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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Legacy of WW2xN
작가 : 제로드라링
작품등록일 : 2017.11.14

세계를 바꾸려면 두 번의 전쟁이 필요하다. 첫 번 째 전쟁으로 기존질서를 무너뜨리고 두 번째 전쟁으로 새 질서를 잡아야 한다. 1차세계대전으로 제국주의 시대가 무너지고 2차세계대전으로 미-소 양강체제가 세워졌고, 냉전으로 소련이 무너지고 @차대전으로.....


현 문명 멸망 후 수 천년 후.

새로 개편된 국제질서.

중앙아시아에서 충돌하는 강대국들의 로봇병기 이야기


*이미지는 영혼기병 라젠카입니다.

 
초원의 유랑객(1)
작성일 : 17-11-14 20:40     조회 : 404     추천 : 0     분량 : 86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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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

 아랄해(海) 인근의 개척마을 카잘라(Kajahla)

 마을 어귀 강가의 검문소

 

 

 

 "이봐, 애송이. 마을에 들어오고 싶으면 신분증을 보이거나 5000아크체를 내야 한다니까."

 

 "아니, 그게 제가 오던 길에 지갑을 잃어버려서요.... 좀.... 헤헤....“

 

 마을 민병대들과 20대 초반의 청년 하나가 실랑이를 보이고 있다.

 

 “그건 자네 사정이고. 다시 말하지만 셰하-카잘라 협의안에 따라 이 마을에 들어오고 싶으면 <셰하 연합 제국> 국적자이거나 그게 아니면 5000아크체(1아크체=약100원)를 내야해. 그니까 신분증도 없고 돈도 없으면 그냥 꺼져.”

 

 민병대 하나가 소총 개머리판으로 청년을 밀쳐냈다.

 

 “아씨, 나 셰하 국적자 맞다니까요. 자, 여기 운전면허증!!”

 

 청년이 면허증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레가츠 카시튠’이라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면허증을 받아든 민병대들은 면허증사진과 실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비교했다.

 

 “음... 본인 맞나?”

 

 “그런 거 같아. 저 싸가지 없게 올라간 눈깔이 완전 똑같잖아.... 그런데 너 머리색 원래 그러냐?”

 

 민병대들의 시선은 레가츠의 머리를 향하고 있었다. 은발도 애쉬블론드도 아닌, 콘크리트처럼 광택이 하나도 없는 짙은 회색. 별의별 유전형질이 판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보기 드문 머리색이었다.

 

 “네, 원래 머리색입니다. 여기보세요. 모근까지 회색이죠?”

 

 레가츠가 고개를 숙여서 정수리를 들이밀었다. 진짜 모근까지도 회색이다. 마치 철사를 두피에다 심어 놓은 느낌이다. 민병대들은 그것을 흥미롭게 구경했다.

 

 “오, 진짜.”

 

 “뱀파이어나 요정들 아니어도 이런 머리색을 가질 수 있구나.”

 

 “넵넵. 그렇습니다. 그러니 이제 들여보내주실거죠? 저 얼른 들어가봐야 한다고요.”

 

 레가츠가 머리를 툴툴털며 툴툴거렸다.

 

 “음.... 그래도 곤란한데.”

 

 하지만 이번에도 거절하는 민병대들.

 

 “네?! 아니 왜?! 신분증도 보여줬잖아!”

 

 출입불허에 레가츠가 눈알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반항적인 눈초린데 저렇게 인상쓰니 더 싸가지가 없어 보인다. 거기다 말투도 더 거칠어졌다. 민병대가 좋게 봐줄 리가 없다.

 

 “운전면허증이야 외국인한테도 만들어줄 수 있잖아. 그리고 운전면허증은 제국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 제후국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고. 그런 것말고 제국정부가 발행한 신분증을 보여줘.”

 

 민병대원이 레가츠의 운전면허증을 던져버렸다. 레가츠의 분노게이지가 목구멍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이 아저씨가 진짜....”

 

 찰칵

 

 레가츠가 분을 못 참고 달려들려는 찰나 민병대 하나가 그에게 총구를 들이밀었다.

 

 “여, 젊은이. 일 커지게 만들지 말자고. 아무리 '와일드 센트럴'에 쳐박힌 촌구석 마을이라도 다 규칙이 있어. 셰하 신분증이 없으면 5000아크체를 내든가. 그것도 없으면 걍 꺼지든가.”

 

 민병대원이 총구로 레가츠의 이마를 툭툭 쳤다. 굉장히 깊은 빡침이 레가츠의 뇌 속에 가득 차올랐다. 저 놈들을 그냥 족쳐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후우우우.....”

