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왜...... 어째서...... 너무해, 너무하다고오오오!!”
갈란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소녀의 어깨는 억울함과 슬픔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린다. 아딘은 그런 갈란을 보며 슬픈 표정을 짓는다.
“전부 포위해! 열쇠를 넘길 순 없어.”
레이라는 워 해머를 꺼내들며 카멜리아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이에 따라 카릴과 블뢰즈도 전투태세를 취한다.
카멜리아는 열쇠를 품 안에 집어넣고 몸을 숙인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호랑이굴로 들어온 줄 알아?”
카멜리아는 순간적으로 사파이어를 뒤로 확 던진다. 보석이 빛나자, 카멜리아는 순간이동해서 석조 문 내부를 빠져나온다. 그리고 주저 없이 도망친다.
“추격해!”
레이라, 카릴, 블뢰즈는 단번에 달려 나간다. 하지만 아딘은 그럴 수 없었다. 갈란이 여전히 넋이 나간 채 무너져서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딘은 그녀를 내려다본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지금은 뭔 말을 해도 소용없다.
누구보다 자신이 아주 잘 안다.
그래서 아딘은 아무 말 없이 갈란을 품에 안고 일행을 따라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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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라 일행은 전력을 다해 카멜리아를 추격했지만 따라붙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까마귀 성소 밖으로 나왔다. 해는 이미 지고 달이 올라왔다.
시작부터 늦은 탓에 아딘이 갈란을 안고 제일 늦게 빠져나온다.
“웃...!”
아딘은 사방에 펼쳐진 피바다와 시체 더미들을 보고 놀란다. 그러면서도 재빨리 갈란의 눈을 가렸다. 아딘은 이빨을 부득부득 간다.
또 다시 학살을 저질렀어. 또!
카릴과 블뢰즈는 물론이고 레이라마자도 참혹한 학살극을 목도하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딘은 안고 있던 갈란을 내려놓는다.
“갈란아. 눈 감고 있어야 돼.”
갈란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안 보여도 알 수 있다. 냄새가...... 나니까.”
갈란의 눈을 가리는 아딘의 손바닥에 그녀의 눈물이 흐른다.
가슴이 찢어지는 기분이다.
아딘은 주먹을 꽉 쥐고 카멜리아에게 걸어간다. 카멜리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은 채 한 집의 지붕 위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딘은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걷는다. 걸음마다 추억이 담겨있다. 아딘은 그 추억들을 밟아나간다. 카멜리아와의 추억. 같이 불꽃놀이를 보고, 같이 맛있는 요리를 먹고, 같이 여행을 가고, 같이 재밌게 놀고, 같이 인생을 살아나갔던 그 시절의 추억들.
전부 거짓말이었다.
이제는 안다.
아딘은 카멜리아를 노려보며 말한다.
“그 위장을 이용해서 내 동료들을 전부 죽인 거였군.”
“맞아. 이제 눈치 챘구나?”
“누구의 얼굴로 위장했지?”
카멜리아는 고개를 비스듬하게 한다.
“칼리로 위장했어.”
칼리. 아딘도 잘 아는 동료이다. 종종 임무도 같이 수행했었다. 무엇보다 칼리의 고백을 거절한 적이 있다. 그러니 잊을 수가 없다.
“하필이면 칼리를......”
“칼리의 마지막이 어땠는지 알려줄까?”
“뭣.”
“걔, 평소에 좀 짜증났거든. 은근슬쩍 너한테 접근하는 것도 그렇고, 알게 모르게 날 견제하는 것도 그렇고. 짜증나는 년이었지. 그래서 죽이기 전에 이런 말을 좀 해줬어.”
미소 짓는 카멜리아의 입이 양 옆으로 귓불까지 쭉 찢어진다.
초승달처럼.
