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딘은 다시 일어나 프린을 끌다시피 하며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언제 또 석궁 화살이 날아올지 몰라 자꾸 뒤를 확인하느라 속도가 빨라지질 않는다.
“어엇!”
한 나무 뒤 그림자의 움직임을 포착한 아딘이 프린을 감싸 안고 옆으로 몸을 던진다. 아딘이 서 있던 곳에 화살이 박힌다.
저거 왠지 나만 노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아딘은 다시 프린의 손을 잡고 달린다. 가면 갈수록 오솔길의 지면이 거칠어져서 뛰기도 어렵다.
“야! 프린!”
“왜?”
“내 화살촉에 축복 좀 걸어봐!”
프린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아, 그거 무리.”
“왜?!”
“여긴 수호자의 심층구조 안이잖아. 여기서 내 힘은 제한적이라고?”
“그러니까...”
아딘은 갑자기 몸을 밑으로 팍 숙인다. 또 아딘의 위를 화살이 뚫고 날아간다. 그는 도로 벌떡 일어나 달린다.
“그런 건 좀 미리미리 말해달라고!”
“말해봤자 별 수 없잖아~”
“시끄러!”
달리는 아딘은 뒤를 확인한다. 어찌나 잘 숨는지 보이지도 않는다. 망할 자식.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견제를 안 하니까 더 기세가 오른 듯하다.
“순순히 당할 줄만 알고.”
아딘은 잠시 멈춰 서서 시위에 화살을 걸고 조준한다. 아직 어디에서도 움직이는 기척은 없다. 나와라, 어서 나와!
“그럴 시간 없다니깐?”
“조용히!”
그 순간 왼편의 숲의 한 나무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아딘은 재빨리 그곳을 조준해 화살을 쏜다. 아딘의 화살은 괴한이 쏜 석궁 화살을 찢어발긴다. 그 찰나의 때, 괴한의 얼굴이 얼핏 보였다. 아딘은 눈을 비비며 자신이 본 것을 의심한다.
“저거 난데?”
프린이 대답한다.
“너의 그림자야. 네가 이 심층구조에 너의 정신을 투영하면서 같이 흘러나온 거겠지.”
“내 그림자가 왜 나를 죽이려고 해?”
“그러니까, 음. 일단 그림자라고 말은 했지만, 더 자세하게 말하면 모든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죽음의 운명 비슷한 건데. 그러니 생명의 순환에서 네가 양이면 저 그림자가 음이고, 둘이 만나면 당연히 음이 양을 삼키려고 할 테니까. 망할! 나도 자세히는 몰라.”
“내가 널 모험시켜주는 게 아니라 네가 날 모험시켜주는 거구만,”
그 사이에 또 석궁 화살이 날아온다. 간신히 피한 아딘은 프린과 함께 다시 필사적으로 달린다.
정말 죽도록 달린 끝에 겨우 고성의 입구에 도착했다. 전부 녹이 슬어버린 입구의 철창문은 고장 나서 반쯤 열려있다.
아딘과 프린은 그 좁은 틈새를 통해 입구를 지나간다. 넓은 마당이 나왔고, 그리고 산 같은 무게감을 자랑하는 고성이 보인다.
프린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여기 도착했으면 됐어. 여기서부터는 수호자의 영역이라서 네 그림자가 못 들어와.”
“그럼 저 숲은 내 영역이란 거야?”
“응. 네 정신이 투사된 곳이니까. 하지만 이 고성은 수호자의 고유 결계라서, 네 정신이 깊게 투사되진 못 해. 그래서 수호자의 영역으로 간주되어 네 그림자는 건너오질 못 해.”
들으면 들을수록 더 알 수가 없어진다. 아딘은 그냥 생각하는 걸 포기한다.
“관두자. 알려고 해봤자 뭐 하겠어.”
“의외로 현명하구나, 인간. 이곳은 인간의 이해 영역을 초월하는 곳이라 너무 이해하려고 노력하면 미쳐버릴지도 몰라.”
아딘은 고개를 들어 고성을 관찰한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와보니 고성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하얀 구멍. 마치 하얀 물감을 찍은 듯하다.
“왜 이렇게 구멍이 많아?”
