 감싸며 여자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닌게 아니라 새삼스레 소극적인 여자의 목소리에다가 통 익숙치않은 동양식 발음 탓에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레가츠가 보채자 여자는 결국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Se!!!!Rim!!!.........”
“저기 찾았다 회색머리 자식!!”
여자가 큰소리로 말하는 그 순간 성난 남자들의 고함이 그녀의 목소리를 묻어버렸다.
“잉? 나?”
뜬금없이 지가를 부르는 외침에 레가츠는 어리둥절 고개를 돌렸다.
“내 돈 내놔라, 이 사기꾼 회색머리야!!”
레가츠과 카드게임을 하다 돈을 잃은 중년대머리 남자가 씩씩거리며 뛰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