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군. 아까랑은 달라.”
아딘은 철창 속에 갇혀있다. 구석에서는 쥐가 찍찍대고 있다. 아무래도 제물소녀가 그 집에서 달아나지 못하고 감옥에 갇힌 모양이다.
“참 얄궂은 운명이구만.”
그 때 누군가가 감옥에 왔다. 아딘은 눈을 돌려 그 자를 본다. 간수 같은데 얼굴이 멍청해 보인다. 그리고 엄청 못생겼다.
간수는 죽이 담긴 그릇을 철창 아래로 밀어 넣는다.
“야, 빨리 와서 처먹어. 가지러 또 오기 귀찮으니까.”
굴욕이지만 배고픈 건 어쩔 수 없다. 아딘은 죽을 허겁지겁 먹는다.
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아딘은 표독스럽게 소리 지른다.
“아니! 여기 안에 바퀴벌레가 있잖아요!”
“뭔 개소리야? 죽고 싶어?”
간수는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지금 나한테 바퀴벌레 죽을 준 거에요? 이럴 거면 왜 줘요!”
“이 빌어먹을 년. 대체 어디 있다고 지랄이야? 봐봐!”
아딘은 일어서서 쇠창살 앞에 그릇을 갖다 댄다.
간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살펴본다.
“이 쌍년아. 바퀴벌레가 어디 있다고······.”
아딘은 뜨거운 죽을 놈의 얼굴에 확 쏟았다. 그리고 비명을 채 지르기도 전에, 두 손으로 놈의 머리를 잡고 쇠창살에 마구 박아댄다. 그렇게 열 번 쯤 박아댔을까. 코뼈가 부러진 간수는 결국 기절해서 바닥에 풀썩 쓰러지고 만다.
“좋았어.”
아딘은 간수의 주머니를 뒤져서 열쇠를 찾았다. 그걸로 철창을 빠져나온다.
“근데 이제 어쩌지?”
일단 일은 벌리긴 했는데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간수의 옷을 입어봤자 여자라서 금방 들킬게 뻔하다. 옷이라. 아딘은 간수의 옷을 뒤져 단검 하나를 찾아낸다.
아딘은 단검을 쥔 채 감옥 문을 열었다. 벽과 돌계단이 보인다. 위로 향하는 걸로 보아 지하가 맞긴 맞나보다. 아딘은 벽에 귀를 대고 가만히 소리를 들었다. 누가 오고가는 것 같지는 않다.
아딘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간다. 다 올라가니 복도가 보인다. 아딘은 이곳이 요새임을 알아챘다. 복도의 창문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걸로 보아 낮인 듯하다.
“어쩌지.”
복도로 나가야 하나? 어떻게 도망치지? 누굴 만나면 어떡하고? 단검이 있긴 하지만 여기는 숲이 아니다. 게다가 낮이다. 요새 안에서는 병사 네댓 명에게만 둘러싸여도 끝장이다.
가만히 고심하던 아딘은 복도 너머에서 나는 발소리를 들었다. 아딘은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몸을 납작 붙인다. 만약에 이쪽으로 오면 감옥 안으로 피해서 처리해야 한다.
아딘은 귀를 기울인다. 발소리가 하나 더 추가됐다.
두 발소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말소리가 시작되었다.
“이봐, 시간 있나?”
걸걸한 남자 목소리다.
“지금 병영에 식사를 전달하러 가야해서요.”
여자의 목소리다. 하녀인가?
“잠시 나 좀 보지.”
“잠깐, 잠깐만요, 성주님.”
옷자락이 서로 슥슥 부대끼는 소리가 난다. 아무래도 성주가 하녀한테 집적대는 모양이다.
“저 지금 늦었어요. 지금 세상도 꼴이 말이 아닌데, 이러시면 안 돼요!”
“조용히 해! 잠깐이면 끝나. 오히려 이렇게 됐으니까 즐길 때 즐겨야지. 어서 와!”
“잠깐, 아야! 너무 세게 잡지 마세요. 제가 걸을게요!”
두 사람은 소리는 그렇게 멀어져간다.