 

 그냥 참자. 레가츠는 한숨을 등을 돌려 물러났다. 여기서 사고 일으켰다가 더 망하는 수가 있다.

 

 “그래 잘 생각했다, 애송아.”

 

 “좀 더 커서 돈 많이 벌고 다시 찾아오렴.”

 

 민병대가 떠나는 레가츠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라고 마음 속에서 연속적으로 빡침이 몰려왔지만 레가츠는 꾹꾹 눌러서 참았다.

 

 “아니면 저기 오는 여자 손님한테 돈 좀 빌려달라 하든가~”

 

 민병대 하나가 소리쳤다.

 

 

 

 

 

 

 '여자손님?'

 

 그 말이 레가츠의 귀에 박혔다. 레가츠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검은머리를 한 동양인 여자가 이쪽 검문소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서 돈 빌려달라 해 젊은이. 우리는 누가 어떻게 냈든 간에 머릿 수대로 돈만 받으면 되니까.”

 

 “덤으로 말 좀 잘해서 점수 좀 따고. 저 아가씨 꽤 예쁘게 생겼는데, 쿠하하.”

 

 “잘 해봐라. 청춘이여.”

 

 민병대원들이 레가츠의 등에 대고 키득키득 웃었다. 저들의 조롱이 기분 나빴으나 레가츠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 오는 여자는 확실히 예뻤다. 늘씬하고 하늘하늘한 체형에 동양인치고 하얀 피부, 귀 아래로 가늘게 묶은 다운사이드 트윈테일과 큼지막하고 새초롬한 눈동자. 외관으로 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려나. 레가츠가보다 살짝 어려보였다.

 

 “음... 그래...”

 

 '어디 말 좀 걸어볼까. 작업 거는 게 아니라 마을 입장료를 빌리기 위해서. 물론 잘 되보고 싶은 마음도 완전 없는 건 아니지만... 아니, 완전 많지만...'

 

 레가츠는 침을 꿀꺽 삼키고 동양인 여자에게 다가갔다.

 

 “저기 죄송한데요. 부탁 좀 할 수 있을까요?”

 

 레가츠가 어색한 미소를 가득 품고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자는 지나가는 날파리를 보는 마냥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레가츠를 올려다봤다.

 

 '으... 살짝 무섭지만 고양이상 눈매가 매력 있네.'

 

 레가츠는 그렇게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에 푹 빠져 있는데.

 

 

 

 “I can’t speak Imperial Language. Speak in English.”

 

 여자가 고어(古語; English)로 쌀쌀맞게 말했다.

 

 

 고어.

 구 문명에서 세계 공용어로 쓰였던 언어이다. 구 문명이 멸망한지 수 천년이 지났지만 세계 곳곳에 워낙 깊게 쓰인 언어였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서도 고어는 세계 공용어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에... 에... Sorry...”

 

 여자의 차가운 태도에 기선을 제압당한 레가츠는 움츠려든 목소리로 셰하 제국어에서 고어로 바꿔 말했다.

 

 “Eh... Could you lend me some money? 여기 카잘라 마을 들어가려는데 입장료가 부족해서....”

 

 “Money? 5000아크체 빌려 달라고?”

 

 여자가 한 쪽 눈살을 찌푸렸다.

 

 “Yes. 빌려주시면 마음 들어간 다음에 제가 어떻게든 갚...”

 

 “Are you crazy? 내가 너의 뭘 믿고 그런 거금을 빌려 줘?”

 

 레가츠의 말을 끊고 여자가 쏘아붙였다. 그녀가 내뿜는 노골적인 적의에 레가츠는 움찔거렸다.

 

 “Opp... 물론 큰 돈인 걸 알지만 진짜로 갚을 자신 있고... 그리고 그쪽도 사람하나 살리는 셈이니 적선도 할수 있으시고...”

 

 레가츠가 눈동자를 내리깔며 주절주절거렸다. 그런 레가츠를 여자는 혐오감이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생판 초면인 사람한테 5000 아크체나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는 낯짝이면 그냥 검문소 뚫고 지나가버리지 그래?”

 

 여자는 그렇게 독설을 내뱉고는 레가츠를 그냥 지나쳐 버렸다. 제대로 퇴짜를 맞은 레가츠는 머릿 속이 새하얘져다.

 

 '아... 좀 센 언니네... 그냥 대놓고 마음에 들었으니 연락처라도 달라할 걸 그랬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돈을 못 빌린게 더 큰 문제지... '

 

 레가츠는 복잡한 한숨을 쉬었다. 한편 그 사이에 여자는 검문소에 들어갔다.

