넬리는 통쾌하게 웃으며 무릎을 팡팡 쳤다.
“좋아, 아아주 좋아. 그래. 여기 온 이유가 뭐야?”
“어떤 문을 열어야 하는데 수호자가 아니면 불가능해. 그래서 수호자를 소멸시키고, 너를 꺼낼 거야. 수호자 대신 네가 그 문을 좀 열어줘야겠어.”
“그렇구나아. 사실 붕괴는 머지않았어. 너희들이 수호자의 육체를 거의 박살냈고, 그 까마귀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나마저 빠져나가면 수호자는 그냥 사라지겠지. 하지만 날 빼내려면 ‘그’와 거래를 해야 해.
아딘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가 누구지?“
“하하! 직접 보는 게 더 나을 거야.”
넬리는 공간을 잡는다.
확 젖히니 또 다른 차원이 펼쳐졌다. 새하얀 방이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를 한 꼬마 남자애가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아딘은 그 안으로 들어선다. 터벅터벅 걸어간다.
꼬마의 등 뒤에 서서 그가 뭘 하는지 본다.
퍼즐이다.
꼬마가 뒤도 안 돌아보고 말한다.
“외부자가 들어온 건 처음인걸.”
“경계하지 않는군.”
“어차피 닥칠 붕괴였어.”
꼬마는 고개를 뒤로 돌려 아딘을 봤다.
“앉아.”
명령도 권유도 아닌 어조였지만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따라야만 하는 것처럼 몸이 저절로 움직인다.
아딘은 그와 퍼즐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넌 누구지?”
“난 관리자다. 심층구조가 어그러지지 않도록 조율하지.”
“관리를 서툴게 했군.”
“이 사태는 내 능력 밖의 일이야. 내부적으로 조율은 하지만, 외부로부터의 침입은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 원하는 게 있어서 여기에 왔겠지.”
“나는 넬리를 여기서부터 빼내고 싶어.”
관리자는 은근하게 미소 짓는다.
“마음대로 해. 이미 붕괴는 시작됐으니까. 대신 다른 무언가를 받아야겠어.”
관리자는 퍼즐을 내려다본다. 퍼즐은 단 한 조각만을 빼고 전부 맞춰져있었다.
관리자는 빈 공간을 검지로 짚는다.
“이게 뭔지 아나.”
“모르겠군.”
관리자는 고개를 저었다.
“이 비어있는 퍼즐은 ‘고독’이라는 감정이다.”
관리자는 아딘을 지그시 바라봤다.
“고독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야.”
“알 것 같군.”
“그래서 수호자를 만들 때 매개와 마찬가지로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거세했지. 한동안은 괜찮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외로움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수호자가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지. 계속되자 그 공허감을 견딜 수 없어서 심층구조가 파열되어버렸다. 아이러니하지. 존재를 죽이는 힘인 외로움을 없애봤자 그 빈자리에서 생겨나는 공허감이 존재를 쪼개버리지.”
“매개는 괜찮아 보이던데.”
“원래는 매개가 느껴야 할 공허감까지 수호자에게 부담되는 거다. 그래서 더 견딜 수 없었겠지. 나도 나름대로 조율해보려고 했지만 파멸을 막을 순 없었어.”
관리자는 어깨를 으쓱인다.
“이제는 깨달았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고독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나는 너에게서 고독이라는 감정을 받아내고 싶다.”
관리자는 아딘에게 손을 뻗었다.
“고독 때문에 죽을 뻔 했던 적이 있나?”
아딘은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그래.”
“아주 좋아. 걱정은 하지 마. 고독이 네 속에서 사라지는 건 아니야. 조금 떼어갈 뿐이지.”
관리자는 손바닥을 아딘의 가슴 정중앙에 갖다 댄다. 순간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수많은 심상들이 아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투병 말기에 야위어 살가죽이 뼈에 붙어버린 카멜리아의 팔······. 비 오는 날 관을 안치할 땅을 파는 스스로의 모습······.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며 수 없이 뒤돌아보던 어린 시절······. 카멜리아가 죽은 다음 날 혼자 깨어난 아침······. 다 말라서 바닥이 보이는 우물······. 시야를 가득 메운 무정한 사막······. 혼자가 되어 도시를 떠돌다가 사과를 훔쳤다가 걸려서 흠씬 두들겨 맞고 훌쩍이던 나······. 차가운 돌길에 몸을 뉘여 자고 일어나면 항상 온 몸이 결리던 때······. 카멜리아의 미소, 다시는 볼 수 없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하릴없이 더럽고 냄새나는 거리를 쏘다니던······.