아딘은 다시 조용해지자 위로 올라온다. 하녀가 놓고 간 커다란 쟁반 위에 음식들이 올려져있다. 아딘은 자신의 옷을 돌아본다. 별로 좋아보이지도 않지만 아주 허름하지도 않다.
하녀 복장으로는 딱 좋지 않은가?
아딘은 얼굴의 양옆이 가려지도록 머리를 손으로 빗어 내린다. 그리고 쟁반을 들고 복도를 걸어간다.
“내일 경마가 있다는데, 갈 텐가?”
반대편에서 병사들이 수다를 떨며 걸어왔다. 아딘은 침을 꿀꺽 삼킨다. 고개를 너무 수상해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숙였다. 다행히 병사들은 아딘에게 아무런 관심도 안 주고 가버렸다. 아딘은 씩 웃고 자신감 있게 걸어간다.
1층으로 내려가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요새를 둘러싼 성곽이 보인다. 붉은 깃발이 군데군데 걸려있다. 대지진의 여파인지 군데군데 금이 가있다. 그나마 형태는 유지하는 걸 보면 진앙지로부터 거리가 떨어진 곳인 듯하다.
계속 걸어가는데 하녀로 보이는 아줌마가 다가와 말을 건다.
“야. 너 어디 가니? 그거 병영의 병사들에게 갖다줘야하는 거 아니니?”
“죄송해요. 성주님께서 야외에서 식사하고 싶다고 하셔서 갖다드리러 가고 있어요.”
“그 변태자식! 너도 조심해. 영 맘에 안 드는 인간이니까.”
아딘은 씩 웃는다.
“고마워요.”
아딘은 쟁반을 들고 요새 옆의 숲으로 들어간다. 적당히 들어가서 쟁반을 아무데나 내팽개치고 또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아딘은 기쁨에 겨워 두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해냈어!”
갑자기 풍경이 빙빙 돌며 바뀌기 시작한다.
아딘은 다시 그 지하감옥으로 돌아왔다.
프린이 놀란 목소리로 말한다.
“지금은 거의 들어가자마자 나온 수준인데?”
“여기랑 거기는 시간이 다르게 흐르나보지, 뭐.”
아딘은 주저 없이 다음 구슬로 들어간다.
어둠과 빛이 교차한다.
아딘은 눈을 떴다.
이번에는 상황이 최악이었다. 그의 몸은 포승줄에 칭칭 감겨있다. 양쪽의 병사가 아딘의 팔을 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가고 있다. 아딘은 이곳이 어딘지 알았다.
던전의 최심부.
삼라만상의 근원이 그려진 거대한 문 앞에 펄펄 끓는 솥이 있다. 주변에는 이상한 주문을 웅얼대는 수상한 자들이 가득하다. 아딘은 점점 가까워지는 솥을 본다. 김이 안개처럼 피어오른다. 제물로 바쳐지기 직전인 듯하다.
“망할.”
공포를 느끼는 아딘은 진땀을 흘린다.
두 병사는 아딘을 질질 끌고 솥 앞의 단 위에 올라선다. 아딘은 커다란 기포가 펑펑 터지며 끓어오르는 녹색 액체를 바라본다. 들어가자마자 전신이 녹아버릴 게 뻔하다.
“욱!”
아딘은 구역질을 느꼈다. 그 안에서 이리저리 마구 뒤섞이며 흐르는 까마귀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수호자를 만들어냈군.
아딘은 앞을 봤다. 가슴 중앙에 까마귀 문양이 새겨진 황금 갑주를 입은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버티고 서있다.
혹시 이 자가 수호자의 육체가 된 자인가? 얼굴은 까마귀 부리 모양의 투구로 가려져있어 보이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른팔이 없었다. 비교적 최근에 잘린 듯 오른 어깨를 붕대로 두텁게 감쌌다.
이것이 고대 닐리님의 인체실험. 직접 눈으로 보니 훨씬 역겹다.
“넣어라.”
갑주의 남자가 말하자 두 병사가 아딘을 밀어 넣으려고 한다.
“아아아악!”
아딘은 비명을 지르고는 외친다.
“안 돼요! 제 뱃속에는 아기가 있다고요!”
“뭐라고?”