 

 “Hey hot girl. Are you alone?”

 “이런 무법천지 중앙아시아에서 여자 홀몸으로 무슨 일이야? 위험하게 시리.”

 “임마. 지금 세상에서 네가 제일 위험해 보여.”

 

 동양인 여자를 마주한 민병대가 히죽거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자는 그들의 장단에 어울려주지 않고 까칠한 표정만 지은 채 지갑을 꺼낼 뿐이었다.

 

 “Here is 5000 Arkche.”

 

 여자가 5000아크체 어치의 지폐를 내밀었다.

 

 “오우, 아가씨 너무 선뜻 내놓는 거 아니야? 아가씨 정도의 미인이라면 깎아 줄수도 있는데.”

 

 “절반만 내고 들어가 아가씨. 대신 이따 마을 안에서 우리보고 인사하는거 잊지 말고.”

 

 민병대원들이 껄껄 웃으며 지폐다발 절반을 여자에게 돌려주었다. 하지만 그런 호의에도 여자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고 다시 돈을 챙길 뿐이었다.

 

 

 “와, 저 자식들 차별 쩌네.”

 

 민병대원들의 속물근성을 보고 레가츠는 욕사발을 날렸다.

 

 '나한테도 저렇게 해줬으면 몇 배는 더 사례해 줄 수 있는데......음?'

 

  민병대들을 욕하던 레가츠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강가의 갈대밭 사이에서 높다란 깃발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독수리와 초승달이 어우러진 문양의 깃발. 꽤 오래됐는지 여기저기 찢어지고 굉장히 너덜너덜했다. 웃고 떠들던 민병대들도 그걸 발견하고 유심히 관찰했다.

 

 “잉? 저거 뭐야? 셰하 깃발 아니야?”

 “그런데 엄청 낡았는데...”

 “어, 셰하 군 아니야?”

 

 민병대원 하나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갈대밭을 헤치고 네 다섯명의 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셰하 제국육군 군복을 입고 완전군장을 한 셰하군 병사들이었다.

 

 “쟤네들 부상당했나, 왜 이리 흐느적흐느적 걸어와?”

 “여기 와서 쉬게 해주자.”

 “그래, 어이!! 이리 와!! 여기 너네 동맹 마을이야!!”

 

 이곳 카잘라 마을은 셰하와 우호적인 관계이며 셰하 군 주둔지도 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셰하 병사들을 부상병이라 판단한 민병대들은 그들을 향해 제국공용어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걸 보고 기겁하는 레가츠.

 

 “손 흔들지마 멍청이들아!!”

 

 “응? 이 애송이는 또 왜 끼어들어?”

 “셰하군은 우리 동맹이야. 저리 부상 당했으면 도와주는 게 맞지.”

 

 레가츠가 끼어들자 민병대들은 짜증을 냈다. 하지만 레가츠는 멈추지 않았다.

 

 “저건 우리 셰하군이 아니야!! 좀비병사라고!!!

 

 레가츠가 소리 질렀다. 저 병사들이 입고 있는 군복은 셰하 군복이 맞지만 그것은 50여 년전의 양식이고 들고 있는 무장도 현재 제식장비가 아닌 구식 볼트액션이다. 그리고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저 병사들의 피부는 핏기가 하나도 없이 시퍼랬다.

 

 좀비병사다.

 

 

 

 

 구 문명이 멸망하고 수 천년이 지난 지금의 시대. 과거 구문명이 <미합중국>이라는 하나의 초강대국이 주름 잡았던 것과 달리 신문명은 7개의 강대국들이 팽팽하게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곳 중앙아시아는 그 중 서유라시아의 셰하 연합제국과 동아시아의 친(秦 ; Chin) 제국이 100여 년 동안 격돌하던 각축장이었다. 유라시아의 패권을 건 대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셰하는 19발의 수소폭탄을 투하했고 친은 반경 1000km에 이르는 거대한 마법진을 구축했었다. 양국이 팽팽하게 대결했던 이 전쟁은 결국 서로 막대한 희생만 낸 채로 50년 전에 종전되었고 그 후 국제정세가 변함에 따라 친과 셰하는 굳건한 동맹관계가 되었다. 하지만 그 대전쟁의 유산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앙아시아 곳곳에 남아있다.

 

 좀비병사는 그 중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전쟁의 유산이다. 100년 동안 이어지는 전쟁에서 수백 만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그 중 많은 수가 발굴되지 못하고 중앙아시아 대초원에 버려졌다. 그런 그들의 시체에 핵폭탄의 방사능이 스며들어 부패를 막았고 마법진의 잔류마력이 시체의 뇌에 들어가 자아를 가진 잔류사념이 되었다.

