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라자잔~ 팟!”
그러자 점토가 펑하고 폭발했다. 이런 광경을 처음 본 촌장, 갈란, 아딘은 몸을 움츠리며 경계한다. 하지만 폭발은 카릴이 그린 동그라미 안에서만 일어났다. 그 밖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갈란은 감탄하며 외친다.
“동굴족은 굉장하구나!”
카릴은 씩 웃으며 손가락을 흔든다.
“칫, 칫, 칫, 칫. 멍청한 꼬맹아. 동굴족의 경이로움은 이것만이 아니란다. 딴다라단~”
카릴은 즐거운지 콧노래를 부르며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놓고 연다. 그러자 안에서 형광 빛을 발하는 반딧불이들이 튀어나온다. 적어도 20마리는 되는 듯하다. 아딘은 놀라워하며 카릴에게 묻는다.
“이건 뭐야?”
“인간으로 치면 횃불과 비슷한 거려나. 동굴족이 지하도시에서 지내긴 하지만 너무 어두우면 곤란하거든. 그래서 이 반딧불이들을 가축화했지. 휘파람으로 조종할 수 있다구?”
카릴이 휘파람을 불자 반딧불이들은 그녀의 주위에 모여든다.
갈란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외친다.
“와아아아! 그냥 젖통만 큰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 꼬맹이 진짜 완전 실례되네...”
촌장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갈란을 말린다.
“아이고, 이것아.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니? 아하하.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뭐랄까, 너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하는 버릇이 있어서.”
레이라가 말한다.
“떠들 시간 없어. 들어가자.”
****************************************
성소는 좁고 낮았지만 던전은 넓고 높다. 몇 백 년 전에 어떻게 이런 걸 만들 수 있는지 정말로 놀랍다. 공기에서 축축한 냄새가 나는 듯하고 벽에는 물기가 줄줄 흐른다. 벽은 거칠거칠한 것에 비해 바닥은 비교적 매끈한 걸로 봐서 역시 사람의 손이 닿은 게 분명하다. 갈란은 여기저기 둘러보며 눈을 빛낸다.
“대단하도다! 성소 너머에 이런 공간이 있었다니!”
그러고는 입을 문지르며 말한다.
“그런데 딱히 까마귀 교에 중요한 것은 없는 듯하구나. 성소 훼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그 놈의 까마귀 교는 참, 아딘은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갈란 옆에 가서 말을 건다.
“너는 참 까마귀 교가 좋은가보네?”
“당연하도다. 자기 종교가 싫은 사람이 있겠느냐?”
“그렇구나. 그럼 무녀는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원해서 한 거야 아님...”
“우읏!”
갈란이 갑자기 경계하며 상반신을 뒤로 뺀다. 아딘은 당황해한다.
“어어? 왜?”
“으긋...... 그 얘기는 외부인에게는 잘 안 해준다.”
“아하. 미안, 미안. 내가 괜히 참견했네.”
“하! 하지만 아딘이라면 특별히 들려주겠느니라. 이 네 사람 중에서 가장 날 잘 대접해주기도 하고, 음. 그리고...”
“그리고?”
아딘은 갈란을 지그시 쳐다본다. 갈란은 웬만한 여자보다 선이 예쁜 아딘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자 그만 얼굴이 빨개지고 만다.
“됐다! 내가 말해주겠다는 데 이유는 필요 없도다. 우선 무녀 자리는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물려받는 것이니라. 하지만 난 그러지 못 했다. 내가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머니의 얼굴도 잘 모른다. 하지만 유언만큼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아딘은 갈란이 자신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갈란은 아버지라도 남아있었으니 좀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슬픔을 그렇게 비교할 순 없는 법이다.
“그 유언이 뭐였니?”
“사랑하는 갈란아. 내 말 잘 들으렴. 어머니의 뒤를 이어 훌륭한 무녀가 되어주어야 한단다.”
그렇게 말하고 갈란은 한동안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다.
“단 하나밖에 없는 엄마인데 내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 엄마가 살아있었으며 얼마나 즐거웠을지도 상상해본다. 그러면 그럴수록 지금 내게 있는 것만이라도 충실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래서 난, 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너무 소중하다. 절대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갈란은 말을 끝마치고 또 얼굴이 빨개진다. 갈란은 자기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며 외친다.
“아아악!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너무 많은 걸 말해 버린 것이다!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하하하. 괜찮아.”
아딘은 참 기특하다는 마음이 들어서 갈란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어린데도 이렇게나 심지가 곧다니. 나보다 나은걸.
걷던 레이라가 갑자기 멈추더니 무어라 말한다.
“이거 인상적이군.”
아딘은 레이라가 보는 방향을 본다. 과연 인상적이다. 거의 천장까지 닿을 것 같은, 적어도 20M 정도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석조 용 어머니 조각상이 있다. 온 몸으로 동그란 구체를 감싸고 있는 생소한 모습이다.
〈뭔가 보인다.〉
아딘은 몰래 속삭인다.
“프린? 왜 갑자기?”
〈이 장소는 좀 이상해. 흐릿하지만 과거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나만 그런가?〉
“너야 특별하니까 그렇겠지.”
〈흥, 무능한 인간 같으니. 특별히 네 시야에도 투사시켜주마.〉
“엇. 잠깐. 기다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딘의 눈에 신기한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유령 같은 것들이 석상 주위를 배회하고 있다. 자세히 보니 병사들이다. 석상 뒤에 난 커다란 통로로 나갔다 들어가며 무언가를 나르고 있는 듯하다.
이 지하 던전이 만들어지던 때인가? 아딘은 혀를 내두른다. 프린은 과거까지 볼 수 있는 거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터무니없는 것이 내 몸 속에 들어온 것 같다니까. 그런데 이렇게 강력한 존재가 샘 밖을 못 나가서 쩔쩔매고 있었다니, 참.