그 이후로도 계속 심상들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침내 끝났을 때 아딘의 얼굴에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우는지도 몰랐던 아딘은 깜짝 놀랐다.
“이게 고독인가.”
관리자는 아딘에게서 추출해낸 고독의 일부분을 손으로 쥔다. 밝게 빛나는 구. 손에 쥐자 짜릿짜릿한 전류가 흐른다. 그런데도 어딘가 따스하기도 했다. 그리고 강력하다. 맥박 치는 고독이 경이로웠다.
“용은 이해할 수 없어. 인간에게 죽음에 이르는 병을 심어놓았으면서 그 병을 치료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부여하다니.”
“용?”
아딘은 되물었다.
“용이 정말로 우리 모두의 근원이야?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둥그런 대지는 용이 몸을 둥글게 만 그 위에 생긴 것이고?”
“그렇다. 너희들은 그렇게 배우지 않나? 그새 종교가 또 다른 걸로 바뀐 건가.”
“바뀌지 않았어. 다만 마음 속 어딘가에는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있었지.”
“용이 너희 모두의 어머니라는 건 사실이다. 이 대지 위의 모든 생명은 용에 속한다.”
“놀랍군.”
관리자는 씩 웃었다.
“이 대지 위의 생명 중에서 용의 존재를 못 느끼고 살아가는 생명은 인간뿐이다. 그래서 종교가 필요하지. 뭐 이런 얘기를 너랑 해봤자 소용없지만.”
관리자는 외로움을 확 움켜쥔다. 다시 피자 손 안에 퍼즐 한 조각이 생겨났다. 꼬마는 그 퍼즐 한 조각을 빈 공간에 끼워 넣었다. 딱 맞았다.
“복원은 끝났다. 언제까지 버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인격은 하나로 합쳐질 거야. 그 다음으로 네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보라고.”
“고마워.”
관리자는 아딘을 향해 손등을 젓는다.
“잠깐이지만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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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세상이 텅 비나 싶더니 다시 꽉 채워졌다.
아딘은 던전의 최심부로 돌아왔다.
팔짱을 끼고 옆에 서있던 레이라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한다.
“뭐야? 심층구조로 들어간다며. 헛소리였냐?”
“방금 들어갔다 나왔는데.”
“뭐?”
“봐봐. 수호자가 사라졌...”
분명히 수호자는 사라졌다. 하지만 수호자가 있던 자리에 알 수 없는 하얀 고리가 있다.
“이건 뭐지?”
“내가 알겠어.”
“음. 뭐 딱히 중요한 건 아니니까.”
아딘은 일어선다.
〈자아! 자아! 문을 열고 싶다며어? 내가 해주지!〉
프린의 목소리가 아니다.
넬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아딘은 경악하고 만다.
“잠깐만?! 너도 내 안에......”
아차. 실수했다. 아딘은 진땀을 흘리며 주위를 본다. 다들 이상하다는 듯이 아딘을 본다.
진정하자. 일단은 문을 열고 생각하자고.
아딘은 거대한 석조 문으로 걸어간다.
〈걱정 마아. 네 심층구조 깊숙한 곳에서 동면할 생각이거드은. 문만 열고 너와 나는 바이바이~ 는 거지.〉
“그것 참 고맙네.”
아딘은 문 앞에 선다. 그리고 둥그런 홈 사이에 팔을 집어넣는다. 그러자 홈에서부터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석조 문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그 빛이 너무 밝아서 아딘은 반대쪽 팔로 눈을 가릴 수밖에 없다.
“읏...”
곧이어 빛이 사라졌다. 아딘은 홈에서 팔을 빼낸다. 그러자 석조 문이 끼기기긱거리며 열리기 시작한다. 아딘은 웃으며 외친다.