 

 좀비병사는 그렇게 방부처리된 시체에 잔류사념이 스며들어 되살아난 존재들이다. 정확히 말하면 좀비보다는 동사체(動死體; 움직이는 시체)라고 정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여튼 간에 다시 부활한 좀비들은 잔류사념의 명령에 따라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줄 알고 여기저기를 공격하고 다닌다.

 

 “저 녀석들 여길 공격할 거야!! 그 전에 어서 쏴!!”

 

 레가츠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좀비병사들이 먼저 검문소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탕 탕 탕 탕 탕

 

 “엄마앗!!”

 

 총격을 받자 민병대들은 허둥거리며 검문소 칸막이에 숨었다. 흐느적거리는 좀비병사들의 조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다행히 희생자는 없었지만 민병대들은 호들갑을 떠느라 반격할 기미를 안 보였다. 한편 동양인 여자는 신속하게 포복해서 몸을 숨겼고 레가츠도 신속히 움직여 칸막이 뒤에 숨었다.

 

 “뭐, 뭐야 쟤들. 왜 우리를 공격해?!”

 

 민병대 하나가 질질 짜며 말했다.

 

 “그야 이 검문소도 나름 군사시설처럼 보이니까 자기들 적이라고 생각한 거겠지. 그보다 어서 대응이나 해! 당신들 이 마을 지키는 게 임무 아니야?”

 

 레가츠가 민병대원들을 다그쳤다. 그제서야 민병대들은 칸막이 밖으로 총을 내밀어 대응사격을 시작했다.

 

 투다다다다다다다다다

 

 “뭐야! 왜 온 몸이 벌집이 됐는데도 안 쓰러져?!”

 

 민병대 하나가 또 겁에 차서 소리 질렀다. 탄창 하나를 다 비워서 좀비병사의 복부에 벌집처럼 구멍을 뚫었는데도 녀석은 계속 흐느적흐느적 걸어왔다.

 

 “좀비는 생명력이 아니라 뇌 속의 잔류사념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야. 뇌를 파괴해야 해. 어서 정조준해서 사격해!!”

 

 레가츠가 말했다. 하지만 민병대들은 그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그, 그렇게 말해도 탄창을 다 써버렸는 걸....”

 

 민병대들이 빈 탄창을 내밀며 울먹거렸다. 레가츠는 아주 기가 차 버렸다.

 

 “탄창 하나만 차고 경비보는 거였어? 당신들 군기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가, 가난한 마을의 민병대한테 뭘 바라는 거야...”

 

 민병대들이 억울화다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레가츠는 뒷골이 땡겼다.

 

 “아놔 미치겠네...”

 

 

 “Hey. Gray hair.”

 

 레가츠가 뒷목을 잡고 있는데 동양인 여자가 그를 불렀다.

 

 'Gray hair? 회색머리? 나 부르는 건가?'

 

 긴가민가했지만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을 보니 맞나보다.

 

 “Eh...what?”

 

 “저 녀석들 없애려면 뇌를 파괴해야 한다고 했지? 그럼 그냥 목을 베어버려도 돼?”

 

 “어... 그렇지. 뇌 속의 사념이 몸체를 조종하지 못하게 되니까.”

 

 이 새침한 여자가 먼저 말을 거니까 레가츠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Okay.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동양인 여자.

 

 “이봐 그런데 뭘 어쩌려는 거야.... 엉?!”

 

 그리고 레가츠는 그녀가 외투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것을 보았다. 직선인 듯 아닌 듯 살짝 휘어진 동양식 곡도였다. 여자는 칼을 꺼내들자마자 훌쩍 일어나서 좀비들을 향해 달려갔다.

 

 “Hey!!! 위험해!!”

 

 레가츠가 소리질렀다. 저 여자 뭔짓을 하려는 거냐? 설마 진짜 칼로 좀비의 목을 베려고? 정신 차려라 이 여자야. 좀비병사는 총을 갖고 있단 말이다. 날아오는 총알을 이리저리 피하는 그런 영화같은 일이......

 

 

 탕 탕 탕

 

 쉭 쉭 쉭

 

 “......헐...”

 

 그런 영화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좀비 병사들이 달려오는 여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지만 여자는 그걸 모두 피해냈다. 아니, 애초에 좀비들이 조준을 할 수 없도록 움직였다.

 

 잔류사념으로 움직이는 좀비의 반응속도는 인간보다 훨씬 느리다. 따라서 지그재그로 방향을 바꿔 질주하면 좀비들은 동체시력이 후달려서 도저히 조준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다다다닥 치이잉!