“사실 아딘은 너를 존나 싫어해. 그래서 고백당할 때도 역겨워서 토할 뻔했대. 평소에 아는 척 해대는 것도 짜증났대. 가끔 같이 임무를 하게 되면 너무 무능하고 발목만 잡아 대서 진짜 어떨 때는 죽이고 싶었대. 너한테서 나는 냄새도 싫고, 네가 해주는 과자도 맛 없어서 다 버렸고, 하여튼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적이 하나도 없었대. 저런 애는 그냥 죽으면 좋을텐데. 왜 살까? 정말 싫다. 이런 투정을 내가 평소에 들어줬다고 말했어.”
아딘의 얼굴이 혐오로 일그러진다.
“뭐라고?! 난 그런 말 한 적 없어!”
“응, 거짓말을 했어. 근데... 킥... 그러니까... 걔가 어쩐 줄 알아...? 키키킥!”
카멜리아는 결국 폭소하고 만다.
“정말이지, 눈물 콧물 질질 흘려대면서 막 발광을 하면서, 방금 그 말 취소하라고, 아딘이 그럴 리 없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엉엉 울어대는 거 있지! 그러면서 아딘이 나랑 사귀도록 내버려두는 게 아니었다고 지랄을 하는 거야. 아하하하하하! 그걸 보고, 크크크, 너무 웃겨가지고 좀 더 두고 죽이려 그랬는데, 너무 웃겨서 그만 나도 모르게 목을 베어버렸지 뭐야! 캬하하하하하하하!!!”
보름달 아래에서 배를 부여잡고 미친 듯이 웃어대는 카멜리아는 더 이상 아딘의 눈에 예전의 연인으로 보이지 않았다.
악마로만 보였다.
아딘은 깨달았다.
처음부터 위장이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카멜리아는 쿠샤나바였고, 아딘에게 접근한 건 전부 정보를 빼먹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걸 인정하면 전부 명쾌하게 연결된다. 죽은 척하며 떠난 것도 그냥 내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어졌기 때문이지.
그래.
전부 그랬던 거였어.
체념한 아딘의 위로 산산 조각난 기억들의 조각이 쏟아져 내려 그를 상처 낸다. 피투성이로 만든다.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이젠 진심으로 쏠 수 있어.”
아딘은 화살을 시위에 걸고 카멜리아를 조준한다. 화살촉이 푸르게 빛난다.
슉! 화살은 빨랐지만 카멜리아의 회피가 한수 위다.
“더 이상 안 통해. 내가 아무런 대비도 안 하고 온 줄 알아?”
카멜리아는 허리품에 달고 있던 호리병을 열고 그냥 던져버린다. 그러고는 사파이어를 던져 순간이동을 시도하려고 한다. 아딘은 순간적으로 푸른 화살로 카멜리아가 아니라 그녀의 낙타를 조준해 꿰뚫어 죽였다.
“쳇.”
죽은 낙타의 옆에 나타난 카멜리아는 혀를 찬다. 그래서 자신도 레이라 일행의 말들을 붉은 섬광으로 쓸어버린다. 그리고 사파이어를 던져 순간이동을 한다.
아딘은 소리 지른다.
“도망치지 마!”
그러나 그 때 거대한 모래바람의 장벽이 나타나 마을을 둘러쌌다. 이건 틀렸다. 빠져나갈 수 없다. 아딘은 무릎을 꿇는다.
분노가 가시자 그의 눈에는 피의 향연이 보인다.
아딘은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한다.
그의 옆에 레이라가 다가온다.
차가운 눈빛이다.
“이제 네가 숨기는 게 뭔지 다 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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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딘과 레이라는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있다. 카릴과 블뢰즈는 둘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에 마을 사람들의 시체를 수습해 묻어주고 있다. 갈란은 혼자 멀찍이 떨어져 한 집의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다.
아딘은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두 가지를 말했다. 사실 기운이 없어서 거짓말을 생각도 안 들었다. 첫째는 쿠샤나바인 카멜리아와 자신이 어떤 사이였는지, 둘째는 죽었던 자신이 어떻게 살아났고 자신을 살린 존재가 무엇인지이다.