“너도 봤잖아, 수호자의 정신이 분열된 거. 그래서 이런 거야.”
“그렇군. 근데 그 정신 분열이 진짜 외로움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음, 뭐. 대강은 맞아. 생명의 순환을 위해서 용이 모든 생명체의 내부에 심어 둔 자가파괴장치 비슷한 거지. 수호자니까 그나마 살아있는 거지 보통 인간이면 진즉에 죽었어.”
여러 의문이 솟아나지만 아딘은 그냥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는다.
아딘은 고성 꼭대기의 첩탐을 바라본다.
“저 꼭대기에 제물소녀가 갇혀있다는 거지? 그걸 해방시키면 임무 완료인거고.”
“조심해야 돼. 이 고성에는 곳곳에 몬스터가 있으니까. 그리고 저 하얀 구멍에 빠져버리면 그냥 소멸당해.”
“잠입은 질리도록 해봤어. 근데 너를 어떻게 따라올 거야? 잠입할 줄 알아?”
“내가 잠입을 왜 해?”
프린은 말을 마치고 공중에 붕 뜬다. 아딘은 입을 떡 벌린다.
“너... 그럴 수 있었으면... 아까 왜 뛴 거야? 그냥 날면 되는데...”
프린은 배시시 웃는다.
“그게 말이다, 헤헷. 소설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그 상황이 맘에 들어서 그만 즐겨버렸지 뭐냐. 나름대로 좋았다고?”
아딘은 고개를 젓는다.
“말을 꺼낸 내가 바보지.”
아딘은 고성을 향해 걸어간다. 고성은 해자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리고 도개교가 보인다. 당연히 올려져있다. 도개교 뒤에 성문이 감춰져 있고, 그 위의 성곽에는 검은 갑주를 입은 병사들이 서너명 보인다. 사실 사람인지 뭔지는 알 수 없다.
시작부터 난관이다. 이곳에서는 아딘의 아티팩트 장화도 힘을 못 쓴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때는 조금 무식한 방법이 최선이다.
아딘은 감시병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낮추고 해자 테두리를 따라 걷는다. 다행히 주위가 전부 잿빛이라 잘 안 보일 것이다.
아딘은 적당한 곳에 서서 해자 아래를 내려다본다. 13m정도 되는 듯하다. 밑은 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품에서 조금 작은 사이즈의 스톡을 꺼내 양손에 든다. 도둑의 잠입에 있어서는 빼먹을 수 없는 도구이다.
“가볼까.”
아딘은 벽면에 스톡을 박아가며 천천히 해자를 내려간다. 13m정도라서 금방 내려갔다.
“물은 안전하나?”
아딘은 손을 뻗어 물을 만져본다. 그냥 물이다.
“프린. 물속에 뭐 이상한 거 없어?”
“딱히 없는걸.”
“좋아.”
아딘은 물에 몸을 담근다.
담그자마자 고성에 종이 울린다. 뎅-. 뎅-. 뎅-.
아딘은 프린을 노려본다.
“아무것도 없다며?!”
“나도 모르는 건 있는 법이라구.”
“으이구, 진짜!”
아딘은 빠르게 헤엄쳐서 반대편 해자 벽에 몸을 붙인다. 그러나 검은 병사들은 벌써 아딘의 위치를 파악했다. 서로 뭐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빨리 올라가야겠어.”
아딘은 스톡을 이용해 벽을 오른다. 그러나 검은 병사들이 아딘을 향해 화살을 쏴댄다. 아딘은 지그재그로 벽을 올라 최대한 화살을 피해본다. 아딘을 맞추지 못한 화살들은 벽에 박히거나 물에 떨어진다.
“후아!”
간신히 끝까지 올라온 아딘은 땅을 잡고 올라선다.
“이렇게 된 이상, 조심스럽게 잠입할 이유가 없지.”
아딘은 고성 꼭대기의 첨탑을 주시한다.
“직진이다.”
아딘은 스톡 하나는 집어넣고, 남은 하나의 스톡의 손잡이에 로프를 친친 묶는다. 그리고 성곽 위로 던지고, 로프로 끌어본다. 확실히 고정되었다. 아딘은 로프를 잡고 당기며 성벽을 오른다. 빠르게, 그러나 성급하지 않게.