 

 그렇게 총탄을 피해 좀비들에게 달라붙은 여자는 칼집에서 칼날을 빼냈다. 그리고

 

 쉭

 

 수평의 검격이 좀비 하나의 목을 그었다. 이미 수 십년 전에 죽어버린 이 육체는 피 한방울도 뿜지 않고 냉동고기 마냥 둔탁하게 썰려버렸다.

 

 한 놈을 베어버린 여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 칼을 휘둘렀다. 살아있는 인간의 민첩함을 따라올 수 없던 좀비들은 여자의 칼에 차례대로 참수되었다.

 

 “말도 안돼....”

 

 그 광경을 본 레가츠는 말을 잃었다. 미사일과 레이져와 우주선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저토록 칼을 잘 다루는 검객이 <또> 있었단 말인가.

 

 

 

 

 

 피싱 푹

 

 “허어어억..... 허어어억.....”

 

 한편 여자는 마지막 녀석은 목을 베지 않고 두개골을 찔러서 헤치워 버렸다. 그리고 체력을 너무 급하게 소모한 탓에 숨을 헐떡였다. 마지막 공격을 찌르기로 한 것도 바닥난 체력을 대신해 체중을 실어 공격하기 위함이었으리라. 정말 마무리 기술로 깔끔한 선택이었다.

 

 마무리였다면 말이다.

 

 “It’s not end!!! 뒤에 더 있어!!”

 

 레가츠가 소리 질렀다. 여자는 깜짝 놀라 등 뒤의 갈대숲을 돌아보았다. 가장 처음 보였던 옛 셰하군의 깃발창. 그 깃발창을 들고 있던 좀비병사가 갈대밭 사이에서 나왔다.

 

 “윽....!!”

 

 놀란 여자는 마지막으로 해치운 좀비병사의 머리에서 칼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두개골 깊숙히 박힌 칼날은 가녀리고 체력까지 바닥난 여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그 사이 좀비병사는 기창날을 아래로 향하게 쥐고는 여자를 찌를 준비를 마쳤다.

 

 “으윽...!!”

 

 “몸 웅크려!!”

 

 기창이 여자를 찌르려는 찰나 레가츠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가녀린 몸을 끌어안고 창날을 피했고 동시에 달려오던 관성을 실어서 무릎으로 좀비병사의 목을 쳤다.

 

 우두두두두둑

 

 좀비병사의 목뼈가 부러지면서 척신경도 끊겨버렸다. 잔류사념과 접속이 끊긴 좀비병사는 실이 풀린 마리오네트 마냥 관절을 펄럭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레가츠와 여자도 땅바닥에 데구루루 굴러버렸다.

 

 

 

 

 “푸학... 아오 아파라... hey, are you okay?”

 

 레가츠가 엎어진 몸을 일으키며 여자에게 물었다. 이렇게 목숨까지 구해줬는데 괜찮아, 고마워라고 말해주겠지~, 라고 내심 기대했는데...

 

 “..................”

 

 하지만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더 가증과 혐오에 가득 찬 눈으로 레가츠를 노려다보고 있었다.

 

 레가츠는 조건반사적으로 식은 땀을 흘렸다.

 

 '나 뭐 잘못한 거 있나....?'

 

 보통 이 상황에서 클리셰를 보면 첫째, 서로 몸을 너무 밀착해서 실례를 했나? 아니다. 레가츠와 여자는 땅바닥에 구르면서 2m 정도 서로 떨어져있다. 살갖이 맞닿을 거리가 아니다.

 

 둘째, 속옷...을 봐버렸나? 아니다. 여자는 질긴 청바지를 입었고 상의도 딱히 찢어진 데가 없다.

 

 셋째, 그럼 대체 뭐냐고요? 레가츠가 고민하는데 여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My money.........”

 

 여자가 분노를 삭이며 조용히 말했다.

 

 “엉?? 돈?”

 

 “...........”

 

 레가츠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자 여자는 조용히 손가락을 들었다. 레가츠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마을 어귀의 강이었다. 강물의 유속은 제법 빨랐고 그 물살을 타고 작은 무언가가 빠르게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생긴 걸 보니 지갑 같았다.

 

 “아.... 지갑.......”

 

 이 여자 2500아크체 돌려받았지. 그걸 아마 지갑에 넣었을테고 그럼 그 돈은....

 

 “헤헤헤.....헤헤.... 헤...”

 

 레가츠는 바보처럼 헤벌레 웃었다. 그를 보고 관자놀이를 씰룩이는 여자. 그리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조용히 <모국어>로 속삭였다.

 

 

 

 “Juk go sip n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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