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겠어! 일단 모두 후퇴한다. 날 따라라!”
레이라 일행은 그녀를 따라 석상 뒤로 난 커다란 통로로 들어가 도망친다. 촌장이 제일 뒤처진다.
통로는 생각보다 길어서 아무리 뛰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가끔 뒤를 보면 좀비들은 지치지도 않고 일행을 쫒는다. 통로를 뛰면 뛸수록 이곳저곳에서 갈림길이 있었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다.
레이라는 아딘에게 외친다.
“아딘! 너 신기한 화살 쏘던데, 그걸로 천장을 쏴서 통로를 막아버려!”
“뭐? 그러면 돌아갈 길이 막히......”
“닥쳐! 하라면 하는 거야!”
아딘은 어쩔 수 없이 뒤를 보며 기회를 엿본다.
〈킥킥킥. 곤란한 단장님이네. 괜찮아. 내가 새로운 축복을 걸어줄게. 근데 한 발로는 조금 부족할 지도?〉
“망할!”
아딘은 한 번에 화살을 세 개나 시위에 건다. 이런 짓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아딘은 몸을 돌려 좀비떼와 일행 사이의 빈 공간의 천장을 겨눈다.
화살촉이 붉은 빛을 발한다. 아딘이 쏜 세 개의 붉은 화살은 천장에 박힌다.
1초 뒤, 커다란 폭발이 일어나 굉음을 내며 천장이 무너진다.
아딘은 멈춰 서서 혼잣말을 한다.
“됐나?”
붕괴 때문에 자욱한 흙먼지가 날아와 일행을 덮친다. 다들 콜록거린다. 흙먼지가 걷히자 바위들이 통로를 막은 게 보인다. 겨우 안전해졌다.
아딘은 한숨을 쉰다. 그런데 갑자기 아딘이 비명은 지른다.
“아버님! 아버님이 없도다!”
뭐라고? 아딘은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본다. 정말로 촌장이 없다. 갈란은 잔뜩 울상이 되어서 이리저리 오간다.
레이라가 말한다.
“오던 중에 갈림길이 많았던데 그만 다른 길로 가버렸나?”
“어, 어떡하느냐! 아버님이, 아버님이.......”
우왕좌왕하는 갈란을 레이라가 멈춰 세운다.
“야. 어쩔 수 없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냐! 아버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방법이 없다니까.”
갈란은 눈을 질끈 감으며 소리 지른다.
“이거 놔, 이 바보야! 너 따위 말은 안 듣는-.”
갈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레이라가 소녀의 뺨에 따귀를 갈긴다. 그 충격으로 갈란은 바닥에 쓰러져 놀란 얼굴로 얼얼한 볼을 매만진다.
“레이라!!”
아딘이 반응하기도 전에 카릴이 뛰쳐나와서 레이라의 멱살을 부여잡는다.
“너 미쳤어? 왜 애를 때리고 지랄이야?”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저 돌을 다 치우고 좀비 떼를 뚫고 촌장을 구하러 갈까? 게다가 어차피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
카릴은 눈을 부라린다.
“그렇다고 때릴 필요는 없잖아!”
“계속 짜증나게 징징 거리잖아.”
“너 진짜......”
보다 못한 블뢰즈가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한다.
“둘 다 그만두게! 지금 같은 위기에서 내분을 일으켜봤자 어쩔 셈이란 말인가? 자, 진정하게나.”
그 사이에 아딘은 쓰러진 갈란을 부축해준다.
“갈란아. 괜찮아?”
갈란은 멍한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손으로 감싼다.
“아버님이... 아버님이 죽었으면 어떡하느냐... 저런 괴물들 속에서 살아남을 리가 없다! 어떡하면 좋느냐... 대체 어떡하면...”
아딘은 흐느끼는 갈란을 안아준다. 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며칠 전만 해도 위로받아야 하는 처지였던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위로해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아딘은 갈란의 등을 토닥여준다.