갑주 남자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병사는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들은 모른다는 표정을 짓는다.
갑주 남자가 으르렁댄다.
“이 여자가 임신했다고? 믿을 수 있나?”
“저희들은 모르겠습니다. 배는 안 나왔는데.”
아딘은 다급히 말한다.
“아직 얼마 안 돼서 그래요! 제 아기까지 죽일 셈이에요?”
그런 건 이 자들에게 별 문제가 안 된다.
문제는 매개물 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있으면 인체실험이 곤란하다는 것이다.
갑주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귀찮군. 그냥 집어넣으면 안 되나?”
“이 짓거리를 망치고 싶으면 그러시든가요!”
아딘이 떽떽 대자 그는 성가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젠장. 다른 제물은 없어? 꼭 이 여자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한 병사가 대답했다.
“그게 말이죠. 인체에 인위적 조작을 가하지 않은 순수한 처녀를 구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빌어먹을.”
갑주 남자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어쩔 수 없군. 아주 급한 건 아니니. 일단 이 년을 도로 가두고 다른 제물을 찾아봐. 정 없다싶으면 아기를 지워버리고 해야지. 가 봐.”
두 병사는 갑주 남자에게 허리 굽혀 인사하고 아딘을 도로 감옥으로 끌고 갔다. 아딘은 고개를 숙인 채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일단 위기는 벗어났다. 남은 건 감옥에서 어떻게 도망 칠지이다. 그리고 아딘에게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또 풍경이 바뀌어간다. 하지만 빙빙 도는 게 아니라 마치 이상한 차원에 들어온 느낌이다. 한없이 뻗어가는 선의 원통 안에 들어있는 듯하다.
선들의 윤무가 사라지자 지하감옥이 나타났다.
아딘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어떻게든 됐네.”
“수고했어! 내가 나설 필요도 없었네.”
“그 괴물은 어떻게 됐어?”
아딘은 고개를 돌려 괴물이 있던 곳을 본다. 아무것도 없다. 프린이 설명해준다.
“마지막 악몽 구슬이 사라지자 저것도 갑자기 사라졌어.”
“이제 장벽도 없다는 거군. 서두르자고.”
아딘과 프린은 다시 위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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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딘과 프린을 장벽이 있던 층을 지나 꼭대기 층에 도착했다.
둘은 나무문을 앞에 두고 서로를 바라본다.
“프린, 연다?”
“주저할 게 뭐 있어?”
아딘은 문고리를 잡고 단번에 문을 확 연다.
짝, 짝, 짝, 짝.
“와하하하! 너 정말 멋진데?”
아딘은 움찔한다. 텅 빈 방 안에서 예쁘장한 밤색 장발의 처녀가 활짝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다.
아딘이 묻는다.
“네가 넬리야?”
“그러엄. 물론이지.”
“널 찾느라 죽는 줄 알았다.”
“아하하하하!”
넬리는 엄지를 추켜올린다.
“내 악몽을 해결해준 거, 저엉말 훌륭했어. 나도 진즉에 너처럼 할 걸!”
아딘은 펄펄 끓던 솥을 떠올렸다.
“제물로 바쳐질 때, 고통스럽지 않았어?”
“워낙 한 방에 끝나가지고. 눈을 떠보니까 그 이상한 수호자라는 놈의 심층구조 안에 있더라고.”
“내가 알기론 넌 이 안에 거의 천 년 동안 있었을 텐데, 외롭지는 않았어?”
넬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을쎄에. 정말로 엊그제 같아서. 사실 이 안에 들어온 이후로 시간의 흐름을 전혀 못 느끼고 있어. 감정구조도 약간 이상해 진 것 같고. 외로움이 안 느껴지더라고. 하긴 내가 이 안에서 외로움을 느껴서 미쳤다가는 수호자가 쪼개지겠지? 근데 그것 때문에 내가 좀 이상해 진 것 같아. 어때?”
아딘은 넬리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봤다.
“일리 있군.”
“파하하하하!”
넬리는 통쾌하게 웃으며 무릎을 팡팡 쳤다.
“좋아, 아아주 좋아. 그래. 여기 온 이유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