의외로 레이라는 별로 화내지 않고 차분하게 아딘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얘기가 끝나자 레이라는 모닥불에 굽고 있던 돼지고기를 한 입 뜯어먹는다.
“후, 하. 하후. 음. 네 이야기는 잘 들었어. 그렇게 된 거였군. 멀쩡해 보이는 놈이 자꾸 혼잣말을 종종 하니까 정신이 이상한 건지 뭔지 의심했는데, 뭐. 그런 거였나. 하나의 육체에 두 개의 영혼이라. 뭐 아예 없는 경우는 아니지.”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
“그래. 서해회사 이사회의 이사장이 너처럼 하나의 육체에 여러 영혼을 가지고 있어.”
“호오. 이사장이? 그거 참 신기하네.”
아딘은 레이라가 이사장을 입에 담을 때 콧잔등을 약간 찡그린 걸 포착했다. 아딘은 눈치껏 못 본 척 하고 말을 건다.
“별로 화 안 내네. 내가 거짓말을 했는데도.”
“화내기에는 지금 너무 지쳤어.”
“하긴 그렇지.”
아딘도 모닥불 근처에 꽂아두었던 돼지고기 꼬치를 집어 먹는다.
“그것보다 이제 어쩔 거야? 이대로 가면 열쇠를 두 개나 뺐기는 셈이잖아.”
“몰라. 이미 내 손을 벗어난 일이야.”
“이사회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거 아니었어?”
“방법은 많아. 근데 네가 내 신경을 왜 쓰고 난리야.”
아딘은 어깨를 으쓱인다.
“아니, 뭐. 그냥... 이사회 하니까 이게 생각나네. 너는 왜 이사회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야?”
레이라는 돼지고기의 질긴 부위를 죽 찢고 질겅질겅 씹어 삼킨다.
“멍청한 질문이네. 권력 때문인 게 당연하잖아.”
“그래? 근데 넌 명문가 출신이잖아. 날 때부터 권력의 정점에 선 거잖아. 근데 왜 굳이 빙빙 돌아가려고...”
“야.”
레이라가 무서운 얼굴로 아딘을 쏘아본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네가 알아봤자 뭐 하게? 다물고 고기나 뜯어.”
아딘은 고개를 돌리고 입을 삐죽인다. 레이라가 바로 말한다.
“입 삐죽이는 거 다 보여.”
“정말이지. 사람이 왜 그렇게 매정해?”
레이라는 들고 있는 고기를 빙빙 돌린다.
“매정해야 권력을 쥐지.”
아딘은 살짝 진지하게 물어본다.
“그렇다면 넌 권력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누군가를 상처 입히게 되더라도 상관없어?”
“또 멍청한 질문이네. 그건 나한테는 성립하지 않는 질문이야.”
“왜?”
레이라는 살며시 웃는다.
“나는 타인의 감정에 공감할 수 없거든.”
“공감할 수 없다고?”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이 기뻐하면 같이 기쁨을 느끼고, 슬퍼하면 연민을 느끼잖아. 하지만 난 그런 게 없어.”
“그렇구나.”
아딘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긴다.
나와 레이라는 서로 참 다르구나. 나는 감정에 너무 쉽게 휘둘리고 짓눌리는 편이다. 타인의 기분도 필요 이상으로 신경 써준다. 그래서 결국 이 지경에 놓인 거겠지. 다 자업자득이다.
아딘은 고개를 돌려 아직도 혼자 떨어져있는 갈란을 본다.
“배고플 텐데.”
아딘은 돼지고기 꼬치를 들고 갈란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 쭈그리고 앉는다.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갈란. 뭐라도 먹어야지.”
위로랍시고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하다. 사실 하룻밤 만에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을 전부 잃어버린 아이에게 뭐라고 말하면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스스로도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다음에는 한 달 정도는 폐인처럼 살았다.
아딘은 갈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고 손을 뻗는다.
“갈란......”
“만지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