“미안해. 내가 더 신경 썼어야 되는 건데. 내 잘못이야.”
“아니다... 내 잘못이다... 아버님을 챙기지 못한 내가 못난 것이니라...”
그렇게 아딘이 갈란을 보듬어주고 있는데 카릴과의 설전을 끝낸 레이라가 다가온다. 아딘은 레이라를 쳐다본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탐탁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둘을 내려다보고 있다. 두 눈은 한없이 냉랭하다.
“감상에 허비할 시간 없어. 일어나, 그리고 걸어.”
아딘은 눈살을 찌푸린다. 뭐라고 한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그래봤자 레이라가 들을 리가 없다. 입만 아플 뿐이겠지. 아딘은 일어나서 갈란의 손을 꼭 잡고 걷는다.
함께 따라 걷는 갈란이 눈을 비비며 아딘에게 속삭인다.
“고맙다.”
아딘은 미소지으며 갈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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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은 또 다시 불안에 휩싸였다. 또 한 명의 불청객이 마을에 왔기 때문이다. 그 불청객의 이름은 카멜리아이다. 카멜리아는 낙타에서 내린다. 복부의 상처는 이제 다 나았다.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 마을로 들어간다.
주민들이 몰려나와 대체 그녀가 누군지 관찰하지만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지금의 카멜리아는 쿠샤나바라는 정체가 안 드러나도록 위장한 상태이다. 팔이나 다리도 인간처럼, 이마의 표식도 없다.
“이, 이보시오!”
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카멜리아를 막아선다. 그도 자기가 원해서 나온 게 아니다. 그나마 촌장과 가장 가까운,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어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린 것에 불과하다.
“당신은 대체 누굽니까? 당신도 그 자들과 한 패거리요?”
카멜리아는 우뚝 멈춰 서서 그를 응시한다.
“그 자들? 그 자들이 누구지?”
그녀의 무서운 눈에 압도된 그는 개미가 기어들어가듯이 말한다.
“그러니까. 총 네 명인데. 유물단이라는 것 같았는데...... 당신도 유물단이오?”
카멜리아는 쓴웃음을 짓는다. 늦었나.
“그 자들은 지금 어디 있지?”
“그, 그건...”
그는 마을 사람들의 눈치를 본다.
“그건 말할 수 없소! 지금은 촌장도 무녀도 없고, 무엇보다 당신을 믿을 만한 그게 없잖습니까. 이 이상 그곳에 외부인을 들일 수는 없어요!”
카멜리아는 어깨를 으쓱인다.
“그거 참 애석하네요.”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그의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쳐 기절시켜버린다. 그걸 본 마을 사람들이 격양하며 싸울 채비를 한다. 하지만 무기를 들어봤자 농기구나 식칼 정도이다. 우스운 수준이다. 하지만 다들 표정만큼은 진지하다. 혹은 겁에 질렸거나.
“하하하.”
카멜리아는 헛웃음을 터뜨리고 본모습으로 되돌아간다. 다리와 팔이 곤충처럼 변하고, 턱이 사마귀처럼 변모하고, 이마에는 쿠샤나바의 표식이 돋아나고, 오른 눈이 기형적으로 커지며 빨간 눈동자도 세 개나 생기고, 신장이 늘어나고 혀가 갈라져 광선 사출장치가 드러난다. 주민들은 그걸 보고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러댄다.
빨리 끝내자.
카멜리아는 그렇게 생각하고 사출장치를 가동한다. 붉은 광선이 횡으로 가로질러 주민들의 허리를 투두두둑 잘라버린다. 단 한 번에 절반이 죽어버린다. 온 사방에 피가 튄다. 내장이 터져 흘러나온다. 너무도 순식간에 찾아온 파멸에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한다.