“큭!”
아딘은 화살이 머리 바로 위를 쓸고 지나가서 몸을 움츠린다.
속도가 생명이다. 아딘은 더 빨리 발을 움직여 거의 뛰듯이 성벽을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거의 다 왔을 때, 한 검은 병사가 쏜 화살이 로프를 끊었다.
“우와아악!”
아딘은 떨어지려는 찰나에 품에서 스톡을 꺼내 성벽의 돌과 돌 사이에 콱 끼워넣는다. 돌 부스러기가 밑으로 떨어진다. 아슬아슬했다. 아딘은 힘을 줘서 몸을 끌어올려 성곽을 잡고 올라간다.
“겨우 왔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딘은 로프를 묶었던 스톡을 집는다. 그렇게 두 손에 스톡을 잡고 아딘은 빠르게 고성을 둘러본다. 원형의 성벽 안에 다섯 개의 첨탑이 솟아있다. 가장 높은 첨탑. 저곳으로 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 전에 이 자식들을 처리해야지.
아딘은 몸을 돌려 검은 병사 네 명을 본다. 그들은 각자 창과 칼을 들고 아딘에게 다가오고 있다. 갑주 안쪽은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넘실거린다.
“프린. 얘들 없앨 수 있는 거야?”
“음...... 투구를 벗겨내. 그러면 사라질 거야.”
“좋아.”
아딘은 스톡을 던지고 양손에 단검을 잡은 뒤, 앞으로 뛰쳐나간다.
한 병사가 아딘을 향해 창을 찌른다. 아딘은 몸을 뒤로 휘리릭 돌려 피하며, 동시에 왼발을 높이 들어 올려 이단옆차기로 놈의 투구를 차버린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위로 솟으며 놈이 사라져간다.
이 정도밖에 안 돼? 약한걸. 자신감이 붙은 아딘은 호쾌한 움직임으로 남은 검은 병사들에게 달려든다. 위로 내려치는 칼을 단검으로 빗겨내고, 투구를 찔러 뒤로 날려버린다. 찔러드는 창은 옆으로 움직여 피하고, 창대를 발로 콱 밟아 부러뜨린 뒤 그 놈의 투구도 날려버린다.
“읏!”
마지막 남은 놈이 갑자기 활을 들고 서있어서 아딘은 몸을 확 숙인다. 화살이 빗나갔다. 아딘은 단검을 던져 놈의 투구를 맞춘다.
“생각보다는 수월하네.”
“수호자가 빈사 상태니까 그런 거야. 딱히 네가 강한 건 아니니까 자만하지 말도록, 한심한 인간.”
아딘은 씩 웃는 프린을 찌릿 노려본다.
“빈정 상하게 하는 데는 엄청 소질이 있군.”
허나 프린과 싸우기에는 시간이 없다.
아딘은 다시 스톡을 이용해 성벽을 내려간다. 곧바로 가장 높은 첨탑의 입구를 향해 뛴다. 그런데 곳곳에 하얀 구멍이 뚫려 있어서 마음껏 달릴 수가 없었다. 아딘을 쫒아오는 검은 병사들도 종종 하얀 구멍에 떨어져서 빨려들어간다.
뎅-, 뎅-, 뎅-.
가장 높은 첨탑에서 나는 종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입구가 바로 눈앞에 보이고, 앞으로 한 발 짝이면 들어갈 수 있을 때였다.
위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무언가를 직감한 아딘은 잽싸게 뒤로 몸을 뺐다. 아딘이 있던 자리에 육중한 바위 같은 것이 떨어진다.
쾅!!!
아딘은 나풀거리는 흙먼지를 손으로 저으며 떨어진 게 대체 무엇인지 본다.
커다란 바위다. 근데 움직인다. 더욱 위압적이 되어간다.
골렘이다. 거의 성문만한 크기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검은 연기가 관절 같은 역할을 해주며 바위와 바위 사이를 이어 붙여 골렘의 형태가 된 것이다. 무서울 정도로 둥그런 두 눈은 붉게 빛난다.
“쿠오오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