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리아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그녀는 쿠샤나바의 지하 은신처에 있었다. 몸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아직 불완전하지만 대체로 재생되었다. 일어나서 걸어보려고 하는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일어났나?”
갑주의 남자다.
“배고프겠군. 자, 받아라.”
갑주의 남자는 카멜리아에게 육포 몇 점과 딱딱한 빵, 그리고 카레 소스가 담긴 잔이 올려진 접시를 건넨다.
카멜리아는 육포를 씹는다.
“열쇠는 보스한테 전달했어?”
“열쇠?”
카멜리아는 그의 반문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든다.
“내가 또 열쇠를 구했는데.”
“모르겠군. 너한테 없었다.”
“그래?”
카멜리아는 인상을 찌푸린다. 그 괴상한 꼬마가 한 짓인가?
갑주의 남자가 말한다.
“다 먹고 보스에게 가봐라. 널 찾고 있으니.”
“보스가 찾는다고? 허. 웬일로.”
“그럼 전할 말은 다 전했다. 난 가보마.”
갑주의 남자는 작은 방에서 나갔다. 카멜리아는 대강 육포랑 빵을 해치우고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복도의 벽면은 울퉁불퉁하다. 간간히 달려있는 횃불만이 복도를 비추고 있다. 아무도 없는 듯 한적하고 조용하다.
카멜리아는 복도를 걷는다. 구두 굽 소리가 또각, 또각, 또각, 또각.
그리고 계단으로 들어서서 내려간다.
지하 가장 깊은 곳으로 간다.
그곳은 온통 어둠이었고 끝 또한 보이지 않았다.
“왔는가.”
쇠를 긁는 듯한, 피가 끓는 듯한, 그런 기묘한 목소리가 울리자 카멜리아는 걸음을 멈췄다.
“네.”
“열쇠를 입수했구나. 잘 했다.”
“아닙니다. 하나는 놓쳐버렸습니다.”
“다른 놈이었다면 둘 다 놓쳤겠지.”
“감사합니다.”
“열쇠를 얻어내느라 고생했겠지만, 또 다른 일이 있다. 지금까지는 서해회사의 말단들만 건드렸지만, 이제는 깊이 들어갈 생각이다.”
카멜리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한다.
“이사회입니까.”
“그래. 다음 암살 목표는 이사회다. 이제 곧 서해회사 창립 150주년 기념식이 열린다. 그곳에는 거물이 많이 모인다. 서너 명 정도로 공작단을 꾸릴 생각이다. 카멜리아, 네가 그 암살단을 이끌어라.”
카멜리아는 고개를 숙인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헌데 다른 인원은 어떻게 조달합니까?”
“그것도 곧 알려주겠다. 그 때까지 이곳에서 준비하고 있으면 된다. 이제 물러가거라.”
“네.”
카멜리아는 뒤로 돌아 계단으로 간다.
이곳은 다시 고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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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라 일행은 괴물 까마귀에 탄 채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갈란의 마을이다. 매장 작업은 다 끝냈지만, 가장 중요한 장례식을 치르지 못 했다. 특히 그 마을의 장례식은 무녀가 직접 해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 가는 중이다.
아딘은 까마귀의 등 너머로 보이는 광활한 사막을 바라본다.
생각해보니 태어난 이래 아직도 이 사막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동쪽에는 평원의 나라가 있고, 서쪽에는 숲의 나라가 있고, 북쪽에는 고산의 나라가 있고, 남쪽에는 정글의 나라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딘은 본 적이 없다.
굳이 이 사막, 다르카르가르 분지에서만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다.
마음만 먹으면 떠날 수도 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딘은 떠나고 싶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역시, 카멜리아의 묘로부터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걸까.
“한심하구만.”
아딘은 한숨을 푹 쉰다.
갑자기 프린이 머릿속을 통해 말을 건다.
〈또, 또 카멜리아 생각을 하고 있구나. 인간.〉
“뭐, 임마. 내가 누굴 생각하든 네가 뭔 상관이야.”