다시 한 번 붉은 광선을 내뿜어 횡으로 가로지른다. 또 절반이 죽어나간다. 사지가 잘려나가 추하게 피 웅덩이 속에서 버둥거리고, 대가리가 날아가고, 무너진 집에 깔려 죽고, 쓰러지는 바람에 도망치는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고, 가슴이 광선에 꿰뚫려 죽고, 그렇게 다들 죽어나간다.
카멜리아는 도약해서 사뿐히 한 집의 지붕에 올라간다. 그곳에서 사막으로 도망치는 자들을 하나하나 광선으로 쏴 죽인다.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로 광선을 쓰는 건 너무 에너지 낭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물단이 먼저 당도한 이상 허비할 시간이 없다. 뒤 탈 없게 전부, 그리고 빨리 죽이려면 어쩔 수 없다.
다 끝내고 보니 마을 전체가 피바다가 되어버렸다. 날씨도 후덥지근해서 금방 시체들이 썩어 문드러져 고약한 냄새가 날 터이다. 그건 불쾌하다. 카멜리아는 빨리 열쇠를 챙기고 돌아가자고 마음먹었다. 지붕에서 내려와 땅에 서니 아직 죽지 않고 버둥거리는 소년이 보인다. 하반신이 날아갔는데도 용케 살아있다. 그래서 광선으로 머리를 날려줬다.
“이만하면 됐겠지.”
어디서도 통곡은 들리지 않는다. 카멜리아는 자기가 기절시켰던 남자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린다. 뺨을 때리자 서서히 눈을 뜬다.
“우윽... 이게 대체... 욱, 우아아아아!!”
눈을 뜬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끔찍한 존재에 두려움에 휩싸이고 만다. 하지만 더 큰 공포가 그녀의 뒤에 있었다. 온 사방에 시체가 가득했다. 피와 내장으로 장식한 인간 육체의 껍데기들의 향연이다. 형연할 수 없는 악에 짓눌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한다.
그런 그에게 카멜리아가 속삭인다.
“다시 한 번 묻겠어. 유물단은 지금 어디 있지?”
원해서도 강요당해서도 아니다. 그의 손은 그냥 저절로 까마귀 성소를 가리켰다. 카멜리아는 싱긋 웃는다.
“처음부터 말해줬으면 좋았을걸. 그치?”
카멜리아는 그의 목을 꺾어버리고 아무렇게나 내던진다.
카멜리아는 유유히 까마귀 성소로 걸어간다.
그녀의 뒤에는 항상 그랬듯이 피바다가 펼쳐져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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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라 일행은 말없이 통로를 계속 걸어 나간다. 촌장의 실종과 팀의 불화 탓에 분위기는 축 처졌다. 갈란은 줄곧 땅을 바라보며 아딘의 손을 잡고 맨 뒤에서 걷고 있고, 카릴은 일부러 벽을 노려보며 걷고 있고, 블뢰즈는 카릴과 레이라 사이에 서서 걸으며, 레이라는 별 생각 없이 선두에 서서 걷고 있다.
아딘은 레이라의 뒷모습을 흘긋 바라본다. 처음 봤을 때부터 터무니없는 여자라는 건 알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신만 깊어진다. 과연 그녀가 이끄는 파티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카릴은 대체 어떻게 버티는 거고, 왜 남아있는 걸까? 둘 사이에 충돌지점이 꽤 있다는 건 이제 알았다. 근데 왜 레이라의 싸이코스러운 면면까지 감내해가며 레이라와 함께 다니는 걸까. 그녀는 귀족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런 유물단 따위 안 해도 될 텐데.
아딘은 살그머니 카릴의 뒤쪽으로 가 어깨를 드린다.
뒤돌아보는 카릴이 눈썹을 찌푸리며 말한다.
“왜?”
“잠시 뒤에서 얘기 좀 해도 될까?”
“나야 상관없지만. 무슨 바람이 든 거야?”
카릴은 레이라의 눈치를 보고 뒤편으로 간다.
“그래서? 뭔 얘기를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