“열렸다!”
그런 아딘을 레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로 계속 주시하고 있다.
분명히 무언가 숨기고 있어. 하지만 대체 뭔지 모르겠군.
뭐, 지금 신경써봤자 소용없지.
“자! 모두 안으로 들어간다!”
레이라가 외치자 일행들 모두 석조 문 안쪽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생각보다 넓었지만 텅 비었다. 오로지 가장 안쪽에 자그마한 단이 있었을 뿐이다. 그 단 위에는 가지가 이리저리 달린 이상한 검이 올려져있다.
아딘은 저 검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거야. 저게 내가 쿠샤나바와 싸웠을 때 봤던 아티팩트야.”
레이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알고 있는 모습이랑 똑같네. 좋아, 그럼......”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레이라가 가서 집기도 전에, 촌장이 잰걸음으로 앞서나가 자기가 먼저 열쇠를 잡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촌장은 평온한 얼굴이다.
너무 뜻밖의 일이라 다들 아무런 반응도 못 했다.
그나마 가장 냉정한 레이라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으르렁댄다.
“야, 너. 뭐하는 짓이야? 당장 그거 내려놔! 네가 감히 뭔데-.”
촌장은 씩 웃으며 레이라의 말을 자른다.
“내가 아직도 촌장으로 보여?”
남자의 목소리가 아니다.
여자의 목소리다.
아딘의 동공이 경악감에 수축한다.
카멜리아의 목소리다.
촌장은 키득 키득거리며 자신의 턱을 잡는다. 그리고 얼굴 피부를 확 벗겨낸다. 하지만 드러난 것은 피로 벌건 근육덩어리가 아니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서서히, 촌장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변해간다.
얼굴이 표변한다. 지금 그 자가 들고 있는 촌장의 얼굴 가죽과는 다른 것으로.
꿈틀꿈틀, 울렁울렁, 파직파직.
카멜리아의 얼굴이 나타난다. 그녀가 몸을 한 번 털자 입고 있는 옷도 촌장의 옷이 아닌 원래 입고 있던 쿠샤나바의 제복으로 바뀐다.
레이라는 분노를 담아 카멜리아를 쏘아본다.
“쿠샤나바!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망할. 또 우리를 방해하......”
“카멜리아?! 네가 어떻게 여기에.”
아딘은 자기도 모르게 외쳤다가 실수를 깨닫고 입을 닫아버린다.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이다. 일행들 전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아딘을 바라본다.
레이라가 한마디 한다.
“너, 저 쿠샤나바랑 아는 사이야?”
“그게...”
아딘이 우물쭈물하는 하던 중, 갈란이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러대며 주저앉고 만다. 갈란의 시선은 카멜리아가 손에 든 촌장의 얼굴 가죽에 꽂혀있다.
“아, 빠...? 우, 우리 아빠를 어쨌어! 어쨌냐고!!”
카멜리아는 갈란의 앞에 촌장의 얼굴 가죽을 휙 던진다.
“보고도 몰라?”
갈란은 넋이 나간 얼굴로 한 때는 아빠의 얼굴이었던 것을 바라본다.
“말도 안 돼. 죽은 거야? 아빠가... 죽었다고?”
“응. 내가 죽였어.”
카멜리아의 대답에 갈란은 고개를 튕겨지듯 들어 올려 카멜리아를 노려본다. 카멜리아는 그런 시선을 즐기는 듯하다.
“부리나케 도망치고 있더라고. 혹시 유물단일지도 모르니까 일단 죽여 뒀지. 그리고 또 모르니까 얼굴 가죽을 벗겨내서 위장했고.”
얼굴 가죽. 위장.
아딘의 속에서 무언가가 퍼즐 맞추듯 아귀가 딱 떨어졌다.
지금까지 도둑회의 때 간부들이 전부 몰살당한 이유를 몰랐다. 하지만 얼굴 가죽을 이용한 위장이라면 말이 된다. 그거라면 전부 당할 수밖에 없어.
“싫어...”
갈란의 볼 아래로 두터운 눈물이 뚝뚝 흘러 떨어진다.
“대체 왜...... 어째서...... 너무해, 너무하다고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