〈그런 식으로 나오기냐? 좋은 거 알려주려고 했는데, 관둬야겠네.〉
아딘은 자세를 고쳐 앉는다.
“미안하다. 그 좋은 게 뭔지 제발 알려줘.”
〈훗! 처음부터 그렇게 나올 것이지.〉
프린은 잘난 체하는 투로 말한다.
〈너희들이 그 카멜리아랑 싸워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몰아넣었지. 그 때 난 들었다. 카멜리아의 내부로부터 들려오는 울음소리를.〉
그 말을 받아들이는 데는 아딘에게 5초나 필요했다.
이해가 끝난 아딘은 다급하게 말한다.
“그럼! 어, 그러면 카멜리아가 그 쿠샤나바의 안에 갇혀 있다는 거야?”
〈야, 야. 난 아직 거기까지 말 안 했어. 다만 그 안에서 울음이 들린 것뿐이야. 그게 정말로 카멜리아라는 보장은 없어. 다만 가능성이 있지. 만약 그 쿠샤나바가 지하에서 만난 까마귀왕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면 말이야.〉
아딘은 턱을 문지르며 생각한다.
까마귀 왕과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졌다면?
그렇다면 카멜리아는 제물소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옛날 그대로의 카멜리아가 그 속에 갇혀있다면, 역시 빼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여. 하지만 두 가지 함정이 있어.〉
“그게 뭔데?”
〈첫째는 제물소녀가 카멜리아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야. 까마귀왕이나, 쿠샤나바 간부나, 인간 아티팩트화의 일환이야. 그리고 그거에는 3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지. 정신을 지탱할 제물소녀, 육체를 지탱할 몸뚱아리들, 그리고 방대한 마력을 담은 매개체. 카멜리아는 제물소녀가 아니라 매개체일 수도 있다는 거지.〉
아딘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둘째는 설령 제물소녀가 카멜리아라고 쳐도, 영의 형태일 거란 말이지. 그렇다면 어떻게 그 영에 육을 입혀서 빚어내느냐가 관건이지.〉
“심층구조에서 봤던 그 꼬마 관리자도 매개체였던 까마귀를 이렇게 되살려냈잖아? 똑같이 네가 할 수는 없어?”
〈내가? 일단 심층구조로 들어가면 난 외부자야. 접속 권한이 없고, 억지로 해도 부작용만 날 수 있어. 게다가 심층구조도 문제야. 까마귀왕의 심층구조는 생각보다 돌파하기 쉬웠지만, 카멜리아의 심층구조는 어떨지 짐작할 수 없어. 까마귀왕처럼 정신이 분열되었다면 모를까.〉
“흐으음......”
아딘은 크게 숨을 쉬며 까마귀의 등 위에 허리를 대고 눕는다.
“어려운걸.”
〈이 세상에 쉬운 게 어디 있겠나, 친구.〉
“내가 언제부터 네 친구였냐.”
〈섭섭하게 왜 그래~〉
“으으...”
아딘은 진저리치고 머리를 비운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니 조금은 기분이 맑아지는 것 같다.
잠깐, 프린이 중요한 걸 말한 것 같았는데. 까마귀왕이나 쿠샤나바의 간부나 똑같은 인간 아티팩트화의 산물이라고? 그러면 쿠샤나바는 유실된 거로만 알려졌던 고대왕국의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
대체 어떻게?
다시 머리가 아파져서 아딘은 옆으로 돌아눕는다.
따지고 보면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프린이나 꼬마 관리자가 말했던 용이란 존재. 둥글게 몸을 만 용의 겉 표면 위로 대지가 솟아올라 그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만들었다고? 믿기 어렵지만 그 둘이 일부러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그저 종교 교리로만 알던 게 사실이란 말인가.
고대왕국 닐리님은 이미 이걸 알고 있던 건가?
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진다.
어쩌면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판에 나도 모르게 발을 들이민 건 아닌지......
아딘은 벌떡 일어나서 머리를 긁는다.
“사실 이런 생각을 할 때는 이미 늦었지.”