응?
“저건 뭐지?”
아딘의 눈에 뭔가가 보인다. 병사들이 감옥을 둘러싸고 있다. 그 안에 소녀가 있다. 머리가 너무 길어서 얼굴이 가려 보이지도 않는다. 꾀죄죄한 차림이다. 너무도 눈에 띈다. 저건 대체 뭐지?
“프린. 저기 감옥에 갇힌 소녀 보여? 뭘까?”
〈성노예 같은데.〉
아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뭐?”
〈옛날에는 많았어. 요즘은 없나?〉
“있을 리가 없잖아!”
자기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고 말아 일행의 주목을 끄고 말았다. 아딘은 씩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댄다. 거 참. 옛날 사람들의 윤리는 어떻게 되먹은 거야.
〈다 봤지? 이거 보여주는 거 은근히 피곤하네.〉
“이젠 됐어.”
어느새 일행은 거대 석상 앞에 섰다. 갈란은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볼을 부루퉁 부풀려 불만을 보인다.
“이게 뭐인 것이냐! 까마귀가 어디에도 없지 않느냐! 뒤에는 있겠지?”
갈란은 냅다 뛰기 시작한다. 촌장이 놀라 외친다.
“뛰지 마! 넘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갈란은 넘어지고 만다. 꽤 세게 박아서 소리가 쿵하고 났다. 아딘이 단번에 달려가 부축하고 보니 코피가 줄줄 흐른다.
“우윽... 우... 아프다...”
울먹울먹 거리지만 용케도 안 운다. 어느새 촌장이 옆에 와서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준다.
“이것아. 그러게 왜 혼자 들떠서 뛰고 그래?”
레이라는 그걸 보고는 어깨를 으쓱인다.
“별 거 아니네. 빨리 빨리 가자고.”
쿵ㅡ!
“뭐야!” “이런, 젠장!” “뭔 소리지?” “꺄아아악!”
갑자기 어디선가 들린 커다란 소리에 다들 바짝 긴장한다. 아딘은 빠르게 주위를 돌아본다. 통로가 일행이 지나온 것과 석상 뒤에 있는 것 두 개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 통로가 있었다. 방금 난 소리는 아마 석상 시점에서 봤을 때 동북 통로에서 난 듯하다.
쿵ㅡ!!
“우왓!” “더 커졌어!” “으앙! 무서워!” “다들 걱정 마라. 지하 던전에 들어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완전 위험한 거 아냐?”
이번의 굉음은 서북쪽에서 들려왔다. 다들 무기를 꺼내고 언제 어디선가 튀어나올지 모를 몬스터에 대비한다. 이런 공포스러운 상황을 처음 경험하는 갈란은 아딘의 뒤에 꼭 붙어 숨는다.
쿵ㅡ!!!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모든 통로에서 걸어 다니는 시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게다가 달린다. 놈들의 형체는 가괴하다. 온 몸이 썩어 문드러졌는데 갑옷의 무게 때문에 밑으로 처졌다.
레이라는 입술을 깨문다.
“빌어먹을, 좀비라니! 피 냄새를 맡고 온 거야!”
좀비들은 무서운 속도로 치달려온다.
“여기는 소생에게 맡겨주시게나!”
블뢰즈는 갑자기 곡도를 뽑아들고 일행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의 곡도의 검신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기하학적인 선들이 붉은 빛을 발한다. 아티팩트이다. 블뢰즈는 곡도를 휘두른다. 허공에 붉은 선이 생기더니, 그 선속에서 화염이 쏟아져 나와 우레처럼 좀비들을 덮친다. 불길에 휩싸인 좀비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며 흩어진다.
아딘은 입을 떡 벌린다.
“대단하다.”
당연하다. 블뢰즈는 비록 조용하지만 유물단 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전략을 짜는 브레인 역할, 그리고 최강의 무력을 가진 자. 그것이 블뢰즈이다. 블뢰즈가 또 곡도를 휘두르자 화염이 좀비들을 휘감는다.
그렇지만 혼자서 전부 상대하기에는 좀비가 너무 많다.
아딘은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건다.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프린이 알아서 축복을 걸어준다. 푸른 화살을 쏘자 코발트색 광선이 청명한 궤적을 남기며 좀비들을 꿰뚫는다.
“블뢰즈! 위험해!”
아딘은 블뢰즈 뒤로 접근하는 좀비를 보고 소리 지른다. 그리고 노란 화살을 쏘자 이리저리 꺾여가며 놈의 머리를 쪼개버린다.
“하아아압!”
레이라는 기합을 지르며 워 해머를 머리 높이 들어올리고, 그대로 바닥에다 냅다 찍어버린다. 그 충격이 바닥에 만든 금이 좀비들 무리 사이로 파고들더니, 굉음을 내며 바닥이 마치 물속의 악어가 불쌍한 물고기를 잡아먹듯이 이리저리 쪼개지며 좀비들을 집어삼킨다.
“삐이이이!”
한편 카릴은 반딧불이들을 적재적소에 위치시켜서 일행들의 싸움을 돕는다. 그리고 남는 반딧불이들은 직접 휘파람으로 조종해서 좀비들의 눈, 발목, 손목 등등을 파먹게 만든다. 본인도 너클을 끼고 있는지라 접근하는 좀비는 현란한 무술로 떡을 만들어 버린다.
하나같이 S급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어서 전투력이 장난이 아니다.
그러나 그래도 좀비들이 너무 많다.
레이라는 모두에게 명령한다.
“안 되겠어! 일단 모두 후퇴한다. 날 따라라!”