그렇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아딘은 까마귀의 등 너머로 보이는 사막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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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린의 젊은 왕은 침실에 놓인 탁자에 앉아 도시의 정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는 광장이 있고,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도약하는 말의 조각상을 품은 분수대가 있다. 분수대의 오른쪽에는 침체된 분위기의 관공서가 늘어섰고 왼쪽에는 시끌벅적한 시장이 들어섰다. 분수대의 앞에는 지금 젊은 왕이 있는 궁정이, 뒤로는 커다란 대로가 있어 그대로 성벽의 남문으로 이어지고 사막이 나온다.
바깥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젊은 왕의 하얀 머리칼이 휘날린다. 긴 머리칼을 양 옆으로 넘겨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나 보인다.
소린의 백성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왕이 젊다는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왕은 허수아비고 실세는 서해회사의 이사회라는 것을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 왕이 나이가 몇이든 알 바 아닌 것이다.
그것은 젊은 왕으로서는 슬픈 일이다.
탁자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머리가 까진 정보수석이 말한다.
“왕이시여. 슬슬 게임을 재개하시지요.”
“그래. 머리도 충분히 식혔으니, 좋지.”
젊은 왕은 탁자 위에 놓인 바둑판을 본다. 동방에서 전래된 게임인데 꽤나 재미있다. 그는 날이 선 콧대를 문지르며 하얀 돌을 착점한다.
“그럼 얘기도 다시 하지. 요즘 이사회의 동향은 어떤가.”
“최근 아티팩트 대학의 학술대회를 준비하느라 여러모로 바쁜 모양입니다. 하지만 뒤로는 ‘열쇠’를 손에 넣으려고 유물단을 이리저리 움직이더군요.”
“단순해서 좋군. 쿠샤나바 쪽이 먼저 엉덩이를 들썩이니까 이사회도 따라 움직이는거군.”
“하하.”
바둑판을 주의깊게 바라보던 정보수석이 검은 돌을 착점한다.
“하지만 놈들, 쿠샤나바한테 한 방 먹었나 봅니다.”
“호오.”
“도둑길드에서 열쇠 하나를 손에 넣어서 쿠샤나바와 서해회사가 아옹다옹했는데, 쿠샤나바가 선수 쳐서 도둑회의 현장을 기습해 길드 간부를 전부 죽이고 열쇠를 훔친 모양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더군요.”
젊은 왕은 씩 웃는다.
“놈들도 발칵 뒤집어질 줄 안단 말인가. 그거 참 재밌군.”
그리고는 하얀 돌을 빠르게 착점한다.
“쿠샤나바도 서해회사가 당황했다는 걸 알 거야. 적어도 움직임만큼은 빠르니, 이미 추가 공격을 준비하고 있겠지.”
정보수석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놈들의 노림수는 어디일 것 같나?”
“크게 세 명이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보수석은 손가락을 세 개 꼽아 보인다.
“우선 소린의 왕께서 첫 번째, 두 번째는 서해회사 이사장, 세 번째는 아티팩트 대학의 학장입니다.”
“암살일까, 생포일까.”
“둘 다 염두에 두어야만 합니다.”
젊은 왕은 뺨을 어루만진다.
“어렵군.”
“그렇지요.”
둘 사이의 잠시 침묵이 흐른다.
젊은 왕이 침묵을 깬다.
“내가 생각하는 게 있네. 우리 정보원이 이사회 내부에 한 명 있긴 하지만, 그걸 로는 부족해. 탁상 위에서 일어나는 것만 아는 셈이지. 하지만 지금은 격동의 시기. 현장의 정보가 필요해.”
“그러하시다면...... 유물단에도 정보원을 심자는 말씀입니까.”
“맞아.”
“유물단이라......”
“포섭도 쉽고, 능력도 출중해서 정보가 풍부한, 그런 유물단이 없겠나?”
정보수석은 눈을 감고 고심한다.
그의 머릿속에 레이라가 떠올랐다.
정보수석은 싱긋 웃으며 눈을 가늘게 뜬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